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제주역사 - 4.3길찾기 6
박찬식 지음 / 각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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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후반부터 제주청년연합회의 중심 인물들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제주도 야체이카를 구성하여 갔다. 제주청년연합회의 실질적 주도자인 송종헌은 1927년 7월에 광주에 가서 전남도당의 책임자인 강석봉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고 정식 입당하였다. 이어서 그는 1927년 7월 25, 6일 광주의 광양여관에서 개최되었던 전남도당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전국대회 출석 대의원으로 서태석을 뽑고 후보로 송종현을 선정하였다. (-53-)

제주도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은 이 시기에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여(1931년 5월 16일), 곧바로 위의 테제에 대한 비판회를 가졌다. 당시 야체이카의 구성원은 대체로 제주청년동매의 간부들로서,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신인회와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칸의 구성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에 기반을 둔 운동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일람표를 통해서도 재건 야체이카사건에 관련된 자들 가운데 사건 이전 도일 경력이 있는 자는 김태안(79, 김태륜(48)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32-)

한편 1948년 1월 22일 조천면 신촌리에서 열린 제주도당 지도부와 비밀회의가 경찰에 적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1월 중순 신촌리 출신 남로당 조직부 연락과장 김생민을 체포한 뒤 그로부터 주요 정보를 확인한 뒤 남로당 조직부 아지트가 있던 신촌리를 급습하였다. 당시 조직부장은 김달삼인데, 1948년 초에 아지트를 신촌리 민가에 두고 있었다. 미국 정보보고서에는 모임에 참석했던 남로당 간부를 비롯한 221명이 검거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238-)

1949년 목포 형무소 탈옥사건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4.3사건, 여순사건,숙군으로 이어지는 이승만 정권의 폭력적 반공국가 수립 과정에서 빚어진 연속적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1년 뒤 같은 처소에 대한 일괄 '숙청'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의 결과는 아니라고 본다. (-367-)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에는 4.3 사건이 아직도 종료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제주도는 전쟁 이전부터 극단적인 공포와 굶주림, 격분, 좌절, 체념 등의 집단적 일상성과 정서가 사회의 인간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은 아니었지만 , 주민들은 4.3의 '내전'에 이어서 연속된 전쟁을 겪었다. 예비검속과 형무소 재소자 학살(죽음의 일상화), 잔여 유격대 토벌과 방위 조직 동원(내전의 연속과 동워늬 일상화), 피난민의 입도에 따른 식량난의 가중(배고품의 일상화),피난민(외래밍)과의 갈등(갈등의 일상화),레드콤플렉스 극복을 위한 참전 등 작은 전댕을 섬 내부에서 벌이고 있었다. (-430-)

4.3 특별법의 규정에 따라 4.3 위원회는 2003년 10월 15일 4.3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를 확정했다.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조사보고서에 근거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실을 정부가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 을"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도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였다. (-516-)

1946년 12월 자유신문은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는 것에 관해 보수진영에서는 당국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도민의 태반은 人委(인위) 를 위시하여 도로 승격한 것을 아직도 반대하고 있다"라고 전하며,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첫째로 본토와 고립됨으로써 식량 등 물자교류가 힘들 것, 둘째 모든 행정구역의 개편은 미군정이 아닌 민족의 뜻에 의해 수립될 우리 정부에 맡기고 싶어하는 것, 셋째 도 승격 이후 기구가 확대되어 세금이 늘고 2백명읻던 경관이 곱으로 느는 것, 넷째 제주도의 군사기지화에 대한 우려 등이었다. (-622-)

제주섬의 문화 정체성의 변화과정을 제주 역사의 정치적 요인, 특히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제주인들은 고대 탐라국의 독립 경험에서 부터 비롯된 자율성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주인의 자립적,자강적 정체성으로 지속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고려와 조선과 같은 중앙정치 체제의 강력한 구심력에 이끌리면서 중앙에 대한 순응과 더불어 반발하는 사례도 빈발하였다. 중앙의 대리자인 지방관의 수탈 속에서도 순응의 정체성은 '조냥'과 '수눌음'으로 표출되었고, 반발의 정체성은 민란으로 표출되는 저항정신, 저항을 초월한 別國(별국)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731-)

2003년 노부현 정권 당시, 4.3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2만 ~3만에 달하는 제주도민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과거사 정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 6명이 경찰에 의해 죽어 나갔으며, 제주도가 공산당(남로당 제주도당 세력) ,국가 전복을 원하는 북한사회주의 세력이 제주도 땅에서, 한라산 인근을 둘러싸며, 경찰과 관군에 대항햇다. 우리는 1948년 4.3 에 대해서, 4.3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4.3 사건은 폭동, 반란, 항쟁, 봉기, 양민학살로 다르게 불리고 있으며,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난 이후 4.3 사건 으로 통일 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1978년에 발표한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이 널리 알려진 이후의 변화였다. 여기에 최근 작품 으로 세권으로 된 『제주도 우다』나 나왔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다시는 4.3 사건의 비극이 재현되면 안 된다느 경종을 울리고 있다.제주도 4.3 사건은 공식적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였으며, 6.25 전쟁 기간에도 이어졌다.

30만 인구 제주도 도민이 제주도에 삶의 터전을 만들고 있었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섰으며, 1948년 4월 3일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져 제헌국회가 구성되기 직전이었다.이승만 정권이 남한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였던 북한과 김일성 정권은 제주도 땅에 제주도 사회주의 계열의 남로당 제주도당 세력 운동가들을 투입하였으며,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책에는 1920~1932 년 사이에 , 제주도 사회운동 주도 세력이 표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조천만세시위운동(1919) , 제주노동회(1923), 제주청년회(1924), 신인회(1925),함덕 협성청년회 노동야학(1925), 제주청년연합회(1926), 제주소년연맹(1926), 조선공산당야체이카(1927), 한수풀소년단(1927), 천황모독 기사투고사건(1928), 화북청년회 학생처벌 항의사건(1929), 제주 무정부주의결사<우리계> (1929), 조천 노동 야학 사건(1930) ,성산포 격문사건(1930),신창독서회 주도(1930), 혁우동맹(1930) 재건 야체이카(1931), 연평리 비밀결사<적> (1931), 제주 청년동맹원 사건 (1931), 종달리 농민회 (1931)화북청년동맹원 혁명가 제창사건(1931), 함덕 비석사건1931),구좌해녀 투쟁(1932), 강창보 탈출 방조사건 (1932) ,조천연설사건(1932), 제주도 적색농조 창립준비위원회(1933),함덕리 독서회(1934), 신좌소비조합 상무이사(1938), 조천소비조합사검(1939) 등이 있었으며, 1945년까지 사회운동이 이어졌으며, 제주도 4.,3 사건이 발생할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인해 제주도로 피난온 3만 인구가 제주도 땅에 살게 되면서, 극심한 공포와 혼란은 가중된다.

이 책을 읽으면 , 북한 사회주의가 제주도에 물들어가는 과정 속에서,제주도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 다시 우리가 보여주었던 역사적 사실이 정리되어 있으며, 대만에 2.28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통치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저자는 4.3 사건을 6.25 전쟁의 축도(縮圖) 로 보고 있으며, ,10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또한 ,4.3 사건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즉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 아닌 , 대한민국에서,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해준 것과 동시에, 70 년 내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야만 , 국가 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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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남자들 - 남편의 외도 방지하기에 필요한 결혼 준비 가이드
고미성 지음 / 좋은땅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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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 7~8) 라고 말씀에 약속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사회적인 풍토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변하지만,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남자의 바람기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13-)

"놀랍게도 다수의 가정폭력 사건이 '아내의 성관계 거절'에서 비롯된다는 보고가 있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중년 부부도 그랬다. 아내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 반면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 급기야 남편은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할 때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세상에 섹스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 있을까 싶지만 이는 분명 실화다." (-68-)

"남자들은 여자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결혼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그들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실망합니다." (-134-)

현대 여성에게 일은 자신의 삶에 고기처럼 여기고 남편은 샐러드 정도로 취급합니다."

특히 현대 직장 여성들에게 성공에 대한 유혹과 자신의 능력, 기술, 지식과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면, 이 부분까지 해야 하는 돕는 배필의 사역이 어렵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독립심이 강하고 사회적 성취감에 대한 야망이 큰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약점 때문에 자신의 삶에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닌가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202-)

"내가 내 눈과 서약했으니 어찌 처녀를 정욕의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내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의롭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재앙을 내려 벌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욥기 31: 1~3) (-248-)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가지 정욕과 향락에 종 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여 하심이라." (-308-)

불륜이라는 죄앙에 바지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남자들은 외도에 취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거듭난 남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크리스찬 아내들도 남편이 외도를 하면 어떡하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남자들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주의 큰 은헤를 입었던 신실한 다윗 왕도 간음을 했으니 아내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358-)

지혜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빠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적 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로 구분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란 무엇일가요? 신명기 4장 5~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 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아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423-)

작가 고미성은 경건한 결혼과 가정 사역으로 하나님의 제자이자,.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왔으며, 성경 공부로 얻은 지식과 지혜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하고 있으며,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분노, 미움, 성남, 원망, 두려움, 불안감, 우울함, 부신) 을 긍정적인 생각( 양심, 지식, 지혜, 이해, 연민, 은혜,자비, 겸손, 통찰력)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경혼은 기대와 설레임, 행복을 위해서, 부부가 함께 하고, 영적인 관계,육체적인 관계, 정신적인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 부부사이의 결혼과 욕체적 관계와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지헤가 필요하다. 필자는 『위험한 남자들』 에서, 결혼 이후 발생하는 불평, 불만, 비판이 부부갈등으로 이어지며, 서로간의 가치관의 차이, 성의 차이로 인해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서로 상처를 주고, 자울질하며,잣대를 들이대는 행동은 필연적으로 아내는 난편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부부관계의 회복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 자제력(Self-Control)과 의지력(Will-Power) 이며, 위로와 격려, 칭찬과 존중,배려로 사탄을 무찌른다면 긍정적 영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남편의 외도와 불륜의 시작은 ,바뀌지 않으려는 남편과 바뀌려 하는 아내의 심리적 욕구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르시시즘, 우상화, 가스라이팅과 같은 문제가 나타나며, 영적인 사랑과 육체적 사랑에 대한 결핍은 필연적으로 부부갈등을 넘어서서, 자신의 육구를 해소하기 위해, 남편의 외도로 이어지고 있다. 건강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부부간에 사랑과 존중 배려가 우선 되어야 하며, 겸손과 온유, 사랑과 참음으로서, 서로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면서, 남성은 상대적으로사회적 열등감을 가지며 살아간다. 아내의 역할와 남편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 나가는 영적인 지혜, 영적인 삶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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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술을 줄이겠습니다! - 마셔볼 만큼 마셔본 자를 위한 기적의 금주·절주 비법
구라모치 조 지음, 최화연 옮김 / 보누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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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에 쉽게 의존하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면,의외로 평소'성실하고 우수한 사람'이 많습니다.

타인을 과하게 배려한다.

꼼꼼하고 완벽주의 성향이다.

정의감이 강하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한다.

집중력이 높다.

온전한 가정을 꾸리며 산다.

성실하게 일한다.

일정 기간 금주를 할 수 있다.

금주하는 동안 음주 욕구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알코올에 쉽게 의존하는 사람은 남에게 불만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혼자 스트레스를 쌓아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술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26-)

사망 원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간 기능 장애 등 신체 질환

급성 심부전 등 돌연사

만취 중 불의의 사고

이 밖에 자살 빈도가 높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37-)

많은 사람이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에 술을 처음 접합니다. 술은 '뭐든지 할 수 있다.' 는 만능감, '모든 사람과 마음을 열고 친해질 수 있다'는 일체감 등을 불러옵니다. (-51-)

알코올이 분해될 때 만들어지는 아세트알데히드는 몸에 해로운 물질입니다. 아세트알데히드는 혈관을 확장시키는 히스타민의 분비르 촉진시키는데, 히스타민은 피부를 붉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또한 아세트알데히드가 혈류를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면 체내 곳곳에 염증을 일으킵니다. 피부에 염증이 생기면 가렵고 피부결이 거칠어집니다. (-71-)

술을 마시면 뇌에서 베타 엔돌핀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증가합니다. 베타엔돌핀은 뮤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결합하여 쾌감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주할 때 쾌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균형을 유지하려는 뇌의 성질에 따라 음주 후에는 다이놀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량이 증가합니다. 다이놀린의 카파 오피오이드 수용체에 결합하여 도파민 분비를 억제하면서 음주 후에는 불쾌한 감정이 일어납니다.이렇게 음주는 감정 기복을 만들어냅니다. (-117-)

술에 대해서, 자제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자기 스스로 술을 마시면서,감정 폭주나 행동 폭주가 일어나며,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혹은 해르 끼칠 수 있다. 술이 주는 행복이나 쾌락에 빠지다 보면 과하게 본인의 주량은 생각하지 않고,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순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그것이 자기 스스로 후회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다.

술은 즐겁게 마시느 습관이 필요하다.때로는 술이 약해서,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거이고, 스스로 쓰러지거나 이상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다. 매스꺼움, 구토가 발생하기 때문에, 술을 절주 혹은 금주가 필요하다.이 책에는 술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으며,인간의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맞췃허, 술을 받아들이지 않도록,술에 대한 절제가 가능한 상태로 바꿀 수 있다.

내 주변에 알코올 의존증에 거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수 있다. 군대에서 폭에 시달리는 군인이 술에 빠져서, 평생 군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농사일에 바빠서, 몸이 힘든 상황에서, 술을 마시다가 알콜 의존증에 깊이 빠질 수 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대체적으로 완벽한 사회생활과 성실한 사람들이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밖에서 스트레스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는 이들이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사회생활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가정에서 술로 인해 큰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데, 폭력이나, 무절제한 행동 혹은 암이나 종양과 같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추운 겨울, 밖에서 회식 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그것이 돌연사로 이어지거나, 몸을 가누지 못해서, 논두렁에 빠져서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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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 문명사 - 유럽 이전의 바닷길
주강현 지음 / 바다위의정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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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크는 '도시'의 대명사다.우루크는 세계 최초의 도시였고, 100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심으로 군림했다. 인류 문명사 여명기에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시'였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만들어낸 도시는 우루크 이외에도 유프라테스강과 티크라테스강이 페르시아만을 흘러드는 하구에 위치한 우르 Ur, 우르 근처에 있던 수메르 도시 에리두 Eridu, 유프라테스강 재방 위의 수메르 도시 슈루파크 Shuruppak,북부의 고대도시 아카드 Akkad, 현재의 바그다드 남동부에 위치한 니푸르 Nippur,고대 바빌로니아 도시 시파르 Sippar,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가우데 하나인 아슈르 Ashur, 아시리아의 수도로 티크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니네베 Nineveh,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비빌론 Babylon 등이 있었다. (-25-)

고대 세계에서 로마의 새로운 힘이 구체화된 것은 결국 바다에서였다. 제1,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해군이 당대에 가장 힘 있는 세력으로 등극했음을 보여준다. 시칠리아는 속주가 생겼고, 이탈리아 이외 지역을 로마가 정복한다고 선포한 계기가 됐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마침내 카르타고를 멸망시킴으로써 카르타고를 아프리카-로마의 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코린토스 역시 멸망했다. 700년에 걸친 번영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의 모든 영토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 '아프리카'로 불리게 됐다. 이로서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바닷길은 로마로 인계됐다. (-62-)

예멘 서남부에 위치한 아덴은 홍해와 인도양의 관문이었다. 아덴에는 아주 좋은 항구가 있어서 인도, 에티오피아, 이란에서 온 배와 메카의 지디 항구로 향하는 배가 모여들었다. 카이로와 지다에서 들어온 구리와 산호 그리고 지중해에서 들어온 모직물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거래됐다. 금과 향신료, 면직물, 식량은 지중해로 운반됐고, 지다의 물건은 작은 배에 실려 수에즈와 다른 항구로 옮겨졌다가 카라반에 의해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 등지로 가서 베네치아 상인에게 팔렸다 (-136-)

시라즈는 고색창연한 건물에 땅도 넓고 명망과 위용을 두루 갖춘 고도다.화려한 화원, 넘실거리는 하천, 번화한 시장, 고급스러운 거리 등 모든 것이 시리즈에 있다. 그 많은 건물이 빈틈없이 세워져 있고 구획 정리 또한 놀라울 정도다. 직종에 따라 전문시장이 있어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순한 용모에 정갈한 옷을 입고 있다. 동방에서 시장이나 화원, 강 그리고 주민이 용모 등에서 다마스쿠스와 비견되는 곳은 오로지 시라즈 뿐이었다. 평원에 자리한 이곳은 사위四圍가 화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내를 관류하는 하천 만도 다섯 개나 된다. (-213-)

인도양은 전 세계 바다 표면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 인도양 주변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한다. 따라서 인도 문명권 아프리카 문명권, 동남아 문명권, 이슬람 문명권 그리고 중국 문명권이 제한적으로 개입해 온 공간이다. 아프리카,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의 다양한 종족과 언어권이 인도양이라는 하나의 '열린 호수'에서 소통하는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278-)

불교를 받아들인 몰디브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대략 12세기로 추정한다.아랍인이 당도하면서 이슬람은 급격히 확산됐다. 이븐바투타가 왔을 때 이미 이곳 주민은 청렴하고 알라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며 진실성을 지닌 이들이었고,식생활도 율법대로 하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목조 전물이고, 섬마다 좋은 사원이 하나씩 있었다. 물고기와 야자나무가 그들의 중요한 식량원이었고, 야자열매로 즙과 식용유, 당밀을 만들어 먹었다. (-355-)

기원전 시기에도 인도 선원은 몬순과 해류를 잘 활용했다. 그들은 인도양 남쪽으로 바다를 바로 가로질러 인도네시아 섬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오디샤의 칠리카 호수에서 세 노선이 선택됐을 것이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끄라지협을 통해 말레이반도를 관통하는 노선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에 개발된 믈라카 해협을 통한 노선이었다. 나머지는 수마트라 남쪽을 돌아서 순다 해협으로 접어드는 노선이었다. (-433-)

정화는 무슬림으로서 페르시아어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식민지 시대 건물을 이용한 해양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금화 1000개와 은화 5000개, 다양한 색의 자수 비단 50롤,다양한 색의 비단 태피터 taffeta 50롤, 금색 자수와 여러가지 색 비단으로 만든 보석 기치 네 쌍,빨간색의 같은 것 두 쌍, 노란색의 같은 것 한 쌍, 검은색 한 쌍, 다섯 개의 골동품 황동 향로,옻칠에 금장한 골동품 황동 꽃병 다섯 쌍과 금 스탠드,옻칠에 금으로 채색한 다섯 개의 노란색 황동 램프와 금 스탠드, 주홍색 향 그릇 다섯개, 금 옻칠 , 금 받침대, 여섯 쌍의 황금 연꽃, 향유 2500통, 왁스 양초 열 쌍, 향기로운 향 열개.

각각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내역이다. (-503-)

동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중국의 비단 공급원으로 통하는 직접 해로를 찾던 상인이 해양실크로드 지협 노선을 개척했다. 비단 공급를 찾던 인도상인은 적어도 기원 전후에 동남아시아 바다를 통해 중국으로의 긴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같은 시기, 동남아시아에서는 유례없던 규모와 명성을 뽐낸 국가인 푸난이 성립됐다. 현재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을 이루는 메콩강 하구 주변에 위치한 푸난에 선원들이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다양한 특산품을 사고 팔았다. 푸난의 역사적 부상은 당시 무역의 '큰손'인 인도와 중국 중심의 국제무역에서 중간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563-)

성명왕은 백제 성왕이다. 백제와 푸난과 일본의 관계가 엿보인다. 푸난의 물자와 인간을 백제가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알수 없다. 6세기 중엽 이미 백제와 푸난이 교섭했고, 그 결과 일본에도 푸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백제와 푸난이 직접 교섭했는지,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를 매개로 했는지는 밝혀야 할 과제다.

푸난은 초기부터 오나라와 국교를 맺고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를 했다. (-636-)

스리위자야와 중앙 자바가 나란히 발전하는 동안 동부 자바는 상대적으로 변경이었다. 동부 자바의 항구는 믈라카 해협에서 남쪽으로 1290킬로미터나 떨어져 먼 거리였고, 외국 상인에게도 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말레이 해양세계의 가장 강력한 지역으로 부상해 11세기에 이르면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11~15세기 해양교역의 다이내믹한 중심지가 브란타스강 삼각주에 들어선다. 320킬로미터에 달하는 동부자바에서 가장 긴 브란타스강 유역이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707-)

육두구는 한반도에서 어김없이 사육해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監)》에 뚜렷하게 그 족적을 남겼다. "육두구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매운데 쓰고 독이 없다. 소화기를 조화롭게 해주고 기를 내려보내며 설사와 이질을 멎게 해준다." 라고 했다. 약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적도의 바다에 펼쳐진 향료루트가 한반도까지 이어진 결과다. 탐식하듯 향을 찾아 나선 인류는 향료를 중심으로 글로벌적 자본 운동을 추동하며 세계 무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해양실크로드의 족적이 짙게 적도의 바다에 드리웟고, 유럽까지 이어지던 수탈의 길은 오늘날까지 포트 로테르담과 그 성체에 잘 남아 있다. (-750-)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의 관점에서는 무역이 중요하며, 특히 무역품이 중요하다. 짬파의 산지에서 산출되는 수풀품 중에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이 침향 沈香이었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루 Agaru 는 모두 동남아시아 원산의 침향속 수목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 중국인은 최고 품질의 것을 특별히 침향이라고 했다.'침'이라는 말은 물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붙었다. 나무를 잘라서 몇 년이고 쌓아두면 썩어서 마디만 남으며, 이를 물에 담그기 때문에 침향이라고 했다. 《본초강목》 에서는 물에 뜨는 향을 전향 煎香이라고 해서 구별했으며 의료 효능이 없는 싸구려라고 했다. 《양서》 에 이르길, 임읍에서 침목향이 난다고 했다. (-814-)

한 무제가 즉위하고서 기원전 111년, 한은 번국에서 이탈하여 독자 행보를 걷는 남월국을 강하게 응징한다. 많은 병사와 전함이 동원됐다. 원정대를 보낼 정도로 한의 해양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원정군은 선루 船樓 가 있는 화남 華南의 함대였으며, 함대 지휘관을 제독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미 조종술을 탁월하게 다루는 해군 병법과 지휘체계가 갖춰졌음을 알수 있다. 《후한서》 에 따르면 , 마원 馬援이 2000척의 누선을 포함한 함대를 거느리고 교지 交趾,베트남 북부 하노이 로 원정을 갔다. 당시에 누선은 대형 전선을 뜻했다.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 남중국해 원정을 감행할 정도로 한의 해양력은 수준이 높았다. (-857-)

사산인은 비잔틴제국과 인도양 해상무역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하여 아라비아해와 페르시만에 다양한 항구를 경영했다. 예를 들면 오만 무스카트 같은 곳이다. 오만해의 패르시만 어귀에 있는 소하르 Sohar 등에 사산조 요새를 세워 통제했다. 사산-이슬람 제품이 대규모로 생산되어 시라프에서 수출됐다.이슬람의 부상으로 페르시아의 정치 권력은 아바스 칼리프에게 넘어갔지만, 페르시아만 연안 항구의 경제구조에 대한 영향은 미미했다. (-926-)

몽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 많은 땅을 찾아서 이동을 계속하는 유목민 특유의 열망이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자면 대륙만 가지고는 불가능했으며,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몽골의 남송 재패에서 수전 水戰이 특별히 두드러졌다. 송을 진압하기 위해 강이나 해안에서 전투가 필요했다. 세계를 모두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남송을 전복한 다음, 몽골은 숙련된 선장과 승무원을 보유한 남송 함대를 앞세워 해외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남송을 수중에 넣고 나니 습윤한 아시아의 열대해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능동적이고 해양지향적 세계관을 가진 원의 시조 쿠빌라이에게는 당연했다. 몽골제국을 하나의 큰 순환체게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초원로 이외에 유라시아를 꿰뚫는 해상교통 거점과 해로 확보가 선결과제였다. (-1006-)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부터 남중국해에서는 이미 세계경제가 활성화됐다,. 뒤늦게 이곳에 합류한 유럽인은 남중국해 권역무역에 슬쩍 편승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마침내 1557년 마카오의 작은 반도에 정착했다. 스페인 사람은 태평양을 건너와서 1570년에 마닐라에서 최적의 항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중국인 300명이 넘는 무역공동체와 이슬람 족장의 작은 궁궐을 폐위시킨 일도 있다. 1590년대에 유럽의 세 번째 주자 네덜란드가 자카르타에 본거지 바타비아를 세우고, 남중국해에 당도하면서 남중국해 경제권에 참여했다. (-1082-)

이처럼 동아시아 바다에서는 몽, 고려, 일본 사이에 거친 풍랑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1274년 10월 3일 여원연합국이 합포 合浦에서 출진했다. 10월 5~29일 쓰시마 서안으로 선단 450척에 3만 여 명이 들어왔다. 1280년 여원연합군이 합포에서 다시 출진해 병사 370만 명, 병선 7만 척으로 쳐들어오자 규슈 사람이 모두 도망쳤다. 1281년 몽골과 고려 병사가 7만 3000척의 큰 배를 타고 왔다. 그들은 거주하기 위해 각종 살림도구와 경작을 위한 호미와 가래 등도 가지고 왔다. 고려선 500척이 이키, 쓰시마로부터 오면서 보이는 자를 전부 죽이니 인민들이 감당을 못해 처자를 데리고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몽골 병사가 하카타로 몰려왔다. 그러나 그해 7월 30일 태풍이 불어 적선이 거의 푬몰하고 죽은 자가 수천 , 수만 명에 이르렀다. (-1141-)

1467년에는 조선왕이 류큐 왕에게 국서를 보낸다. 류큐에서 앵무새와 공작새 등 각종 선물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며 이에 대한 사례로서 국서와 선물을 보냈다. 류큐 왕은 조선 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조선에서 보낸 물품이 화재로 인해 류큐에 전당되지 못함을 알리고,사례로서 국서와 선물를 보낸다. 선물 중에 목향, 육두구, 정향, 소목, 후추,앵무새 등 남방 특산이 눈에 띈다. 해양실크로드의 박래품이 조선에 당도한 것이다. (-1210-)

도자기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의 도자 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특히 임진왜란으로 많은 조선의 도공이 규슈로 끌려가 일본 땅에서 가히 '도자 혁명'을 일으킨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아리타 등의 도자기 수출과는 차원이 다른 '도자의 길'이 완성된다. 유럽으로 건너간 도자 기술은 독일의 마이센 자기처럼 독창적으로 개발되기에 이른다. 일직부터 중국긔 차가 유럽으로 수출됐는데, 특히 명청 시기를지나면서 스웨덴 같은 북유럽까지 차가 수출되면서 '차의 길'이 완성된다. 영국의 스리랑카 플랜테이션으로 '홍차의 길'이 런던과 콜롬보 사이에 놓이게 된다. (-1250-)

일산 정발학연 鼎鉢學硏)과 제주도 애월바다르 오가면서, 역사민속학 인류학, 역사학을 아우르며, 해양사, 선박사, 교역사, 해양생테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해양 문명에 대한 융복합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필자 주강현의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는 1300 페이지에 달하며, 상당한 양의 해양 문명을 통섭하고 있었다.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을 읽게 되면, 그가 쓴 전작을 확인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도 방대하지만, 필자의 전작도 만만치 않다.그의 전작은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을 쓰기 위한 워밍업에 부과하다.책『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은 『관해기1,2,3』, 『제주기행』,『조기 평전』,『등대의 세계사』,『독도강치 멸종사』,『환동해 문명사』,『조선 사람 표류기』,『적도의 침묵』,『등대』,『 등대여행』를 아우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의 방대한 지적 수준을 간파하였으며 , 상대적으로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을 소화하기 위한 해양문명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독서츷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후회의 순간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10만년 인류의 역사는 선사시대와 고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전쟁의 역사이며, 정복의 역사를 포함한다. 대체적으로 「해양실크로드 문명」의 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육상실크로드 문명」을 주로 초증고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며, 우리가 역사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육지는 바다와 달리 국경이 있고,그 국경을 넘어올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대비가 항상 존재한다. 통상적으로 이민이란, 육지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지,바다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건 아니다.

육지 문명은 정복을 위한 문명을 운선하며, 바다 문명은 교류, 무역을 위한 문명을 우선한다. 지금처럼 철도, 비행기, 자동차가 없었던 16세기 이전에 바다를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누릴 수 있으며, 유럽서구 열강이 인도양윽 거쳐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와 향료, 도자기를 얻기 위한 긴 바닷길 여정을 거쳤으며,거대한 배 건조기술,항해술이 발달하게 된 이유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의 지리학은 해양실크로드의 문을 열게 된 첫 발자국이다.

그들은 해양을 정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바다의 이치를 알기 위해 애르 쓰게 된다. 아라비아 상인, 비잔틴 상인, 페르시아, 유대인, 곤륜, 송나라 상인, 남인도 상인까지, 천문과 역법을 활용한 항해기술이 발달하였고, 별이나 암초, 돌을 이용하여, 남들이 따라하지 못하는 항해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해상왕국 신라의 상인들, 고려의 개성상인들이 한반도를 서역에 알리게 된 이유, 백제와 푸난, 일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일보에 편입되어 버린 사라진 왕국 류큐국까지 그들이 추구하였던 해양 문명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해얌 실크로드 문명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역사, 명나라 환관 출신 정화 제국이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명에 의해 7차에 걸친 정화 대원정이다.18만 km의 바닷길을 개척하였고, 그 배에 승선한 중국인도 2만여 명에 달한다. 1405년에 떠나, 1433년까지 4차에 걸친 정화대원정은 중국의 해상무역에 대해서, 항해술과 배건조술이 서구를 뛰어넘었다는 증거였으며, 콜롬비아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온 기록이 현존하고 있으며, 점점 사라지는 해양 실크로드 문명을 주도했던 이들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책에는 어떤 것을 교역하였는지에 따라서, 비단길, 향료길, 도자길,인삼 길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고려가 주로 인삼과 도자기, 무역을 주로 하였으며, 백제의 도공이 일본을 거쳐 해외로 배를 타면서까지 그들의 기술이 해양실크로드 길을 따라 전파된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바닷길은 지리를 모르면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6세기~11세기 활약했던 노르만족이 이끄는 바이킹Viking이 극한 환경 바다에서 추위와 음식, 질병을 이겨내며 생존하는 법을 찾았던 것처럼, 포르투갈, 스페인이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자신의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해양, 깊은 심연의 먼바다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중국해,동남아시아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은 동아시아로 거쳐가는 주요 해양거점이었고,배들이 무역 통로로 이욛되고 있었다.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는 게 시급하였고, 좋은 항구를 가진 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 적 보았던 『신밧드의 모험 』 도 페르시아 상인에 영감을 얻은 대중적인 문화로 발전한 것이며, 현존하는 천일야화를 즐겨 읽었다.

교역과 무역으로 , 물건만 교류가 괸 것이 아니었다. 정치, 문화, 종교도 바닷길을 따라 교류가 되었으며,그들만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고대 인도 · 아리아 어 계통 산스크리트어가 해양 실크로드의 중요한 언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말레이 상인과 말레이 반도가 추구하였던 경제적 이득과 그들이 상인으로서 보여주었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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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기를 부탁해! - 미래의 내가 보낸 일기장
김희정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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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격은 누가 강제로 시키면 안하는 스타일이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일기쓰기 숙제를 할 때, 한 했던 기억이 있다. 즉 숙제조차도 시키지 않아서 안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하지만 일기쓰기의 장점을 알고 난 이후, 일기를 조금씩 쓰는 습관을 만들고 있다. 일기장 이나 다이어리 대신 페이스북에 올리는 방법을 쓰고 있으며,공개 일기와 비공개 닐기를 병행한다. 대체적으로 감사 일기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 놓치고 있었던 것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있으며, 나중에 다시 되세김하거나, 회상할 수 있도록 나만의 일기쓰기 패턴을 만들고 있다.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게 되면,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게 되고, 해마다 같은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있다.특히 작년 이맘 때 상당히 추웠고, 눈이 많이 왔다. 하지만 올해는 포근한 날씨가 반복되고, 봄이 찾아온느 기분이 들 정도다.,시간을 비교하고, 장소르 비교하고, 날씨르 비교하게 된다. 글쓰기 능력, 생각의 깊이는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다. 어릴 때 모랐던 일기쓰기의 장점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책 『일기 쓰기를 부탁해!』은 일기 쓰기의 방법과 목적이 나온다. 일기는 하루하루 겪은 일들이나 감정,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대체로 날짜, 날씨, 하루의 주제를 맨 앞에 쓰는 경우가 많다.일기의 대표적인 경우가 『안네의 일기』 와 『난중일기』가 있다. 개인의 일기가 그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역사적 사료로 가치가 있다는 걸,일기의 효용가치를 알수 있다.일기 쓰기에는 일상적인 기옥 뿐만 아니라, 나의 작문, 글쓰기르 일기에 남길 수 있다. 습작, 시, 소설, 에세이를 일기에 채워 나가거나,그림, 동영상도 추가할 수 있다.

일기는 기록이 목적이다. 맞춤법에 맞춰서 쓰고, 생각이나 느낌 표현하기 뿐만 아니라,동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스처 지나가는 일상을 기록하지 않면,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하기 힘들다. 일기는 과거와 나를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현재의 나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다. 즉, 하루의 일상과 겪은 일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하루 나의 실수나 잘잘못을 느낌과 감정을 살려서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기 쓰기의 가장 큰 목적은 여기에 있으며, 나의 개인적인 일기가 앞으로 나마의 소소한 역사가 될 수 있고, 어린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나,미래의 나를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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