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2-1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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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나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었는데, 한 직원이 큰 손수레 가득 골판지 상잘를 싣고 가면서 내게 그 안에 든 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242 기록군 Record Group'인 '노획 문서'였는데, 1950년 가을 미군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수집한 출판물의 극비 자료로 이뤄진 보물 창고 였다.갑자기 내 연구 주제가 내 앞에 펼쳐졌다. 이를테면 1940년대 발간된 『로동신문』 은 북한 바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사본이 없었지만, 이 문서에는 그 공식 기관지가 거의 다 들어 있었다. (-15-)

팽창주의자는 국경과 아시아 방향의 서쪽으로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가 있는 남쪽으로 눈을 돌린다. 제국주의자는 유럽 방향의 동쪽이나 유럽에 대한 관심의 확장으로"극동"으로 시각을 돌린다. 팽창주의자는 유럽 방향의 동쪽이나 유럽에 대한 관심의 확장으로 '극동'으로 시각을 돌린다. 팽창주의자와 제국주의자는 멀리 떨어진 지역, 존헤이의 표현에 따르면 "극서 가 극동이 되는" 지역에서 만난다. (-61-)

현재 세계정세의 특징은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중심에 힘이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강대국은 갈등 관계를 형설하고 있는데,소련이 공세에 있으며 미국은 기본적을 수세에 놓여 있다. 개별 국가를 끌어올 수 있는 제 3의 중심은 현재 없으며, 그 결과 어떤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국가들은 소련의 공세에 굴북하거나, 방어를 위해 미국과 연합을 모색하는 정치적 분할이 이뤄지고 있다. (-105-)

일본 점령 기간과 한국전쟁 동안 월러비는 세균전을 자행한 전범인 이시이 시로 장군을 비롯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비밀리에 계속 접촉했다. 1950~1960년대 그는 냉전 기간 동안 미국 정보기관에 고용돼 있던 라인하르트 게렌을 비롯한 나치 장교들과 가까운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171-)

1945년 10월 프레스턴 굿페로는 이승만의 귀국을 종용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도왔지만, 북한의 금광 채굴권을 다시 얻으려고 시도한 뒤인 1946년 5월 24일 한국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이승만은 자신이 동양합동광업회사에 금광 채굴권을 약속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인 1946년 3월 대표민주의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지 말라는 종용을 받았다. 한국 언론들은 이승만이 굿페로가 거기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운산광산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다. 북한과 소련은 그때까지 굿페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 사건 후 그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한 것으로 생각한다. (-231-)

1948년 중반 군부는 그보다 많은 청년 당원을 간부로 채용했다.테러에서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7년 9월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보로 미군정청에서 근무한 정수박은 우익 청년 단원 4명을 폭력 혐의로 기소했다. 정수박은 곧 암살했지만 이 사건의 살인죌 재판에 회보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00-)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가기구가 무너지면서 모든 곳에서 정치적 공간이 생겨났다. 좌익은 중앙에서 주변부까지, 서울에서 가장 작은 향촌까지 모든 행정 단위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부분 하향식 관료주의화는 자발적이고 활발한 정치활동의 폭을 축소시켰다. 치안 유지 기관은 기능을 회복하자 곧장 서울 인민위원회를 페지하면서 웃건 중앙에서 권력을 공고히 한 뒤 곧이어 국가기구의 하부에 있는 좌익을 척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좌우 대립은 1945년에는 국가 단위에서, 1946년에는 지방 도와 군 단위에서, 1947년에는 면과 리 단위에서 일어났다. (-357-)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승만 정권이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면 1950년 봄 남한 빨치산은 분명히 패배한 쪽이었다. 1년 전 유격대 활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지는 것처럼이나 보였다. 그러나 1949년 가을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되면서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1950년 초 봄의 새싹이 다시 돋아났을 때 유격대는 할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대규모 작전을 더 이상 전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420-)

이 무렵 조선공산당은 정권의 정책을 단순히 전달하는 장치이자 중앙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어디에나 있는 수많은 조직의 하나였다. 북한 정권이 조선민주당원에게 ,좀더 천천히가 아니라 좀더 활발히 활동하라고 촉구한 까닭은 경쟁적 정당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47년 노동당이 조선민주당 남포 지부를 비밀리에 조사한 결과 그들은 당원을 확대하거나 예상한 표를 획득하거나 더 많은 지부를 조직하려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당의 "민주화"는 지주와 친일파를 제거한다는 뜻이었지 그들을 동원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463-)

조선인민군 창군 1주년 기념일에 김일성은 처음 "수령"으로 불렸는데 , 최고 지도자라는 뜻의 호칭은 그때까지 스탈린에게 쓰였다. 그 호칭은 나중에 널리 쓰였다. 그것이 김일성에게 사용된 것은 우연히 아니었다. 남한이 신라의 후예로 자처한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자신을 고구려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1950년 창군 2주념 기념일에는 김일성을 수령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했으며, 신문에서는 만주 유격대를 찬양하는 기사를 날마다 내보냈다. 이 호칭으로 김일성을 부르는 것은 소련 이론가의 보기에 민족주의적 이단이었다. 그들의 공식 견해는 스탈린이 세계혁명의 지도자고, 드미트로프,마오쩌둥, 김일성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은 "민족지도자"였다. (-527-)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1>는 전두환 정권 때 금서였고, 42년간 국내에 번역되지 못했다. 결국에 21세기 들어서서, 『한국전쟁의 기원』 시리즈가 완역 될 수 있었으며, 미국인을 위해서 쓰여진 한국전쟁의 전쟁양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6.35 전쟁은 잔인하였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였다., 소련이 주축이었던 좌익 세력과 . 미군이 중심이었던 우익 세력이 서로 힘겨루기를 시행하였고, 1948년 일어난 4.3 사건은 두 이데올로기 힘겨루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다.서북청년단은 좌익세력 색출에 힘썼다. 미군정 하에서, 남한은 우익 세력이 점령하였지만, 저변에 좌익세력이 깔려 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존재했다.1945년 이전에 존재감이 거의 없었던 이승만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어떤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 될 때,우연과 필연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 당시 에치슨은 아시아 전역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한반도의 상황을 가볍게 생각했다.오직 한 사람만 한반도가 앞으로 어떻게 최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지 알았을 뿐이다. 6.25 전쟁이 초래한 미극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소련이 좌익의 지배자였다면, 미국은 우익의 지배자다. 두 나라 사이에 남한과 북한이 존재했으며, 한반도 내에 북한 금채굴권에 대해서, 탐욕스러운 투자자가 나타났으며, 남한과 북한이 서로 대척저에 있거나,전쟁을 발생할 대, 그 목적을 덜성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김구가 암살되었고, 그 당시 무능하였던 할아버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탄생될 수 있었다. 친일세력이 존재하였던 당시,나치의 부역자나 다름 없었던 이들은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상황을 간과하였고, 경제적 이익으로 생각하였다. 나라가 분단 된 상태에서,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남한은 불확실한 상황, 불확실한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이런 상황은 미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의 수장이 되었으며,미국의 바지사장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 전쟁의 비극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 미국과 소련의 이익과 군사적 효용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으며,그 피해가 한반도 곳곳에 이데올로기적인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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