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비박사 평전 석주명
이병철 지음 / 광문각출판미디어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석주명은 한국 나비의 가짓수를 정하고 그 이름을 지은 나비 분류학자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외국인들이 그보다 50년 앞서 한국 나비를 연구하면서 범한 오류를 바로잡은 일이다. 그는 외국인들이 같은 종인데 형질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전혀 다른 종으로 분류한 동종 이명 921개 가운데 844개를 말소했다. 그는 60만 마리가 넘는 나비의 형질을 일일이 측정하고 통계를 내어 '개체 변이에 다른 분포곡선'이론을 창안함으로써 동조이명을 말소하고 한국 나비를 250종으로 최초 분류했다. (-26-)
석주명에 의해 이룩된 <조선산접류 목록>은 지금까지 이 분야의 어떤 제작물보다 이해하기 쉽고,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채이다. 저자는 지난 10여 년간 쏟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대해 높은 찬사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28-)
1951년 1월 4일 밤 신당동 어느 한옥 안방,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석주선은 일손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옆에서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초조한 낯빛으로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 역시 말이 없었다. 어수선해진 뽀따리들이 널린 방 안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세사람 사이에는 꽤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39-)
송도고보에 취임한 석주명은 곧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나비 채집을 시작했다. 당장 참조할만한 나비 전문서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나비를 채집해서 일단 그것들의 학명을 알아본 뒤 개성 지방의 나비 분포 상태를 밝혀낼 속셈이었다. (-80-)
조선인이 기록한 시대로, 1929년 조복성이 '울릉도산 인시목'을 발표한 때부터 1939년까지다. 1932년 석주명이 첫 논문을 발표한 이래 '배추흰나비의 날개 길이 변이','굴뚝 나비의 뱀눈무늬 변이' 등 논문 70여 편을 발표한 전성기이다. (-145-)
석주명은 송도중학을 사직하고 1942년 7월부터 경성제국대학교 미생물학 교실에 촉탁 연구원으로 들어가 개성에 있는'생약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아무리 일본 제국주의 시대였지만 대학에 소속된 신분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게다가 학생을 가르치는 무거운 짐에서도 벗어나 홀가분해진 그는 더욱 정열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171-)
작가 이병철은 1966년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황명 선생님이 , 석주명의 <제주도 수필>얘기를 꺼낸 이후였다. 우리나라에 세계 제일의 나비학자 석주명의 일화를 잠깐 소개한 이후, 그는 1950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민국에서 잊혀진 나비 박사 석주명의 삶을 들여다 보기로 하였고,그의 평전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나비 받사 석주명은 1908년 평양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 사이에 ,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1917년 평양 공립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였 다.이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다녔으며, 1926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였다. 교내'에스페란토 연구회'에 참여하게 되는데, 대만으로 곤충 채집 여행을 떠난 계기를 발판삼아, 함흥 영생 고등학교에 박물교사로 취임하였다. 이후 모교 송도고보의 박물교사가 되었다.
우연과 필연이 석주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일하던 당시 그곳에 외국인이 찾아왔으며, 송도고보 박물관의 놀라움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나비 표본채집에 미쳐 있었고, 조수를 통해,대한민국 전역의 나비 표본을 수집하였다. 75만종의 나비 표본을 통해,일본의 곤충백과의 오류를 고쳐 나갔으며,한국의 고유의 나비 종을 250종으로 제한하였다. 그는 첫 논붐 '조선 구장지방산 접류 목록' 을 써서 <Zephyrus>을 게제하였으며, 10년 동안 학술 논문 100여 편을 써낸바 있다. 대한민국 곳곳에 희귀한 나비가 발견되었다면,당장 쫒아 갔던 그의 모습은 기찻길을 따라서,나비 채집에 열을 올리게 된다. 추운 겨울에도, 난방 시설 하나 의지하여, 나비 채집에 힘썼던 그가 1950년 10월, 누군가 쏜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그는 곤충 연구 뿐만 아니라, 제주도 인구론 을 출판하였고, 조선 에스페란토학회 지도 및 강습회를 열었다.자신이 해왔던 일들 중에 제주도 방언을 수집하였고,그것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그의 사후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에는 그의 이름이 잊혀졌지만, 일본의 곤충학계에서는 나비 박사 석주명을 기억하였으며, '석주명 추도기'를 써서 ,일본 동물 분류학회 회원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