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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에릭 라인하르트 지음, 이혜정 옮김 / 아고라 / 2010년 2월
평점 :
사실 처음엔 에릭 라인하르트라는 작가를 잘 몰랐다. 고전 동화 신데렐라를 차용한 책 제목에서 시와 풍자를 버무린 어른들을 위한 현대 동화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실망감은 없었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독서 경험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첫 번째 놀라움은 네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교차하며 얽히는 구조였다. 두 번째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인상과 달리 등장인물이 전부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세 번째로는 그중 한 인물이 바로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후 다른 인물들도 모두 작가가 투영한 다양한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소설의 출발점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신을 등장인물로 삼고 그와 닮은 세 명의 분신, 즉 아바타를 교차해 등장시킨다. 그들은 작가가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실제 그렇게 되었을 법한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부유한 주식 중개인인 로랑 달이라는 캐릭터가 집중적으로 그려지며, 나머지 두 사람—자존감 낮은 백수 파트리크와 지질학자 티에리—는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질학자는 거의 300쪽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한 인물의 기억이 다른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인생이 재구성되는 장면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벗어나 독특하고 대담한 실험을 감행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따로인 듯하면서도 결국 하나로 수렴되고, 독자는 책장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작가가 작품 속에 자신을 드러낸 이유를 자기애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다. 신화나 특정 상황을 변주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방식은 신선하고 흥미롭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의도가 점점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동화 속 신데렐라에 빗댄다. 비평가들의 혹평으로 인해 화려한 마차가 호박으로 변한 자신의 경험은, 평범한 환경에서 출발해 문학이라는 무대에 오르려 했던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데렐라는 작가 자신이었고, 동시에 사회적 제약에 맞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신데렐라의 시선으로 자신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삶들을 상상한다. 만약 23살 때 마고라는 매혹적인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독자들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정이 가까워지고 소설이 끝나갈 무렵, 작가는 독자에게 종이와 잉크로 만든 유리구두를 남긴다. 언젠가 그 유리구두가 독자와 작가를 다시 만나게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등장인물이 수시로 바뀌고, 이름이나 설정이 겹쳐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혼란이 서서히 매혹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불편할 정도로 강렬하거나 음울한 장면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냉소적인 유머와 세련된 문장은 끝까지 독자를 끌고 간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문체는 빠르면서도 꼼꼼하고, 밀도가 높으며, 때로는 지나칠 만큼 서정적이고 풍자적이다. 간결함을 추구하는 부류의 작가와는 달리 작가는 반대로 모든 것을 복잡하게 표현한다. 그는 지나치게 정확한 디테일을 통해 거의 현실에 근접한 묘사를 완성한다. 이 덕분에 독자의 상상력이 끼어들 틈은 줄어들지만, 그 정밀함 자체가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랑과 섹스, 헤지펀드와 세계화, 가을의 분위기, 샴페인 사회주의자의 위선, 파리의 거리와 카페 테라스, 젊은 여성들의 시선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기록하며, 독자가 그 세밀한 세계 속에 완전히 들어가도록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이 소설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 프랑스 사회의 경제 구조와 관습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네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는 삶을 보여준다. 성공에 대한 집착 속에서 좌절을 겪고, 부모와 사회에 대한 분노로 파괴적인 선택을 하고, 성적인 일탈로 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독자들을 통해 그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작품 이름을 신데렐라로 지었을까?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는 의지와 그걸 가로막는 벽 사이의 싸움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작가 개인의 성적 강박과 집착도 은근히 드러난다. 사회의 폭력성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한 이 작품은, 때론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주식 중개인의 삶에 대한 서술조차도 광기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책은 몽상가 기질이 있고 감성적인, 특히 길고 지루하고 정신없는 텍스트에도 잘 견디는 인내심 있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아마 가을이라는 계절을 사랑하는 이라면 더욱더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적 실험이자 매혹적인 혼돈 자체인 이 작품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잊을 수 없는 독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