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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경성 - 식민지 경성은 얼마나 음악적이었나
조윤영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910년 약 20만 명이었던 경성의 인구는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급격히 증가하여 1930년대 초반이 되면 두 배인 40만 명으로 늘어난다. 신분제가 탈피되면서 '배우면 성공할 수 있다' 라는 인식이 대두되어 교육의 힘이 무서운 기세로 전파되었다. (-17-)
경성에서도 서양악기와 악보, 레코드가 유행에 민감한 모던인들의 취향에 맞춰 공급되었고, 서양악기 뿐 아니라 일본악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악기점과 일본악기를 가르치는 교습소까지 등장하여 재조일본인들은 음악적으로 내지와 동일하게 일본화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45-)
1920년대는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식민정책 아래 민간신문사가 등장하였다. 언론의 제약이 많은 식민지 환경에서 신문사는 객관적인 보도를 요구하기 어려웠다. (-115-)
이처럼 음악회장은 대중의 집합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대중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검은 옥의 일본인 경찰이 항상 칼을 지니고 강경한 자세로 대중을 바라보는 분위기는 암묵적이나마 식민자로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조선인을 피식민자로 낙인시키게 하였다. (-167-)
1910년 일제강점기는 조선으 수도 한성이 대한제국 황성으로,황성이 경성으로 바뀌던 시기다. 수도의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 체계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인식이 바뀔 수 있고, 문화나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가장 큰 변화는 조선의 양반과 상민의 법도에 변화였으며, 신분제가 사라지게 되면서, 누구나 배워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은 큰 사회적 변혁이라 말할 수 있다.
책 『음악적 경성』은 1920~1930년대 우리의 삶의 변화를 엮어 나갔다.음아과 미술에 대해서,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서울 경성에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일찌기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자신의 문화를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1세기 전만하여도, 조선을 배워야 한다는 일본인이 이제, 조선이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음악하면 홍난파다. 재조 일본인이 경성에 살기 시작한다. 수탈의 목적도 있지만, 조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누리기 위해서다.자신의 입맛에 맞는 문화시설을 만들었고,향유하기 시작했다. 경성의 인구가 10년 사이에 두배로 늘어났으며, 연관 시설 뿐만 아니라 집이 늘어나게 되었다.교통수단의 발다로 인해 , 과거보다 더 편리해졌고,장거리 이동에 어려움이 없었다
신식건물 뿐만 아니라 적산가옥이 추가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본과 조선,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두 나라의 국민이 서로 공생하게 된다. 우리에겐 망언이라 하지만,일본인에겐 조선의 근대화의 초석을 다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