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실크로드 문명사 - 유럽 이전의 바닷길
주강현 지음 / 바다위의정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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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크는 '도시'의 대명사다.우루크는 세계 최초의 도시였고, 100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심으로 군림했다. 인류 문명사 여명기에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시'였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만들어낸 도시는 우루크 이외에도 유프라테스강과 티크라테스강이 페르시아만을 흘러드는 하구에 위치한 우르 Ur, 우르 근처에 있던 수메르 도시 에리두 Eridu, 유프라테스강 재방 위의 수메르 도시 슈루파크 Shuruppak,북부의 고대도시 아카드 Akkad, 현재의 바그다드 남동부에 위치한 니푸르 Nippur,고대 바빌로니아 도시 시파르 Sippar,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가우데 하나인 아슈르 Ashur, 아시리아의 수도로 티크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니네베 Nineveh,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비빌론 Babylon 등이 있었다. (-25-)

고대 세계에서 로마의 새로운 힘이 구체화된 것은 결국 바다에서였다. 제1,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해군이 당대에 가장 힘 있는 세력으로 등극했음을 보여준다. 시칠리아는 속주가 생겼고, 이탈리아 이외 지역을 로마가 정복한다고 선포한 계기가 됐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마침내 카르타고를 멸망시킴으로써 카르타고를 아프리카-로마의 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코린토스 역시 멸망했다. 700년에 걸친 번영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의 모든 영토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 '아프리카'로 불리게 됐다. 이로서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바닷길은 로마로 인계됐다. (-62-)

예멘 서남부에 위치한 아덴은 홍해와 인도양의 관문이었다. 아덴에는 아주 좋은 항구가 있어서 인도, 에티오피아, 이란에서 온 배와 메카의 지디 항구로 향하는 배가 모여들었다. 카이로와 지다에서 들어온 구리와 산호 그리고 지중해에서 들어온 모직물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거래됐다. 금과 향신료, 면직물, 식량은 지중해로 운반됐고, 지다의 물건은 작은 배에 실려 수에즈와 다른 항구로 옮겨졌다가 카라반에 의해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 등지로 가서 베네치아 상인에게 팔렸다 (-136-)

시라즈는 고색창연한 건물에 땅도 넓고 명망과 위용을 두루 갖춘 고도다.화려한 화원, 넘실거리는 하천, 번화한 시장, 고급스러운 거리 등 모든 것이 시리즈에 있다. 그 많은 건물이 빈틈없이 세워져 있고 구획 정리 또한 놀라울 정도다. 직종에 따라 전문시장이 있어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순한 용모에 정갈한 옷을 입고 있다. 동방에서 시장이나 화원, 강 그리고 주민이 용모 등에서 다마스쿠스와 비견되는 곳은 오로지 시라즈 뿐이었다. 평원에 자리한 이곳은 사위四圍가 화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내를 관류하는 하천 만도 다섯 개나 된다. (-213-)

인도양은 전 세계 바다 표면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 인도양 주변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한다. 따라서 인도 문명권 아프리카 문명권, 동남아 문명권, 이슬람 문명권 그리고 중국 문명권이 제한적으로 개입해 온 공간이다. 아프리카,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의 다양한 종족과 언어권이 인도양이라는 하나의 '열린 호수'에서 소통하는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278-)

불교를 받아들인 몰디브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대략 12세기로 추정한다.아랍인이 당도하면서 이슬람은 급격히 확산됐다. 이븐바투타가 왔을 때 이미 이곳 주민은 청렴하고 알라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며 진실성을 지닌 이들이었고,식생활도 율법대로 하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목조 전물이고, 섬마다 좋은 사원이 하나씩 있었다. 물고기와 야자나무가 그들의 중요한 식량원이었고, 야자열매로 즙과 식용유, 당밀을 만들어 먹었다. (-355-)

기원전 시기에도 인도 선원은 몬순과 해류를 잘 활용했다. 그들은 인도양 남쪽으로 바다를 바로 가로질러 인도네시아 섬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오디샤의 칠리카 호수에서 세 노선이 선택됐을 것이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끄라지협을 통해 말레이반도를 관통하는 노선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에 개발된 믈라카 해협을 통한 노선이었다. 나머지는 수마트라 남쪽을 돌아서 순다 해협으로 접어드는 노선이었다. (-433-)

정화는 무슬림으로서 페르시아어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식민지 시대 건물을 이용한 해양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금화 1000개와 은화 5000개, 다양한 색의 자수 비단 50롤,다양한 색의 비단 태피터 taffeta 50롤, 금색 자수와 여러가지 색 비단으로 만든 보석 기치 네 쌍,빨간색의 같은 것 두 쌍, 노란색의 같은 것 한 쌍, 검은색 한 쌍, 다섯 개의 골동품 황동 향로,옻칠에 금장한 골동품 황동 꽃병 다섯 쌍과 금 스탠드,옻칠에 금으로 채색한 다섯 개의 노란색 황동 램프와 금 스탠드, 주홍색 향 그릇 다섯개, 금 옻칠 , 금 받침대, 여섯 쌍의 황금 연꽃, 향유 2500통, 왁스 양초 열 쌍, 향기로운 향 열개.

각각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내역이다. (-503-)

동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중국의 비단 공급원으로 통하는 직접 해로를 찾던 상인이 해양실크로드 지협 노선을 개척했다. 비단 공급를 찾던 인도상인은 적어도 기원 전후에 동남아시아 바다를 통해 중국으로의 긴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같은 시기, 동남아시아에서는 유례없던 규모와 명성을 뽐낸 국가인 푸난이 성립됐다. 현재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을 이루는 메콩강 하구 주변에 위치한 푸난에 선원들이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다양한 특산품을 사고 팔았다. 푸난의 역사적 부상은 당시 무역의 '큰손'인 인도와 중국 중심의 국제무역에서 중간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563-)

성명왕은 백제 성왕이다. 백제와 푸난과 일본의 관계가 엿보인다. 푸난의 물자와 인간을 백제가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알수 없다. 6세기 중엽 이미 백제와 푸난이 교섭했고, 그 결과 일본에도 푸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백제와 푸난이 직접 교섭했는지,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를 매개로 했는지는 밝혀야 할 과제다.

푸난은 초기부터 오나라와 국교를 맺고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를 했다. (-636-)

스리위자야와 중앙 자바가 나란히 발전하는 동안 동부 자바는 상대적으로 변경이었다. 동부 자바의 항구는 믈라카 해협에서 남쪽으로 1290킬로미터나 떨어져 먼 거리였고, 외국 상인에게도 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말레이 해양세계의 가장 강력한 지역으로 부상해 11세기에 이르면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11~15세기 해양교역의 다이내믹한 중심지가 브란타스강 삼각주에 들어선다. 320킬로미터에 달하는 동부자바에서 가장 긴 브란타스강 유역이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707-)

육두구는 한반도에서 어김없이 사육해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監)》에 뚜렷하게 그 족적을 남겼다. "육두구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매운데 쓰고 독이 없다. 소화기를 조화롭게 해주고 기를 내려보내며 설사와 이질을 멎게 해준다." 라고 했다. 약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적도의 바다에 펼쳐진 향료루트가 한반도까지 이어진 결과다. 탐식하듯 향을 찾아 나선 인류는 향료를 중심으로 글로벌적 자본 운동을 추동하며 세계 무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해양실크로드의 족적이 짙게 적도의 바다에 드리웟고, 유럽까지 이어지던 수탈의 길은 오늘날까지 포트 로테르담과 그 성체에 잘 남아 있다. (-750-)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의 관점에서는 무역이 중요하며, 특히 무역품이 중요하다. 짬파의 산지에서 산출되는 수풀품 중에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이 침향 沈香이었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루 Agaru 는 모두 동남아시아 원산의 침향속 수목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 중국인은 최고 품질의 것을 특별히 침향이라고 했다.'침'이라는 말은 물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붙었다. 나무를 잘라서 몇 년이고 쌓아두면 썩어서 마디만 남으며, 이를 물에 담그기 때문에 침향이라고 했다. 《본초강목》 에서는 물에 뜨는 향을 전향 煎香이라고 해서 구별했으며 의료 효능이 없는 싸구려라고 했다. 《양서》 에 이르길, 임읍에서 침목향이 난다고 했다. (-814-)

한 무제가 즉위하고서 기원전 111년, 한은 번국에서 이탈하여 독자 행보를 걷는 남월국을 강하게 응징한다. 많은 병사와 전함이 동원됐다. 원정대를 보낼 정도로 한의 해양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원정군은 선루 船樓 가 있는 화남 華南의 함대였으며, 함대 지휘관을 제독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미 조종술을 탁월하게 다루는 해군 병법과 지휘체계가 갖춰졌음을 알수 있다. 《후한서》 에 따르면 , 마원 馬援이 2000척의 누선을 포함한 함대를 거느리고 교지 交趾,베트남 북부 하노이 로 원정을 갔다. 당시에 누선은 대형 전선을 뜻했다.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 남중국해 원정을 감행할 정도로 한의 해양력은 수준이 높았다. (-857-)

사산인은 비잔틴제국과 인도양 해상무역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하여 아라비아해와 페르시만에 다양한 항구를 경영했다. 예를 들면 오만 무스카트 같은 곳이다. 오만해의 패르시만 어귀에 있는 소하르 Sohar 등에 사산조 요새를 세워 통제했다. 사산-이슬람 제품이 대규모로 생산되어 시라프에서 수출됐다.이슬람의 부상으로 페르시아의 정치 권력은 아바스 칼리프에게 넘어갔지만, 페르시아만 연안 항구의 경제구조에 대한 영향은 미미했다. (-926-)

몽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 많은 땅을 찾아서 이동을 계속하는 유목민 특유의 열망이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자면 대륙만 가지고는 불가능했으며,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몽골의 남송 재패에서 수전 水戰이 특별히 두드러졌다. 송을 진압하기 위해 강이나 해안에서 전투가 필요했다. 세계를 모두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남송을 전복한 다음, 몽골은 숙련된 선장과 승무원을 보유한 남송 함대를 앞세워 해외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남송을 수중에 넣고 나니 습윤한 아시아의 열대해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능동적이고 해양지향적 세계관을 가진 원의 시조 쿠빌라이에게는 당연했다. 몽골제국을 하나의 큰 순환체게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초원로 이외에 유라시아를 꿰뚫는 해상교통 거점과 해로 확보가 선결과제였다. (-1006-)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부터 남중국해에서는 이미 세계경제가 활성화됐다,. 뒤늦게 이곳에 합류한 유럽인은 남중국해 권역무역에 슬쩍 편승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마침내 1557년 마카오의 작은 반도에 정착했다. 스페인 사람은 태평양을 건너와서 1570년에 마닐라에서 최적의 항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중국인 300명이 넘는 무역공동체와 이슬람 족장의 작은 궁궐을 폐위시킨 일도 있다. 1590년대에 유럽의 세 번째 주자 네덜란드가 자카르타에 본거지 바타비아를 세우고, 남중국해에 당도하면서 남중국해 경제권에 참여했다. (-1082-)

이처럼 동아시아 바다에서는 몽, 고려, 일본 사이에 거친 풍랑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1274년 10월 3일 여원연합국이 합포 合浦에서 출진했다. 10월 5~29일 쓰시마 서안으로 선단 450척에 3만 여 명이 들어왔다. 1280년 여원연합군이 합포에서 다시 출진해 병사 370만 명, 병선 7만 척으로 쳐들어오자 규슈 사람이 모두 도망쳤다. 1281년 몽골과 고려 병사가 7만 3000척의 큰 배를 타고 왔다. 그들은 거주하기 위해 각종 살림도구와 경작을 위한 호미와 가래 등도 가지고 왔다. 고려선 500척이 이키, 쓰시마로부터 오면서 보이는 자를 전부 죽이니 인민들이 감당을 못해 처자를 데리고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몽골 병사가 하카타로 몰려왔다. 그러나 그해 7월 30일 태풍이 불어 적선이 거의 푬몰하고 죽은 자가 수천 , 수만 명에 이르렀다. (-1141-)

1467년에는 조선왕이 류큐 왕에게 국서를 보낸다. 류큐에서 앵무새와 공작새 등 각종 선물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며 이에 대한 사례로서 국서와 선물을 보냈다. 류큐 왕은 조선 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조선에서 보낸 물품이 화재로 인해 류큐에 전당되지 못함을 알리고,사례로서 국서와 선물를 보낸다. 선물 중에 목향, 육두구, 정향, 소목, 후추,앵무새 등 남방 특산이 눈에 띈다. 해양실크로드의 박래품이 조선에 당도한 것이다. (-1210-)

도자기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의 도자 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특히 임진왜란으로 많은 조선의 도공이 규슈로 끌려가 일본 땅에서 가히 '도자 혁명'을 일으킨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아리타 등의 도자기 수출과는 차원이 다른 '도자의 길'이 완성된다. 유럽으로 건너간 도자 기술은 독일의 마이센 자기처럼 독창적으로 개발되기에 이른다. 일직부터 중국긔 차가 유럽으로 수출됐는데, 특히 명청 시기를지나면서 스웨덴 같은 북유럽까지 차가 수출되면서 '차의 길'이 완성된다. 영국의 스리랑카 플랜테이션으로 '홍차의 길'이 런던과 콜롬보 사이에 놓이게 된다. (-1250-)

일산 정발학연 鼎鉢學硏)과 제주도 애월바다르 오가면서, 역사민속학 인류학, 역사학을 아우르며, 해양사, 선박사, 교역사, 해양생테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해양 문명에 대한 융복합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필자 주강현의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는 1300 페이지에 달하며, 상당한 양의 해양 문명을 통섭하고 있었다.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을 읽게 되면, 그가 쓴 전작을 확인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도 방대하지만, 필자의 전작도 만만치 않다.그의 전작은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을 쓰기 위한 워밍업에 부과하다.책『해양실크로드 문명사』 은 『관해기1,2,3』, 『제주기행』,『조기 평전』,『등대의 세계사』,『독도강치 멸종사』,『환동해 문명사』,『조선 사람 표류기』,『적도의 침묵』,『등대』,『 등대여행』를 아우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의 방대한 지적 수준을 간파하였으며 , 상대적으로 책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을 소화하기 위한 해양문명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독서츷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후회의 순간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10만년 인류의 역사는 선사시대와 고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전쟁의 역사이며, 정복의 역사를 포함한다. 대체적으로 「해양실크로드 문명」의 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육상실크로드 문명」을 주로 초증고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며, 우리가 역사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육지는 바다와 달리 국경이 있고,그 국경을 넘어올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대비가 항상 존재한다. 통상적으로 이민이란, 육지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지,바다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건 아니다.

육지 문명은 정복을 위한 문명을 운선하며, 바다 문명은 교류, 무역을 위한 문명을 우선한다. 지금처럼 철도, 비행기, 자동차가 없었던 16세기 이전에 바다를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누릴 수 있으며, 유럽서구 열강이 인도양윽 거쳐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와 향료, 도자기를 얻기 위한 긴 바닷길 여정을 거쳤으며,거대한 배 건조기술,항해술이 발달하게 된 이유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의 지리학은 해양실크로드의 문을 열게 된 첫 발자국이다.

그들은 해양을 정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바다의 이치를 알기 위해 애르 쓰게 된다. 아라비아 상인, 비잔틴 상인, 페르시아, 유대인, 곤륜, 송나라 상인, 남인도 상인까지, 천문과 역법을 활용한 항해기술이 발달하였고, 별이나 암초, 돌을 이용하여, 남들이 따라하지 못하는 항해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해상왕국 신라의 상인들, 고려의 개성상인들이 한반도를 서역에 알리게 된 이유, 백제와 푸난, 일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일보에 편입되어 버린 사라진 왕국 류큐국까지 그들이 추구하였던 해양 문명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해얌 실크로드 문명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역사, 명나라 환관 출신 정화 제국이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명에 의해 7차에 걸친 정화 대원정이다.18만 km의 바닷길을 개척하였고, 그 배에 승선한 중국인도 2만여 명에 달한다. 1405년에 떠나, 1433년까지 4차에 걸친 정화대원정은 중국의 해상무역에 대해서, 항해술과 배건조술이 서구를 뛰어넘었다는 증거였으며, 콜롬비아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온 기록이 현존하고 있으며, 점점 사라지는 해양 실크로드 문명을 주도했던 이들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책에는 어떤 것을 교역하였는지에 따라서, 비단길, 향료길, 도자길,인삼 길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고려가 주로 인삼과 도자기, 무역을 주로 하였으며, 백제의 도공이 일본을 거쳐 해외로 배를 타면서까지 그들의 기술이 해양실크로드 길을 따라 전파된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바닷길은 지리를 모르면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6세기~11세기 활약했던 노르만족이 이끄는 바이킹Viking이 극한 환경 바다에서 추위와 음식, 질병을 이겨내며 생존하는 법을 찾았던 것처럼, 포르투갈, 스페인이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자신의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해양, 깊은 심연의 먼바다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중국해,동남아시아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은 동아시아로 거쳐가는 주요 해양거점이었고,배들이 무역 통로로 이욛되고 있었다.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는 게 시급하였고, 좋은 항구를 가진 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 적 보았던 『신밧드의 모험 』 도 페르시아 상인에 영감을 얻은 대중적인 문화로 발전한 것이며, 현존하는 천일야화를 즐겨 읽었다.

교역과 무역으로 , 물건만 교류가 괸 것이 아니었다. 정치, 문화, 종교도 바닷길을 따라 교류가 되었으며,그들만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고대 인도 · 아리아 어 계통 산스크리트어가 해양 실크로드의 중요한 언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말레이 상인과 말레이 반도가 추구하였던 경제적 이득과 그들이 상인으로서 보여주었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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