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겐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 하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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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다. 애비로서 아들의 혼례에 참석하지 못하니 비통하기가 이를 데 없다. 밤에 장흥부사 황세득이 술을 가지고 왔다.한양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에 거느리고 왔다. 곤장을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11-)



상을 내리려면 바르게 함을 중요히 여기고

벌을 주려면 용서 없음을 중요히 여긴다.

상을 바르게 하고 벌을 용서없이 행하는 것을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보는 곳에서 행하면

직접 듣고 보지 못하는 경우의 사람도

암암리에 감화되지 않음이 없다.

대저 성심은 천지에 사무치고

신명에게 통하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76-)



오랜만에 몸이 편안해 조반을 마음 놓고 먹었다. 오전에 도지와 함께 정자로 나가 활을 20순 쏘았다. 나는 각궁으로 편전을 쏘고, 도지는 철궁으로 육냥전을 쏘았다. 화살이 마음먹은 대로 날아가 박히지 않았다. 바람 탓을 하면서 객사로 돌아와 공무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 부산으로 보낸 거제현령 안위가 들어왔다. 안위는 중요한 보고가 있다면서 바짝 다가앉았다. (-143-)



선비 안극가의 본관은 탐진이고, 자는 의지, 호는 뇌석이다. 안극가는 1591년 45세의 나이로 사미시에 합격했으나,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성주선비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쌓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안극가의 스승 정구 또한 세속을 멀리하고 도를 구하는 선비였다. (-209-)



'아산 고향의 한 집안이 적에게 불타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이는 내 집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다. 적들이 나를 해하려다가 안 되니까 집안을 절단내려 한다. 이러니 왜적을 가리켜 도적떼라고 하는 것이다. 홀로 배 위에 앉았는데, 심회가 천 가래 만 갈래였다. 오후에 출항해 변산을 거쳐 곧바로 영광 법성포로 들어갔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곧 나주목사 배응경이 지휘선으로 와서 적정을 고했다. (-250-)



거센 물이 바르게 흘러

돌도 떠내려가게 하는 것이 세(勢)이다.

사나운 새가 빠르게 꺾어 날아

낚아채는 것이 절(節)이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그 기세가 험하고 그 절도는 짧다.

'세'는 당긴 활과 같고

'절'은 발사된 화살과 같다. (-291-)



잠시 후 선창으로 내려가 군사들에게 출정의 변을 고하고 배에 올랐다. 나팔을 세 번 불고 거북선 1척과 찬옥선 80척, 협선50척의 돛을 올렸다. 배가 포구를 벗어나기 직전 언뜻 예화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화는 바닷가에 나와 배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예화가 서 있는 바위절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넋을 닗고 서 있을 때 조방장 우치적이 보고했다.

"진린 도독 함대도 돛을 올렸습니다." (-342-)



1597년 음력 9월 16일, 원균이 이끌던 조선의 수군은 전멸하였고, 조선의 배는 12척 밖에 남지 않았다.12척의 배를 직접 이끌고  명량해전에 뛰어들었던 조선수군의 장수 이순신 장군은 일본을 크게 패퇴시켰고,그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임진왜란 내내, 전쟁을 치우면서, 23전 23승 전승을 거두었던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함으로서,자신의 임무를 다한다.



『신에겐 12척의 배가 있나이다』을 쓴 소설가 최인이 쓴 『늑대의 사과』,『문명, 그 화려한 역설』,『악마는 이렇게 말했다』,『도피와 회귀』를 읽음으로서,그의 작품 중, 두 편을 제외한 마머지 작품을 완독했다. 소설가 최인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스토리를 풀어가고 있었으며, 지난한 자료 수집과 이야기을 만들어 내는 것을 즐기는 그의 문학적 가치에 근거한다, 소설 『신에겐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하)』 는 을미년(1595년) 음력 1월 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에겐 예화가 있었다. 부모 없이 자란 예화를 가르치고, 살피며, 요리와 배움을 예화에게 제시하였다. 전란 중에서, 아픔과 고통을 삭힐 수 있었던 건 예화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이다.이순신 장군 ,그도 사람이었다. 아들과 조카들도 전쟁에 투입되었고, 세 명의 전쟁 중에 아들이 사망하였다. 조카도 사망하였던 와중에, 아버지로서,이순신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의관을 갖추고 이순신 장군은 배 위에 서서 진두지휘 했다. 배 위에서, 그는 훈령을 따르고, 그 훈련에 따라서 상과 벌이 결정되었다. 항상 전시 상태였고, 활을 쏘았고, 훈련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술년 (1598년 음력 11월 19일) 마지막 전쟁,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고,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 소설은 전쟁 뿐만 아니라 인성, 전술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손자병법과 육도 삼략에 나오는 전쟁의 기본 원칙을 꼽씹고 있다.이 원칙은 임진왜란 내내 이어지고 있었으며,고독하고,외로운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고단한 인생을 들여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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