유령 연구 - 비밀에 부쳐진 말들, 삭제된 존재의 배회, 트라우마의 체현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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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찾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문화 선진국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과 세련된 드라마와 영화는 전쟁과 빈곤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성공 신화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가 눈부실수록 그 무대 뒤에 드리운 그림자는 더 어둡기 마련이다. 저자 그레이스 조의 기록은 우리가 일부러 모른 척해 온 그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용기 있게 열어젖힌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평생 인자한 미소 뒤에 말 못 할 사연을 숨겨온 우리 할머니가 떠오른다. "사실 나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픈 젊은 날이 있었다"라며 깊은 밤 비밀 이야기를 건네받은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실 이 책은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는 어렵고 딱딱한 전문 용어들이 글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침대 머리맡에서 편하게 읽을 만큼 대중적인 부류는 아니다. 때때로 낯설고 학술적인 단어들 앞에서는 숨을 고르고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하나뿐인 무기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자는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의 비극을 흔한 에세이나 감상적인 소설의 언어가 아닌, 차갑고 예리한 학문의 언어로 쓰고자 했을까. 그것은 아마 '속상하다', '가슴 아프다' 같은 일상적인 말들로는 강대국과 국가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의 깊이를 다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한 개인의 기구한 팔자''신세 한탄'으로 묻힐 뻔한 기지촌 성노동자 여성들의 고통은, '고향을 떠난 이들의 삶', '사회가 가한 폭력' 같은 정교한 개념을 통해 비로소 '외면해선 안 될 역사적 진실'로 세상에 드러난다. 차가운 학술 용어가 값싼 동정 대신 상처를 준 거대한 사회 구조를 명확히 짚어내는 수술칼이 되어준 셈이다. 덕분에 잊혔던 존재들은 가장 당당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찾는다.

 

책의 중심을 관통하는 철저한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적 성공이라는 거창한 이야기 뒤에 얼마나 끔찍하게 사람을 소외시키는 과정이 숨어 있는지 보게 된다. 6·25 동란 직후 한국이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국가 안보를 최우선시하던 시절, 가장 힘없고 취약한 여성들은 달러를 벌어오고 동맹을 유지하는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했다. 그러나 이후 국가가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국제사회에 번듯하게 서게 되자, 이들의 존재는 근대화된 조국의 '부끄러움'이자 '오점'으로 취급되어 역사의 공식 기록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10만 성노동자 여성들의 삶 역시 숨기기의 연속이었다. 이민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성공'을 위해 과거의 모든 상처는 없었던 일이어야 했고, 결국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끔찍한 시대의 폭력을 묻어두는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저자는 이를 분석하며 '유령'이라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가져온다. 여기서 유령은 무서운 이야기 속 귀신이 아니다. 정상적인 역사에서 쫓겨나 눈에 보이는 형태는 잃어버렸지만,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주변을 맴돌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억눌린 에너지 그 자체다.

 

더욱 소름 돋고도 놀라운 통찰은 이 유령 같은 상처가 세대를 뛰어넘어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뼈아픈 분석에 있다. 부모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삼켜야 했던 침묵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자녀 세대의 몸과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때때로 할머니나 어머니가 보이던 헛것이나 환청, 앞뒤가 맞지 않는 혼잣말들을 우리는 그저 개인의 '노망'이나 '정신병'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저자의 눈을 빌리면 그것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은 역사가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외치는 방식'으로 새롭게 풀이된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저자의 학문적 개념이 의외로 더 깊은 차원의 공감과 치유를 끌어내는 기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저자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조리 있게 네 아픔을 증명해봐"라며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조각난 기억을 억지로 짜 맞추는 대신, 부서진 고백과 이야기들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진실을 흐리려는 게 아니라, 산산이 조각난 마음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려는 치열한 노력이다.

 

슬프게도 이 책이 고발하는 비극은 완전히 끝난 과거의 일이 아니다. 수백 년 전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 돌아와 가문의 수치로 몰렸던 여인들(환향녀), 일제강점기의 끔찍한 전쟁터로 희생된 소녀들(위안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양공주)로 이어지는 착취의 역사는, 오늘날 화려한 대한민국의 뒷골목에서 거칠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다른 나라 이주 여성 노동자들의 삶 위로 고스란히 겹쳐진다. 철저한 연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 거대하고 잔인한 폭력의 반복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란 화려한 포장지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선 땅 밑의 감춰진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뼈아픈 반성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령 연구는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적 빚을 기억나게 하는 학문적인 청구서다. 비록 읽어내는 과정은 마음이 편치 않고 고통스럽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크기가 한 뼘 더 자라있음을 느낀다. 평생을 '수치스러움'이나 소외된 존재라는 낙인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던 내 할머니의 굽은 등을 이성적이고 지적인 언어로 뜨겁게 안아주는 이 다정하고 놀라운 경험을 모두가 느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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