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옛 도시를 걷다 - 오랜 기억을 간직한 옛 도시에서 마주한 시간과 풍경
여홍기 지음 / 청아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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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행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새로운 장소, 낯선 풍경, 처음 접하는 음식, 특별한 체험 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익숙한 여행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행을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사전적 정의 속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끄집어내며, 고대 문명의 흔적이 살아 있는 도시들을 직접 발로 걸으며 시간과 인간의 삶을 만나는 여정을 안내한다. 이 여정은 단순한 사실의 전달과 정보의 나열에서 삶과 문명,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루시(Lucy)’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인체의 잠재력을 100% 끌어올리며 인류의 기원을 향해 시간을 역행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시간의 본질을 마주한 순간, 그 눈빛과 표정에는 경이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그것은 단지 공상 과학적 상상이 아니라 이 책이 말하는 여행의 본질과도 닮았다. 나 역시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 고대 도시의 골목을 걷는 상상을 하며, 공간을 넘어 시간 속을 걷고, 역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곳에 살아 숨 쉬는 삶의 흔적을 느껴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저자는 시안, 볼루빌리스, 카르카손, 케스키크룸로프와 같이 이름조차 생소한, 그러나 인류 문명의 전환기를 품은 도시들을 직접 걸으며 풍광을 촬영하고 시간을 역사라는 공통분모로 엮었다.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걷는행위를 통해 그는 도시를 보는 방식을 근본부터 바꾼다. 단순히 관광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간직한 기억과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전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멈추고, 바라보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유의 과정임을 저자는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자동차 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더하여 발끝으로 닿는 도시의 디테일은 살아 있는 역사이며 생생한 이야기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도시의 겉모습보다는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이다. 도시 하나하나에 깃든 전쟁, 신화, 종교, 공동체의 흔적들을 발로 밟고 눈으로 담으며, 독자에게는 풍경이 아닌 기억으로서의 도시를 건넨다.

 

문득, 사진으로만 보는 오래된 도시들의 풍광이 아쉽게 다가온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기자기한 골목과 유서 깊은 유적들을 보면 실제로 걸어보지 못한 그곳을 나도 한 번 직접 가 보았으면 하는 가벼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책이 전해주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다. 고대 신전의 기둥 하나, 오래된 돌길 위 마차 바퀴 자국,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 하나조차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머금은 이야기이며 우리가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이다. 저자는 마치 친구처럼 혹은 시인처럼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전해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하나의 실타래를 손끝으로 풀어내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왔던 느림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무엇이든 짧은 시간 내에 재빨리 해치우는 게 미덕이 된 시대에, 저자는 천천히 걷는 여행을 통해 삶의 속도를 재정의하려 한다. 허름한 골목길, 이름 없는 카페 앞의 화분 하나, 색 바랜 표지판몇 군데 되지도 않는 여행지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때로는 웅장한 유적보다도 그러한 사소한 장면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그 울림은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도시를 걷는다는 행위가 단지 과거를 마주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강조한다. 낯선 도시의 오래된 골목에서 마주치는 것은 결국 현재의 나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정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긴 시간의 층위 속에 놓여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연속성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또한 과거를 오늘의 일상으로 불러오는 행위다. 디지털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자주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그러나 도시의 구석구석에선 인간이 쏟은 노력과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그런 도시들은 현대 도시가 잃어버린 인간적인 감성과 여유를 품고 있다. 작은 벽돌 하나에 담긴 일꾼의 손길, 이름 모를 석공의 숨결 등 모두 과거의 삶이 현재와 만나는 가장 따뜻한 흔적이다.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디지털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아날로그적 감성과 아름다움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도시의 표면만을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을 느끼는 여행. 그렇게 천천히, 깊이 걷는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나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공간을 넘어 시간을 걷는 일이자, 그 속에서 나 자신과 조용히 대화하는 시간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큰 수고로움 없이도 세계 각지의 스물한 군데 도시들을 여유롭게 걸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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