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 제물포, 인천 1
복거일 지음 / 무블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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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낙랑을 통해 들어온 제철 기술은 한반도 사회에 근본적 영향을 미쳤다. 청동기에 비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으므로, 철기는 널리 쓰이게 되었고, 한반도 주민들의 삶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쇠보습을 쓰게 되자, 농토를 깊게 갈 수 있어서, 농업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35-)



봉우리 위에 오르자 , 너른 바다가 눈에 들어오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가슴을 펴고서, 그는 그 트인 풍경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바로 앞엔 작은 섬들 네뎃 개가 있었다. 그 너머에 큰 섬이 있었다. 다시 그 너머로 큰 섬 둘이 있었다. 그 섬들보다 조금 남쪽엔 먼 바다로 뻗어 나간 섬들이 들어서 있었다. (-131-)



여기서 물음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다.'왜 고려 조정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했을까?'당시 광대한 제국을 이룬 몽골의 세력은 너무 커서 , 작은 고려가 맞서는 것은 애초에 무모했다.

이 물은에 대하 답은 간명하다.'최무선과 그의 후계자들이 그렇게 비합리적인 정책을 추구한 것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202-)



그러나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정복하려는 야심이 유달리 가렬했다.빈농의 아들인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의 일본에서 신분 상승이 어려웠던 사람이었다. 그런 신분적 약점을 덮고 그의 마음에 늘 무겁게 얹힌 열등감늘 씻어내는 데에는 대륙 정복보다 더 좋은 길은 없었다. (-263-)



로즈는 군함 7척으로 함대를 꾸려 9월 초순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미추홀 앞바다에 나타난 이양선들은 바로 로즈 제독이 이끈 함대였다. 그들은 영종진을 포격하고 점령했다. 당시 조선 수군 진영에 설치된 해안포들은 호이포들이었다. 반면에, 서양 함대에 장착된 화포들은 발전된 대포여서 사거리가 훨씬 길었다. 그래서 조선 수군으로선 서양 함대의 함포 사격에 대응할 길이 없었다. (-318-)



미우라는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과 민비를 증오하는 조선인들을 동원해서 민비 암살을 추진했다. (-433-)



복거일 작가의 비명을 찾아서' 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46년생이었던 복거일 작가는 1987년 발표한 그 소설로 전업작가로 들어섰다. 그의 추천사에는 우리 현시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풍자적 날카로움이 드러난다고 했다.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는 그동안 황해 바다를 주변으로 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고, 미추홀이라는 지명이, 재물포라는 지명이 탄생한 배경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새 소설 『미추홀-제물포-인천 1』은 역사소설이다. 인천이라 부르기 전, 미추홀, 재물포로 불리었다. 북부여, 졸본부여, 소서노의 자식 미류와 온조가 백제와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그리고 미추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소설은 서해안 앞바다를 등지고 있는 경인선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인천의 역사는 놓칠 수 없었다. 부산은 일본의 외침이 잦았다면, 인천 앞바다는 서구의 외침에 놀아났다. 고려의 대몽항쟁은 인천을 건너서,강화도에서 , 이어졌으며, 고려 멸망까지 대몽항쟁은 계속 시행되었다. 고려의 무신들은 몽골제국에 투항할수 없었다. 누군가는 무모하다 할 수 있지만,그 당시로 볼 때, 고려를 지키기 위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우리는 그 역사를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책 『미추홀-제물포-인천 1』 은 2700만 년전 황해의 탄생부터, 1895년 민비 시해 사건으로 부르는 을미사변까지 다루고 있다. 우리 5,000년의 역사에서, 100년 남짓의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를 다루고 있으며,외침이 잦았던 한반도의 역사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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