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다! 교사를 위한 AI 에듀테크 활용 백과 - 온라인 출석부, 학부모 상담, 누가기록, 루브릭, 서술형/구술형 채점, 생기부까지! KERIS 선도 교사 7인이 교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았다! ㅣ 된다! 업무 능력 향상 200%
권의선 외 지음 / 이지스퍼블리싱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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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산업화 시대에 태어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21세기 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학교 현장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그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분필 가루를 마시며 갱지 시험지를 나눠주던 시절부터 전자칠판과 원격수업 프로그램을 부랴부랴 익히기까지, 나는 느리게나마 시대의 요구에 발을 맞추어 왔다. 지금도 기본적인 학습 코스웨어로 영작문과 발음을 지도하는데 제법 익숙하다. 정해진 틀 안에서 돌아가는 코스웨어 정도는 교직의 끄트머리를 향하는 말년 교사에게도 감내할 만한 변화였다. 그러나 최근 학교가 ‘디지털 선도학교’로 선정되고 인공지능(AI) 기반의 도구들이 밀려들면서 체감하는 중압감은 이전과 결이 다르다. 그 피로감은 거창한 정책 문서가 아니라, 매일 얼굴을 맞대는 동료 교사와의 미묘한 ‘디지털 간극’에서 비롯되었다.

 

외국어 교과 동료 중 디지털 감각이 남달라 자연스레 선두에 선 분이 계신다. 새로운 에듀테크나 생성형 AI를 가장 먼저 수업에 적용하고 교내 연수에서 사례를 공유하는 일은 늘 그의 몫이다. 문제는 그가 악의를 가져서가 아니라, 그에게 디지털 기술이 숨 쉬듯 자연스럽다 보니 가까스로 뒤를 따라붙는 ‘디지털 달팽이’ 교사들의 고충에 어쩔 수 없이 무심해 보인다는 데 있다. 그에게는 “계정 연동하고 프롬프트 복사해서 돌리면 쉬워요”라는 한마디로 끝나는 과정이, 돋보기를 고쳐 써야 하는 나 같은 중년 교사에게는 낯선 인터페이스와 인증 오류 앞에서 진땀을 흘려야 하는 거대한 장벽이다. 우리의 더딘 걸음이 그저 ‘아직 안 해본 것’ 정도로 가볍게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대열 끝자락에 매달려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보니, 어느결에 마음 한구석에는 말 못 할 답답함이 쌓여 갔다. 무심한 선도 교사에게 매번 기초 작동법을 되묻는 멋쩍음을 피하면서도 최소한의 내 몫을 해내야 했던 바로 그 무렵, 달팽이의 속도에 맞춰 한 단계씩 친절하게 짚어 주는 종이 지침서로 이 책을 만났다.

 

현직 선도 교사 일곱 명이 집필한 이 책은 ‘된다!’ 시리즈 특유의 편집 덕분에 달팽이 교사에게도 무척 다정하다. 화면 캡처마다 번호를 매기고 클릭할 위치를 화살표로 짚어 주어, 연수 시간에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던 설정 과정을 내 속도대로 멈춰가며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두꺼운 책에 펼쳐진 프레젠테이션 자동 생성이나 AI 이미지·음악 제작, 메타버스 같은 만물상을 다 쓸 줄 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화려한 멀티미디어 대신 텍스트의 정확한 이해와 교사의 육성 설명, 눈을 맞추는 문답만으로도 수업의 뼈대는 충분하다고 믿는 구닥다리 교사다. 더구나 온라인 수행평가 시간에 와이파이(WiFi)가 끊기고 사이트가 막혀 학생들의 항의 속에 진땀을 흘렸던 기억을 떠올리면, 생소한 도구를 무리하게 끌어들였다가 기기 오류와 씨름하느라 정작 수업을 망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백과사전에서 내게 꼭 필요한 대목만 펼쳐보듯, 4장 평가 분야의 ‘클리포(Clipo)’와 ‘스노클(Snorkl)’ 딱 두 가지만 골라잡았다.

 

첫 번째 도구인 ‘클리포’는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종이 서술형 평가의 ‘채점 지옥’을 덜어주었다. 코스웨어의 객관식 문제만으로는 아이들이 직접 철자와 문장을 써 내려가며 논리를 구성하는 과정을 가르칠 수 없기에 나는 여전히 연필로 쓰는 서술형 평가를 고집한다. 그러나 수백 장의 손글씨 답안지를 돋보기 너머로 해독하며 점수와 첨삭을 다는 일은 노안과 굳어진 어깨에 너무나 가혹한 짐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책의 안내대로 문항과 채점 기준(루브릭)을 입력하고 시험지 스캔본을 클리포에 올려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읽어야 했던 제각각의 필체를 광학문자인식(OCR)과 AI가 기민하게 텍스트로 읽어냈고, 핵심 표현의 포함 여부에 따라 일관성 있게 가채점과 피드백 초안을 달아주었다. 물론 최종 검수는 교사의 몫이지만, 백지상태에서 수백 장을 채점하는 것과 AI가 초안을 잡아 준 상태에서 검토하는 것은 피로도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두 번째 도구인 ‘스노클’은 기존 코스웨어의 빈자리를 메우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은 플랫폼이다. 평소 영작문 지도를 할 때면 서른 명 가까운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문장 구조나 어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썼는지 확인하며 첨삭해 주고 싶어도, 빠듯한 수업 시간 안에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본래 책에 소개된 스노클은 학생이 화면에 필기하며 동시에 음성 설명을 녹음해 제출하면 AI가 즉각 피드백을 주는 구술형 평가 도구다. 하지만 음성 구술 기능은 이미 ‘플랭스쿨’로 거의 대체하고 있던 터라, 스노클은 역할을 명확히 나누어 ‘영작문 연습 및 첨삭 지도’ 기능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연수에서 시연만 봤다면 영문 메뉴가 섞인 첫 화면에 숨이 막혀 창을 닫았겠지만, 책에 나온 한국어 피드백 설정법과 과제 배포 과정을 하나씩 따라 한 덕분에 수업에 필요한 기능만 알맞게 덜어내어 안착시킬 수 있었다. 아이들이 화면에 적은 서툰 영어 문장에 즉각적인 AI 첨삭이 달리는 과정을 통해, 그동안 객관식 정답률 숫자 뒤에 가려져 있던 아이들의 진짜 문장력과 고민의 흔적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마음속의 묵은 피로가 가시는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불편감은 앞서 나가는 동료의 속도를 표준으로 삼고 나 자신을 다그쳤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듀테크란 선도학교의 실적을 위해 백과사전의 모든 기술을 전시장처럼 늘어놓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꺼내 쓰는 ‘연장통’일 뿐임을 이 책을 통해 확인했다. 숙련된 목수가 세상에 새로 나온 수십 가지 전동 공구를 전부 다룰 줄 알아야만 좋은 가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내 손에 맞고 지금 다듬어야 할 나무에 꼭 필요한 연장 두어 개만 제대로 골라 쓸 줄 알면 그만이다.

 

여전히 우리 학교의 선도 교사는 회의 때마다 새로운 AI 플랫폼을 막힘없이 이야기하고, 그와 나 사이의 디지털 격차는 앞으로도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기존 코스웨어에 더해 이 책에서 건져 올린 ‘클리포’와 ‘스노클’이라는 두 개의 연장이면 충분하다. 이들 덕분에 수업과 평가가 수월해지고 여유로워졌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이 지향하는 목표가 결국은 학습자의 학업 향상과 평가의 수월성, 즉 교실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성’의 발현에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그러니 나처럼 교직의 끄트머리에서 디지털 선도학교의 빠른 물결과 동료의 무심한 속도감에 홀로 뒤처지는 듯한 피로감을 느끼는 ‘디지털 달팽이’ 교사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두툼한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복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목차를 천천히 넘기며 내 수업에서 가장 막막했던 순간을 덜어줄 도구 단 하나만 골라 그 페이지를 펼쳐 보시기 바란다. 돋보기를 고쳐 쓰고 책이 일러주는 대로 마우스를 한 칸씩 옮기다 보면, 달팽이의 속도로도 충분히 내 수업을 단단하게 일구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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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부시마니쿠스 - 문명 바깥의 슬기로운 사람들
정해종 지음 / 파람북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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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부터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의 몸과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서로 협력하는 능력은 인류의 생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했다. 정해종의 『호모 부시마니쿠스』는 그 오랜 관심에 새로운 질문을 보탠다.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어오는 동안 무엇을 놓쳤을까. 과학 기술 덕분에 생활은 분명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더 사람답게 잘 살아가고 있는지는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이 책은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지역 부시먼의 삶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문명의 기준을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심코 뒤처진 존재로 여긴다. 그들의 생활을 인류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오늘의 삶에서 배울 만한 것으로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인류의 기원을 궁금해하면서 정작 그들을 지나간 시대의 유물처럼 바라본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에도 엄연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전하는 책의 방식도 인상적이다. 학술적인 설명을 길게 늘어놓기보다는 간결하고 선명한 시인의 언어로 삶의 장면을 그려낸다. 판화와 글이 어우러진 구성은 한 권의 판화 도록을 펼쳐보는 듯하다. 그림에 눈길을 두었다가 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보면, 낯설었던 부시먼의 삶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저자는 굳이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책장을 넘기는 사이 그가 바라보는 세계와 전하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특히 마음에 남은 것은 나눔과 공동체를 대하는 부시먼의 태도였다. 먹을 것을 얻는 일만큼 함께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 생활에 대입하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넉넉하게 가져야 안심하고, 가진 것이 줄어드는 일에는 민감하다. 그러면서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의지할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자주 묻지 않는다. 안전하게 산다는 것이 반드시 더 많이 쌓아두는 일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몫을 살피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역시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바탕이다.

이 대목에서 진화에 대한 관심은 오늘의 생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생존의 역사를 경쟁과 승패만으로 읽기보다, 서로를 돌보고 어려움을 함께 견디는 능력에도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부시먼의 삶을 갈등도 부족함도 없는 이상적인 세계로 여기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미개하다고 보는 시선과 순수한 인간성의 상징으로만 보는 시선은, 실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찾은 것은 완벽한 삶의 모형이 아니라, 익숙한 생활을 다르게 바라볼 실마리였다.

 

50여 점 판화의 선명한 색상과 그 곁에 놓인 해설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 또한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자연의 가치를 말할 때조차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부터 따지곤 한다. 반면 책에서 만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대상이라는 구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부시먼의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다른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너무 일방적인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물론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니다. 의료와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것과 다른 생활방식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필요한 만큼 소비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살피며, 자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태도는 지금의 생활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삶에 비추어 내 선택을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인류가 얼마나 발전했는가보다, 그동안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은 과거의 것이라 과소평가하며 지나쳤던 삶에도 여전히 배울 것이 있음을 일깨운다. 인류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던 마음은 이제 곁에 있는 사람과 생명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갈지 묻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차분한 문장과 그림 사이에서 얻은 그 질문이, 이 책을 오래 기억하게 할 것 같다.

 

#파람북 #정해종 #호모부시마니쿠스 #부시먼 #시원 #문명밖사람들 #대자연 #삶의지혜 #인류의기원 #진화 #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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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들의 집, 피렌체의 인노첸티 - 르네상스와 함께 만개한 돌봄 혁명
조지프 루치 지음, 박희원 옮김 / 아고라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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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지프 루치는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가 수 세기 동안 감추어온 가장 음습한 그늘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흔히 르네상스라 하면 메디치 가문의 눈부신 후원,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빚어낸 찬란한 미학, 그리고 고대 인문주의의 부활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우아한 회랑 뒤편에서, 1445년 이래 장장 수백 년에 걸쳐 40만 명에 달하는 핏덩이들이 회전식 요람 속으로 내던져졌다. 이 책은 유럽 최초의 아동 전담 보호소인 인노첸티 보육원이 결코 이탈리아인들의 남다른 유아 애호나 낭만적 박애주의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곳은 화려한 번영의 도시가 잉태한 구조적 모순과 인간의 비겁함이 남긴 비극적 부산물을 처리하던 거대한 배수구였다.

 

당대 피렌체의 견고한 신분제와 가부장적 질서는 필연적으로 음지의 성적 착취를 양산했다. 천문학적 액수의 신부 지참금 때문에 결혼은 사랑이 아닌 가문 간의 냉혹한 자본 거래로 전락했고,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한 수많은 여성은 수도원에 갇히거나 빈민으로 내몰렸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기 전까지 혼인을 미뤄야 했던 미혼 남성층의 성적 욕망은 고스란히 집안의 하녀나 노예 여성들에게 향했다. 주인의 성적 대상이 되었다가 임신한 여성들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즉시 버림받았고, 사생아 출산이 곧 가문의 파멸을 의미하던 가톨릭 사회에서 산모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보육원의 벽에 뚫린 차가운 회전통뿐이었다. 여기에 죽음을 앞둔 거상 프란체스코 다티니의 유산 기부가 보여주듯, 보육원 존립의 밑바탕에는 고리대금업으로 축적한 부에 대한 영적 공포, 즉 하느님의 '최후의 회계 감사'에서 지옥 불을 피하려는 기득권층의 절박한 구원 거래와 사회 통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노첸티는 단순한 수용소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재정의하려 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시험대였다. 오염된 식수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포도주를 배급하며 생존을 도모했고, 기를란다요와 보티첼리의 일류 미술품으로 공간을 채워 시설의 위신과 후원자들의 신뢰를 확보했다. 그뿐 아니라 버려진 아이들에게 키케로의 수사학을 가르쳐 도시의 당당한 시민이자 기술자로 길러내려 했다. 그러나 그 고결한 교육의 이면에는 무자비한 회초리와 삼엄한 통제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지식을 습득했으나 억압적 규율 속에 숨죽여야 했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체벌은 사라졌으나 교육적 훈육과 책임마저 무너져 표류하는 우리 교실의 광경이 겹쳐 보인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사회가 약자를 배제하고 침묵시키는 방식을 포착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이다. 짐 싣는 안장(bast)에서 유래해 노동 계급의 짐짝으로 취급받던 '사생아(bastard)'나 차별의 뉘앙스를 담은 '비적출자'라는 단어는, 오늘날 가치 판단을 덜어낸 '혼외자'라는 말로 바뀌기까지 수백 년 동안 아이들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 보육원을 떠났으나 가부장제의 벽에 부딪혀 되돌아온 여성들을 향해 쏟아진 '되돌아온 것들(Le ritornate)'이라는 멸칭은, 병자호란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고 살아 돌아왔음에도 정절을 잃었다며 손가락질당하고 '화냥년'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되었던 조선의 '환향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와 시스템의 실패를 가장 연약한 여성에게 덮어씌워 희생양 삼았던 폭력의 역사는 시공간을 초월해 닮아 있다.

 

책의 결말에 이르러 역사의 시선은 6백 년 전의 피렌체에서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대한민국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인노첸티의 기록이 증언하듯, 세상의 문턱에서 '내던져진 아이들(gittatelli)'은 브루넬레스키의 아치 아래를 지나며 비로소 '발견된 아이들(trovatelli)'이 되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수백 명의 아이를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국제 입양 상위국이라는 부끄러운 현실, 그리고 0.7명대라는 출산율 통계에는 온 사회가 호들갑을 떨면서도, 업둥이로 자란 아이들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어 아무런 기반 없이 시설을 떠나 살아가야 하는 각박한 현실에 둔감한 점은 피렌체의 모순과 너무나 흡사하다. 결국 이 책은 화려한 르네상스의 복식사를 읊는 옛이야기가 아니다. 빛나는 번영의 뒤편에 선 채, 우리는 지금 세상에 태어난 가장 취약한 생명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묻는 묵직하고 아픈 질문이다.

 

#피렌체의인노첸티 #아고라 #온라인독서모임 #한달한권할만한데 #아이들의집 #아동정책 #보육원 #이탈리아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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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어공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
신범용 지음 / 좋은땅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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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카투사 공병대가 야전 임시 교량 설치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량 연결 작업 중 중요 부품의 고장으로 부교 하나가 강물에 통째로 떠내려가기 직전이었다. 현장의 한국군 대원들은 이 비상 상황을 미군 본부에 무전으로 즉시 보고해야 했으나, 군사 용어가 섞인 마땅한 영어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했다. 이에 대원들은 대학원 출신 사병을 불러와 보고를 맡겼다. 하지만 영어를 책으로만 배운 데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머릿속 단어만 찾던 그는 말 한마디 떼지 못하고 진땀을 쏟았다. 그 순간,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졸 출신 3년 차 말년 병장이 나섰다. 그가 외친 한마디는 너무나 간단한 "No bridge, no go!"였다. 본부에서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즉시 조치에 들어갔다. 그가 3년간 미군들과 부대끼며 체득한 실전 영어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영어교육학의 학술적 이론과 국내 영어 학습 환경의 현실적 간극을 경험해 온 처지에서 보자면, 이 책은 기존 영어 학습 관련 서적의 틀을 깨부수는 아주 매력적인 안내서이자 마음가짐을 다잡아 주는 고언이다. 필자는 무려 영어교육학을 전공씩이나 한 석사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도, 정작 필요한 순간에 생각한 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건 예사였고, 자신보다 유창한 영어 사용자를 마주할 때마다 문득 영어 능력 부족과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오랜 기간 영어를 공부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겪어 봤을 것이다.

 

“우선 영어 음성이 지닌 그 특유의 리듬에 적응할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영어 음성에 충분히 노출되어야만 합니다. 또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뜻을 거의 모른다면 의미 역시 제대로 파악이 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분명 제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안 들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할 때도 종종 겪는 일입니다.” (116쪽)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전공자들이나 학계에서 사용하는 '인지적 여과장치(Cognitive Filter)', '음의 전이(Negative Transfer)', '언어 간 간섭'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외국어 습득 이론의 핵심을, 비전공자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일상의 언어 “Take Things Easy”라는 말로 잘 풀어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과 영어 능력이 성공의 절대적 잣대라는 과도한 사회적 부담감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 현상, 즉 '영어 병'이 어떻게 한국 학습자들의 심리적 장벽을 높이고 괴롭혀왔는지 정면으로 지적한다. 특히 그가 20년간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도출해낸 '자동의 감각'이라는 개념은,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제창한 '언어 습득 장치(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의 작동 원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물론 이 책에 학술적인 용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학술적 배경이 전무한 상태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LAD라는 학술 용어를 미리 알고 이론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영어가 외국어인(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서 20년간 고통받고 방황한 끝에 인류가 공통으로 지닌 언어 습득의 본질을 스스로 '재발견'해냈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몸으로 부딪친 고생 끝에 터득한 이 진리를 기꺼이 사회와 공유하고자 한 저자의 취지는 매우 높이 살 만하다. 중도 포기를 모르고 매진했던 그의 우직함과 고집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결실이다. 따라서 영어가 절실히 필요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지만 학습 능력이 따라주지 않거나 여건이 부족해 고생만 거듭해 온 이 땅의 무수한 학습자들에게 적잖은 위로와 희망을 전해준다. 저술의 바탕에는 '영어 격차'라는 용어처럼 이미 계층화되고 고착된 사회적 현실 속에서 마음마저 단단히 굳어버린 힘겨운 학습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 따뜻한 진심이 느껴진다.

 

자동의 감각이란 곧 인간의 뇌 속에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언어 흡수 장치'를 뜻한다. 어린아이가 힘겹게 문법 규칙을 외우지 않고도 부모의 말을 자꾸 들으며 자연스럽게 말문이 터지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언어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익히는 일종의 '내장형 언어 엔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 학습자들이 겪는 답답함과 포기는 절대로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다. 전공자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영어 병과 사회적 강박으로 인해, 그저 수많은 외국어 가운데 하나일 뿐인 영어를 '몸으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체화할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완벽하게 맞혀야 하는 시험 과목'으로 다뤄온 그릇된 방식 때문이다.

 

“제가 영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해지는 데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반복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이 만드는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기에 우직하게 기본을 다지는 데 공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148쪽)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대상은 학교와 학원, 인강 등에 막대한 시간과 돈을 쓰고도 영어 병이라는 마음의 짐 때문에 여전히 영어가 두려운 대다수의 성인 한국인 학습자들이다. (언어학적으로 열 살 정도면 이미 성인이다) 이들은 이미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와 문법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실수하면 어쩌지"라는 정의적 여과장치(affective filter)의 과작동과 머릿속 번역 습관(모국어 간섭 현상) 때문에 막상 말을 하거나 들을 때 과부하가 걸려 말문이 막히곤 한다. 저자는 출세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영어를 매개하는 과도한 기준, 원어민 발음에 대한 강박, 틀리면 창피하다는 체면을 내려놓고 목표 기준을 대폭 낮추라고 권한다. 이는 마음의 부담을 줄여 뇌가 가진 본래의 언어 흡수 능력을 다시 활성화하는 매우 실천적인 해결책이다.

 

또한 새로운 인강이나 족집게 교재를 찾아 전전하면서도 늘 제자리를 걸으며 지쳐버린 중급 단계 학습자들에게도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문제의 원인이 지식 부족이 아니라 사회적 압박과 잘못된 접근 방식에 있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진짜 공부 습관을 세우도록 도와준다. 나아가 자녀에게 효과적인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학부모나 교사들에게도 필수적인 지침서가 된다. 아이들에게 영어 병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쉬운 소리 노출과 친숙한 콘텐츠를 활용해 편안하게 자극을 주는 환경 구성이 왜 중요한지 명확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결국 구사력이란 건 그런 위기감과 절박함이 어느 정도 따랐을 때 비로소 발달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위기감에 의해서 적극성과 잠재된 능력이 비로소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157쪽)

 

결국 이 책은 영어를 처음 시작하는 왕초보보다는, 오랜 기간 공부했음에도 '영어 병'과 사회적 강박에 지쳐 좌절을 겪어온 학습자들에게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는 안내서다. 비록 저자가 겪어온 시행착오는 고단했을지라도, 그 방황 끝에 건져 올린 깨달음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떠내려갈 뻔한 부교를 단숨에 붙잡은 그 절박한 한마디처럼, 그리고 전공자로서의 허울 뒤에 가려져 있던 솔직한 고백 속에서 피어난 '자동의 감각'을 통해, 영어가 무슨 대단한 언어라기보다 가볍게 다가설 수 있는 소통의 도구임을 깨닫게 된다. 영어 공부에 얹힌 거창한 기대치를 내려놓고 영어와 편안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쯤 차분히 펼쳐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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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어공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
신범용 지음 / 좋은땅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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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특히 영어를 배울 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임을 일깨우는 친절한 위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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