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신화경영의 대가 - 반도체,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다
김찬웅 지음 / 이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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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모자 이일섭은 5월 16일 시가 101만원 상당의 141부대를 시중에 팔았고 뒤이어 1403부대를 부산시 동래구 소재 금북화학공업주식회사에 정상 수입품인 것처럼 매각하려다 5월 16일 부산세관 감시과 직원에게 적발되었다. (-19-)



"한비의 사카린밀수사건을 잘못 처리한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재무부는 앞으로 모든 부분에 대해 강력한 수사를 하게 될 대검에 적극 협조하여 이번 사건이 공정하고 엄중하게 처리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3-)



호암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비료공장 건설계획서를 다시 꺼냈다. 주위에서는 연간 생산량 25만 톤 규모의 공장을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호암은 다른 어떤 나라의 공장보다 규모가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제일 큰 비료공장이 연간 18만 톤을 생산하고 있을 때였다. 소련이 30만 톤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해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호암은 어떻게 해서든 그보다 더 큰 공장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 최대인 33만 톤 규모의 공장을 짓는 것이 호암의 목표였다. (-71-)



호암은 김재명 공장장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회사 사람들을 설득하는 한편 제당공장들을 두루 둘러보며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김재명 공장장은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내 기술진만으로 충분히 공장을 지을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의 자신감이 호암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46-)



호암은 공장을 지을 땅을 사들인 후 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기술이었다. 호암은 국내에 있는 다른 업체 사람을 데려다 쓰지 않고 회사 내의 사원들을 일본 산요에 연수를 보앴다.

하지만 삼성의 기술자들이 산요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요 기술자들은 중요한 기술은 삼성 기술자들이 배워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들은 주요 부품의 설계도면이나 가격 등에 관한 서류는 늘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심지어는 텔렉스 실까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게 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 과정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삼성 기술자들은 모두 밖으로 쫓아내고 자기들끼리 도쿄 본사와 전화해서 일을 처리했다. (-190-)



한편 삼성반도체 기술진은 1983년 11월, 공장이 지어지고 있는 동안 미국 마이크론사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D램을 개발해 냈다. 덕분에 VLSI 제1라인은 준공과 동시에 64 KD램을 생산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반도체시자에 먼저 뛰어든 일본 측은 "한국에서는 1986년까지도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기 어렵다."고 평가했었다. 하지만 삼성은 잠 6개월 만에, 일본이 20년 걸려 해낸 일을 깔끔하게 끝내버린 것이다. (-231-)



책 『삼성 신화경영의 대가』은 삼성 그룹 창업자, 호암 김병철 회장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1910년 경남 의령군 정곡면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1987년 세상을 떠났다.그가 이건희에게 후계자를 승계하고,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 후, 1953년 제일제당 설립,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게 된다.결정적으로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의 기업 경영에 흠집을 남기게 된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매번 삼성이 거론되었다. 실상 1966년 여야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덮어 버리려 했던 사건이다. 이후 1973년 제일 기획(주) 설립, 1977년 삼성종합건설을 설립하게 되는데,1969년 설립한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는 1984년 삼성전자로 이름을 바꾸었고, 반도체 신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삼성 경영에서, 쉽게 걾어온 건 아니다. 기술만이 한국이 살길이라고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비료와 경공업 위주의 산업에서, 서서히 사업을 키워 나갔다.국가, 정부가 하지 못했던 일들, 전국토가 논과 밭으로 되어 있었던 황무지에 공장을 세웠고,기술을 도입하여, 미래의 먹거리 산업을 찾아서 발굴하였다. 즉 반도체 산업은 고인이 된 이건희 작품이 아닌 ,삼성그룹 초대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작품이었다. 한국비료 사업 성공 후, 일본에 건너가 그들의 성공을 한국에 도입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실패할 가능성이 큰 반도체 산업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기흥 공장을 세워서, 64KD 반도체 개발 이후, 세계최고의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를 육성하였고, 그 것을 그이 아들 이건희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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