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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역사 - 인도를 지배한 마지막 거대 제국! 황금과 피로 쓴 제국의 역사, 세계를 압도한 찬란한 문명의 절정 ㅣ 더숲히스토리
마이클 피셔 지음, 최하늘 옮김, 이옥순 감수 / 더숲 / 2025년 4월
평점 :

무굴 제국은 18세기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의 침공과 인도 지방 지배자들의 보기로 분열을 거듭한 끝에 결국 확장하던 영국 제국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한때 무굴 제국이 지배한 땅은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달한다. (-5-)
1526~1530 바부르,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하며 인도 북부 침공을 마무리하고 무굴 황제로 재위. (-13-)
바부르 시대에 몽골인(모굴인)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초원 주변에 거주하는 목축 유목민으로 주로 전통적 샤머니즘과 불교 관행을 고수했다. 반면에 마와라알나흐르의 도시 교역과 농경 경제권에 정착한 몽골인(무굴인) 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경향이 있었다. (-42-)
바부르를 비롯한 많은 중앙아시아인은 전통적 이슬람 관행 외에 전조와 점성학, 수비학, 문자학, 수수께끼 같은 꿈의 안내에 따라 종교적 신비와 미래의 사건을 알아내고자 애썼다. (-47-)
1526년 4월에 벌어진 파니파트 전투에서 바부르는 화승총과 대포를 중군에 배치하고, 쇠가죽으로 만든 밧줄로 연결한 수레 700개를 서벽 삼아 화승총을 쏘는 군사와 포병을 보호했다. (-68-)
무굴 시대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이주 공동체 다수는 목축 생활을 교역과 융합했다. 이들은 육류와 유제품을 생산하여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이나 지역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 무굴 제국 군대는 황소 증에 곡물을 얹어 운반하는 대규모 장거리 교역 상단에 의존했다. 무굴 제국 정부는 이런 목축민과 떠돌이 상인을 찾아 세금을 매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89-)
비부르가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린 사건은 야심 찬 경쟁자들에게 실력을 확장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갠지스평원 저지에서는 인도아프간계를 비롯한 여러 지역 지배자가 이 기회를 잡았다. (-94-)
잃어버린 영토와 명성을 되찾기 위해 후마윤은 시르 샤 수르를 향해 재차 진군했으나., 1540년 5월 카나우지에서 더욱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사기가 저하된 무굴 제국군은 본격적으로 싸우기도 전에 흩어졌다.(-124-)
악바르는 바이람 칸이 아버지 역할을 해준 데 감사함을 느끼는 한편, 그를 힌두스탄에서 명예롭게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악바르는 일부 토지 세입을 다시 할당해 주어 메카 순례와 돌아온 후 은퇴 생활을 위한 연금으로 쓰도록 했다. (-153-)
무굴 제국은 공략한 지역들에서 조공과 세금믈 거두기 위한 거대 규모의 군대와 행정부가 필요한 군사재정주의 국가였다. 제국 군대와 정부는 물론 악바르의 가문과 궁정은 그 수입으로 지탱되었다. (-171-)
학자들은 이런 초자연적 설명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어떤 이는 악바르가 간질 환자였다고 생리학 측면에서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악바르가 신앙의 위기, 신비주의적 탐색과 이전의 정토 순니파 신앙을 화해시키기 위한 내적 투쟁읊 겪었고 심리학 측면에서 설명하다. (-223-)
1583년경 악바르는 매일 다섯 차례 기도하는 이슬람의 의무를 그만두고 매일 네 차례 태양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신성한 빛에 대한 신앙을 공공연히 드러냈다고 한다. 악바르의 새로운 의례에는 여러 기원이 있을 수 있다. (-229-)
자항기르 재위기에 조신들은 예절을 다룬 책을 많이 저술했다.이 책들은 출세를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황제에게 다가가 황제를 기쁘게 하는 방법과 거기에서 얻을 이익을 가르쳤으며, 이는 모든 관심사를 능가했다. 실제로 자항기르의 호의는 큰 명예와 권력, 부를 가져다주었다. (-268-)
아그라성에서 줌나강을 따라 내려온 곳을 부지로 택한 샤 자하은 건축가들에게 타지마할을 무굴 제국의 정원 영묘 가운데 가장 독특하게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정원을 중심에 둔 많은 무굴 영묘 모스크와 달리 타지마할 같은 아그라의 통례대로 북쪽 끝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누르 자한이 부모 의 영묘를 위해 고안한 요소들은 5년 뒤 샤 자한의 건축가들에 의해 더욱 거대하고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310-)
전략적 요충지 칸다하르는 무굴 제국과 사파비 제국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1638년 사파비 측 총독 알리 마르단 칸이 무굴 제국에 투항하여 샤 쟈한에게 칸다하르를 안겨 주었다. 샤 자한은 그를 5천/5천 만사브, 병사와 군마를 위한 장비를 주며 환영했다. (-316-)
그 결과 많은 만사브다르가 휘하 군인과 부하들에게 오랫동안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 불충한 행동을 조장했다. 또한 만사브다르들은 자기르에서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뽑아내기에 바빴고. 다음 사람에게 양도하기를 거부했다. 무굴 제국의 중앙 정부가 지방 행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마침내 만사브다르는 자신들의 봉토인 자기르를 세습 왕국으로 만들었다. (-356-)
1947년에 있는 인도로부터의 파키스탄 분할은 무굴 제국의 역사에 대함 다양한 접근 방식을 강화하고 재구성했다. 이대 대규모 폭력 사태가 빚어져 수백만명이 사망하고 , 1천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힌두와 시크 대부분이 파키스탄을, 많은 무슬림이 인도를 떠났다.독립 직후 무굴 제국이 얼마나 무슬림적 또는 인도적이었느냐, 그리고 무굴 제국을 구성했던 모든 사람의 관점을 어떻게 반영하고 회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411-)
대한민국에서, 이도 무굴 제국이 단독으로 언급된 시기는 1998년 전후였다. 그 이전까지 무굴 제국은 인도의 역사의 한 제국사로 편입되었다. 물론 무굴 이라는 명칭은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1526년 무굴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분열된 인도를 하나의 제국으로, 무굴 제국으로 왕권을 바꿨다. 그 과정에서, 무굴제국의 전성기는 1636년 샤 자한이 집권한 다음이었다. 샤 자한은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이 , 1631년 열네 번째 자식을 낳다가 서른 여덟 살에 사망하였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서 , 22년간의 기한이 걸려서 타지마할을 완성했다. 무굴 제국은 초대황제 바부르가 재위하였던 1526년부터, 17대 황제 바하두르 샤가 재위하였던 1857년까지, 360여 년 간의 평화로운 무굴 제국을 키워 나갔으며 영토 확장 뿐만 아니라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그로 인해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확보했으며, 무슬림 제국으로 우뚝섰다.
인도의 무굴 제국의 가치와 문화적 가치는 무굴제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 , 다시 그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인도의 무굴 제국은 전성기 때, 인구 25만의 도시가 100여개 이상 이었으며, 중앙아시아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중앙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하였고, 무굴 제국의 허약한 왕권은 내부의 분열로 인해, 영국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인도가 영국식민지가 되었고, 세계 열강의 전쟁터가 되었던 이유다. 불교와 무슬림, 힌두교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나라 인도는 무굴제국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