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스 콜 - 주의력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의 비즈니스와 정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크리스 헤이즈 지음, 박유현 옮김 / 사회평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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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이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바다의 반인반어 신 또는 요괴로,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암초에 부딪쳐 죽게 만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사이렌은 오랫동안 파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오디세우스는 이 유혹을 피하기 위해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은 채 노래를 듣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배를 무사히 지켜냈다. 아마 호기심에서라도 사이렌의 노래는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의 로고도 바로 이 사이렌에서 따온 것으로, ‘이 커피의 향과 맛이 당신을 유혹할 만큼 강렬하다는 의미를 은근히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저자는 사이렌을 우리의 주의력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 비유하고 있다.

 

이 책의 초입에서 헤이즈는 유발 하라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언급한다. 두 책 모두 우리가 집중하기 어려워진 이유를 다루지만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헤이즈는 우리의 주의력이 어떻게 광고나 통신 회사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이에 따라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뉴스나 소셜미디어 같은 미디어 환경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까지 조종하려 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하라리는 좀 더 넓은 역사적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디지털 기술과 정보 과잉이 개인의 집중력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판단력과 민주주의까지 위협한다고 본다. 결국 헤이즈는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문제들에 주목하고, 하라리는 더 큰 틀에서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대 사회는 주의력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터다. 스마트폰, SNS, 각종 뉴스와 알림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한다. 이 책은 우리의 소중한 주의력이 어떻게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진보적 성향의 TV 쇼 진행자로서 이 문제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자기 경험을 통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가 소개하는 심리학 연구와 일상의 경험담은 우리가 매일 느끼는 혼란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책 한 권을 집중해서 읽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는 일조차 어려워진 현실이 안타깝다.

 

헤이즈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단순한 집중력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 우리의 주의력에 대한 소유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9세기 산업화가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우리의 주의력을 상품으로 바꿨다. 그런데 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주의력은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무엇에 집중할지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기업의 광고나 기술이 대신 정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헤이즈는 주의력을 단순히 무언가에 관심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의식 그 자체라고 본다. 우리가 가진 정신 에너지는 한정돼 있고 지금은 수많은 기업과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경쟁 중이다. 그는 주의력을 상품처럼 설명하며, 기술 기업, 언론, 정치인들이 어떻게 우리의 짧은 관심을 붙잡아 돈으로 바꾸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슬롯머신 모델에 대한 분석은 인상 깊다. 소셜미디어는 단순히 주의를 빼앗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사마귀에 기생하는 연가시처럼 아예 사람의 뇌를 조종하듯 설계됐다고 말한다. 짧은 자극, 새로운 정보, 긴장과 해소, 반복되는 패턴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구조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뇌를 어떻게 반응하게 만드는가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흥미롭다. 그는 트럼프를 주의력 시대의 상징이라 부른다. 트럼프는 부정적인 관심도 긍정적인 관심만큼 효과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분노와 논란을 만들어 끊임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런 방식은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 더 잘 맞는다. 그래서 사회의 대화는 점점 시끄럽고 산만해진다. 헤이즈는 이런 현상을 주의력 군벌주의라고 표현한다.

검색 엔진이나 SNS 같은 기술 플랫폼은 처음엔 유용했지만, 점점 광고와 의미 없는 정보로 가득 찬 혼란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순수한 의도로 시작된 괜찮은 이성 찾기조차 상업적인 광고로 도배된 페이스북이 그 대표적인 예다. 결국, 이렇게 상업화된 관심 경쟁에서는 자극적인 이슈나 화제를 만드는 사람들만 주목받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인물들이 능력보다 주의를 끄는 능력으로 성공하는 모습은 사회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헤이즈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주의력 위기를 과거의 역사적 변화와 연결해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는 오늘날 주의력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19세기 신문의 변화 같은 과거 사례와 비교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링컨과 더글러스의 90분 토론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었던 시대를 보여준다. 반면 오늘날 대선 토론은 짧은 시간 안에 상대방의 험담만 쏟아내기 바쁘다. 이 차이는 우리가 얼마나 집중력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헤이즈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동이 상품이 되며 인간이 소외됐던 것처럼 주의력의 상품화도 사람을 소외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는 인공지능(AI)이 만든 콘텐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AI가 자동으로 만든 콘텐츠는 깊은 성찰이나 창의적 사고 없이 그저 표면적이고 기계적인 결과물일 뿐이며 이런 콘텐츠는 우리의 사고를 더 얕고 산만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AI를 사용할 줄 모르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호들갑을 떨고, 경쟁적으로 열리는 chatGPT 사용법 강연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가 처한 이 정보 과잉 시대의 혼돈은 매우 심각하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스스로 주의력을 관리하고 깊은 사고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개인의 실천 없이는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주의력을 되찾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작은 실천을 권하며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물론 이 책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헤이즈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다소 미약하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대신 단순한 전화기를 쓰자는 조언이나 규제가 필요하다는 말은 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으로서는 부족하다. 또 일부 내용은 마치 교과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점들이 책의 전체적인 가치를 크게 해치는 것 같지는 않다.

 

헤이즈는 단순히 산만한 주의력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금의 정보 시스템이 우리의 사고방식, 소통 방식, 그리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의력을 지키는 일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 의식을 흔드는 큰 힘들과도 맞서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한다. 요즘처럼 집중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 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무엇을 잃게 될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관심비즈니스 #주의력자본주의 #집중력 #사이렌스콜 #크리스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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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스 콜 - 주의력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의 비즈니스와 정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크리스 헤이즈 지음, 박유현 옮김 / 사회평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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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주의력‘에 이어 새롭게 살펴보는 주의력 자본주의 시대의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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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에릭 라인하르트 지음, 이혜정 옮김 / 아고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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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에릭 라인하르트라는 작가를 잘 몰랐다. 고전 동화 신데렐라를 차용한 책 제목에서 시와 풍자를 버무린 어른들을 위한 현대 동화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실망감은 없었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독서 경험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첫 번째 놀라움은 네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교차하며 얽히는 구조였다. 두 번째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인상과 달리 등장인물이 전부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세 번째로는 그중 한 인물이 바로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후 다른 인물들도 모두 작가가 투영한 다양한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의 출발점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신을 등장인물로 삼고 그와 닮은 세 명의 분신, 즉 아바타를 교차해 등장시킨다. 그들은 작가가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실제 그렇게 되었을 법한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부유한 주식 중개인인 로랑 달이라는 캐릭터가 집중적으로 그려지며, 나머지 두 사람자존감 낮은 백수 파트리크와 지질학자 티에리는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질학자는 거의 300쪽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한 인물의 기억이 다른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인생이 재구성되는 장면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벗어나 독특하고 대담한 실험을 감행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따로인 듯하면서도 결국 하나로 수렴되고, 독자는 책장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작가가 작품 속에 자신을 드러낸 이유를 자기애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다. 신화나 특정 상황을 변주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방식은 신선하고 흥미롭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의도가 점점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동화 속 신데렐라에 빗댄다. 비평가들의 혹평으로 인해 화려한 마차가 호박으로 변한 자신의 경험은, 평범한 환경에서 출발해 문학이라는 무대에 오르려 했던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데렐라는 작가 자신이었고, 동시에 사회적 제약에 맞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신데렐라의 시선으로 자신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삶들을 상상한다. 만약 23살 때 마고라는 매혹적인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독자들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정이 가까워지고 소설이 끝나갈 무렵, 작가는 독자에게 종이와 잉크로 만든 유리구두를 남긴다. 언젠가 그 유리구두가 독자와 작가를 다시 만나게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등장인물이 수시로 바뀌고, 이름이나 설정이 겹쳐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혼란이 서서히 매혹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불편할 정도로 강렬하거나 음울한 장면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냉소적인 유머와 세련된 문장은 끝까지 독자를 끌고 간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문체는 빠르면서도 꼼꼼하고, 밀도가 높으며, 때로는 지나칠 만큼 서정적이고 풍자적이다. 간결함을 추구하는 부류의 작가와는 달리 작가는 반대로 모든 것을 복잡하게 표현한다. 그는 지나치게 정확한 디테일을 통해 거의 현실에 근접한 묘사를 완성한다. 이 덕분에 독자의 상상력이 끼어들 틈은 줄어들지만, 그 정밀함 자체가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랑과 섹스, 헤지펀드와 세계화, 가을의 분위기, 샴페인 사회주의자의 위선, 파리의 거리와 카페 테라스, 젊은 여성들의 시선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기록하며, 독자가 그 세밀한 세계 속에 완전히 들어가도록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이 소설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 프랑스 사회의 경제 구조와 관습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네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는 삶을 보여준다. 성공에 대한 집착 속에서 좌절을 겪고, 부모와 사회에 대한 분노로 파괴적인 선택을 하고, 성적인 일탈로 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독자들을 통해 그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작품 이름을 신데렐라로 지었을까?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는 의지와 그걸 가로막는 벽 사이의 싸움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작가 개인의 성적 강박과 집착도 은근히 드러난다. 사회의 폭력성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한 이 작품은, 때론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주식 중개인의 삶에 대한 서술조차도 광기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책은 몽상가 기질이 있고 감성적인, 특히 길고 지루하고 정신없는 텍스트에도 잘 견디는 인내심 있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아마 가을이라는 계절을 사랑하는 이라면 더욱더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적 실험이자 매혹적인 혼돈 자체인 이 작품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잊을 수 없는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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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옛 도시를 걷다 - 오랜 기억을 간직한 옛 도시에서 마주한 시간과 풍경
여홍기 지음 / 청아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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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행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새로운 장소, 낯선 풍경, 처음 접하는 음식, 특별한 체험 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익숙한 여행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행을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사전적 정의 속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끄집어내며, 고대 문명의 흔적이 살아 있는 도시들을 직접 발로 걸으며 시간과 인간의 삶을 만나는 여정을 안내한다. 이 여정은 단순한 사실의 전달과 정보의 나열에서 삶과 문명,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루시(Lucy)’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인체의 잠재력을 100% 끌어올리며 인류의 기원을 향해 시간을 역행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시간의 본질을 마주한 순간, 그 눈빛과 표정에는 경이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그것은 단지 공상 과학적 상상이 아니라 이 책이 말하는 여행의 본질과도 닮았다. 나 역시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 고대 도시의 골목을 걷는 상상을 하며, 공간을 넘어 시간 속을 걷고, 역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곳에 살아 숨 쉬는 삶의 흔적을 느껴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저자는 시안, 볼루빌리스, 카르카손, 케스키크룸로프와 같이 이름조차 생소한, 그러나 인류 문명의 전환기를 품은 도시들을 직접 걸으며 풍광을 촬영하고 시간을 역사라는 공통분모로 엮었다.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걷는행위를 통해 그는 도시를 보는 방식을 근본부터 바꾼다. 단순히 관광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간직한 기억과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전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멈추고, 바라보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유의 과정임을 저자는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자동차 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더하여 발끝으로 닿는 도시의 디테일은 살아 있는 역사이며 생생한 이야기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도시의 겉모습보다는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이다. 도시 하나하나에 깃든 전쟁, 신화, 종교, 공동체의 흔적들을 발로 밟고 눈으로 담으며, 독자에게는 풍경이 아닌 기억으로서의 도시를 건넨다.

 

문득, 사진으로만 보는 오래된 도시들의 풍광이 아쉽게 다가온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기자기한 골목과 유서 깊은 유적들을 보면 실제로 걸어보지 못한 그곳을 나도 한 번 직접 가 보았으면 하는 가벼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책이 전해주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다. 고대 신전의 기둥 하나, 오래된 돌길 위 마차 바퀴 자국,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 하나조차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머금은 이야기이며 우리가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이다. 저자는 마치 친구처럼 혹은 시인처럼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전해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하나의 실타래를 손끝으로 풀어내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왔던 느림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무엇이든 짧은 시간 내에 재빨리 해치우는 게 미덕이 된 시대에, 저자는 천천히 걷는 여행을 통해 삶의 속도를 재정의하려 한다. 허름한 골목길, 이름 없는 카페 앞의 화분 하나, 색 바랜 표지판몇 군데 되지도 않는 여행지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때로는 웅장한 유적보다도 그러한 사소한 장면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그 울림은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도시를 걷는다는 행위가 단지 과거를 마주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강조한다. 낯선 도시의 오래된 골목에서 마주치는 것은 결국 현재의 나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정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긴 시간의 층위 속에 놓여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연속성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또한 과거를 오늘의 일상으로 불러오는 행위다. 디지털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자주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그러나 도시의 구석구석에선 인간이 쏟은 노력과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그런 도시들은 현대 도시가 잃어버린 인간적인 감성과 여유를 품고 있다. 작은 벽돌 하나에 담긴 일꾼의 손길, 이름 모를 석공의 숨결 등 모두 과거의 삶이 현재와 만나는 가장 따뜻한 흔적이다.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디지털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아날로그적 감성과 아름다움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도시의 표면만을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을 느끼는 여행. 그렇게 천천히, 깊이 걷는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나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공간을 넘어 시간을 걷는 일이자, 그 속에서 나 자신과 조용히 대화하는 시간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큰 수고로움 없이도 세계 각지의 스물한 군데 도시들을 여유롭게 걸어보시길 바란다.

 

#인문 #도시의역사 #문화유적 #세계옛도시를걷다 #청아출판 #도시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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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옛 도시를 걷다 - 오랜 기억을 간직한 옛 도시에서 마주한 시간과 풍경
여홍기 지음 / 청아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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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겉모습만 보고 소비하는 여행을 즐기셨다면, 이번에는 도시에 얽힌 역사를 배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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