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자네가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취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두 귀를 쫑긋 세우는 거야. 그럼 자네는 그 사람이 자네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바꿔 말하면, 자네가 사실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그제야 평소에는 가볍게 여겼던 언동 하나까지 의미를 생각하며 듣고 보게 되지.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야. 어려워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대답을 찾아내려 애쓰는 한, 자네는 점점 더 그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될 거야. 왜냐, 그 사람이 새로운 질문을 자꾸 던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전보다 더욱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고. 동시에 자네는 많은 것을 얻게 돼. 설사 애써 생각해낸 대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말이지.”
하마이시 교수는 일단 말을 끊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람이든 영화든 뭐든, 다 알았다고 생각하고 접하면 상대는 더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 그리고 정체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 노트에 메모한 좋아하는 영화를, 처음 본다는 기분으로 다시 한 번 보라고.”
                                                                           - p 326 <사랑의 샘> 중에서




인생이 영화 같다면 글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은 삶이 영화처럼 극적인 면이 (항상은 아니라도) 다분하니 그 맛이 심심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이 멜로인지 공포인지 전쟁인지 추리인지 장르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는 영화처럼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품고 산다.
그것도 멜로드라마면 딱 좋겠다.

영화처럼,
가네시로 자즈키는 아마도 영화광인가 보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배우는 이소룡일지 모르며, 그래서 그가 청소년기 때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들불처럼 번진 한 때의 유행처럼 (일본이나 우리나) 억눌린 불만이나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열광했던 맨몸의 영웅, 착 달라붙는 노란 트레이닝복에 기합소리 독특한 쿵푸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정무문’에 심취했을지 모른다.
왜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권상우의 ‘말죽거리 잔혹사’로 기억되는 그 시절 그 인물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면 정서적으로 십분 이해가 빠를 것이다.
특별히 프랑스 영화처럼 고매하다거나 폼을 잡지 않아도 좋다.
(대체 청소년기 때 프랑스 영화에 심취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단순한 스토리라인에 등장인물이 뻔해도 뭐, 나쁠 것 없다.
액션 영화라도 한 순간 자신 안에 잠재된 뭔지 모를 감정을 토해내고 배설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얼마든지 그 영화에 박수를 보내며 좋은 영화로 추억의 앨범 속에 고이 접어 간직될 것이다.
그리고 가네시로가 소중히 간직하고픈 영화중에는 ‘로마의 휴일’이 손꼽힐지 모르겠다.
오랜 시간 전 세계인을 가슴 떨리게 했던 낭만이 뚝뚝 떨어지는 아름다운 그 영화.

우리는 왜 영화에 열광하는가? 왜 영화처럼 살고자 하는가?
가네시로 가즈키는 왜 이번 소설에 영화를 모티브로 가져왔는가?
아~, 여기까지. 왜 영화에 열광하는지 구체적인 대답을 찾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하지만 왜 영화처럼 살고자 하는지, 다음의 가네시로가 ‘영화처럼’에서 영화 얘기에 몰두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켰는지 질문을 연결하다보면 대답 속에 이미 여러 의미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은 시각적인 것이 특징 중에 하나다.
요즘 소설의 성향이나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한데, 특히나 그런 요소가 강한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빠른 스피드와 영상을 선호하는 신세대들에게 흡수가 빨라서인지 대부분이 영화화 되었다. 그런 그가 아예 영화를 들고 나와서 흥미롭기도 하지만 잠시 ‘영화’란 매체에 작가와 연결된 개인적 의미는 뒤로 미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영화는 이미 대중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인 기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한 잔의 커피를 하루하루 소비하는 습관처럼 생활의 일탈일 것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좀 더 번거롭게 TV드리마의 시청을 확장시킨 것이랄까? 그럼에도 영화라는 대중 기호 놀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자리매김하는 현대인들에게서 난 슬픔을 느낀다. 그 만큼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적은 빈약한 문화의 틀 안에서 숨 쉬는 대중일 뿐 그것은 그저 소비의 힘일 뿐인데 위대한 문화 주체로서의 권력인 양 부풀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도록 또는 외부의 세뇌에 길들여 착각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하여튼 그래서 소설 속의 영화얘기는 반복하자면 별다를 것 없는 기호일 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스크린에 비친 빛줄기의 조합에 향수를 가미해서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비추는 일을 왜 반복하는 것일까?

소설 ‘영화처럼’은 영화 소설 제목을 소제목으로 한 옴니버스 소설이다.
아니, 가네시로 가즈키의 전작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시선을 이미 알 수 있을 것이다.
참 별 볼일 없는 우리네 인생. 학교에서 치이고, 기성세대에게 눌리고 (스피드), 직장에서 버티기도 힘든데 그것도 모자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랗게 젊은 녀석의 주먹 앞에 가정도 지키지 못하며 무릎 떨어야하는 권위 실추된 수컷가장의 비애(플라이 대디 플라이), 참 꼴난 민족을 들먹이며 소수를 차별하고 핍박하는 다수의 횡포가 잠재되어 있는 대중의식(GO) 등. 그런 주인공들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영화적인 영웅이 되어 단번에 속 시원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007처럼 재빠르게, 단기로 몸을 단련하여 힘을 기르고 주먹의 힘을 키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속 시원하게 기타 등등.
어쩌면 더욱 현실에서는 어렵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복수로 소설을 끝내왔다.
물론 순간은 통쾌하고 속 시원하다. 그러나 돌아서면 우리는 제자리다.
그렇게 대리만족으로 잠시 축 쳐진 어깨를 곧추세우고 위안 삼아 앞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처럼’은 더욱 노골적인 그러나 연장된 주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폼나게 살아보자고, 이렇게 강하게 힘을 길러 복수도 하고, 떨리는 몸에 힘을 넣고 용기를 내서 사랑 고백도 하며 사랑의 이야기도 성공하자고, 왕따가 되더라도 겁먹지 말고 스스로 성장해서 자기 길을 가자고.
이런 저런 얘기들이 섞이면서 그저 무미건조한 우리네 일상을 꿈꾸는 이상으로 탈바꿈하여 일탈해보자고 등을 떠미는 가네시로 가즈키.
그런데 그의 소설 제목처럼 그도 알긴 알 것이다.
“어이~! 우리 ‘영화처럼’ 해보자고!!!”
그가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는 “에이~ 그건 어디까지 ‘영.화’ 얘기이고, 당신 것은 ‘소.설’이잖아?” 라고 답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그래도 힘내보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며,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며 일탈을 꿈꾸는 일마저 포기할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꿈은 우리의 본능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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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누구인가? 우리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실제인가 가짜인가? 종이로 만든 허구, 신의 모습을 닮은 허상, 재로 만든 판토마임 무대에 등장한 실재하지 않는 존재, 적의를 품은 마술사가 빨대로 불어대는 비눗방울?

그렇다면 진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p251 진실은 무엇인가 중에서

 

1920년생인 작가 제수알도 부팔리노는 1988년에 이 작품 <그날의 거짓말>을 출간했다.

정확히 그가 언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출간년도를 보더라도 꽤 지긋한 나이에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본 셈이다.

 

이야기는 철갑요새 섬 감옥에서 내일이면 단두대에 오를 네 명의 사형수들에게 감옥의 최고 책임자인 사령관으로부터 협상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국왕제 반대자로서 국왕암살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된 그들은 비밀결사조직의 회원들이다. 만일 새벽까지 투표함에 그들의 조직 배후인물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네 명 모두 석방될 것이며 모두 거부한다면 사형은 집행되리라는 거래 아닌 거래가 일방적으로 성사된다.

그리고 그들은 사형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행복했던 순간들을 한 명씩 돌아가면서 회고하며 두렵고 우울한 긴 밤을 지새운다.

 

과연 그들이 이야기하는 과거는 진실한 것일까? 진실하다면 얼마만큼 진실하며 거짓이라면 또 왜 거짓이 뒤섞여 혼재된 것일까?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들 곧 관중 앞에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는 무대 위에 배우처럼 멋들어진 연기를 해내곤 한다. 자기의 이야기마저.

왜 그들은 또는 우리는 순간순간 배우가 되는 것일까? 배우의 몸짓은 진실해야 하는 걸까?

거짓이라면 무엇을 목적으로 태연하게 연기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초대하는 걸까?

‘그 날밤의 거짓말’은 이런 거짓과 진실의 현상이 빚어낸 화려한 축제 같은 작품이다.

‘축제’라는 표현이 알맞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내용과는 거리가 먼 은유일지라도 전체적인 문맥과 이야기 구성, 또 작가의 화려한 수사 등 액자소설이 갖는 다양한 현상의 집합체로서 읽는 재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왜 읽고 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가하면 작품성이 돋보이고 무게감이 실린 오랜만에 읽는 작품이기 때문인데, 그걸 구체화 시키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순간 무색함을 느낀다.

 

추리가 가미되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떠벌이지는 않겠다.

허망한 인간사에 속고 속이는 상황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 호기심을 발동시키지 않아도 작품은 의외성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독자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그날밤의 거짓말이 꿈꾸었던 결과는 정말로 진실일까 싶지만 그 역시 작품 속의 등장인물뿐 아니라 독자가 판단해야 하는 몫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뒤편 작품해설에 보면 작가가 고전적인 표현과 느낌을 내기 위해 과거 여러 유명한 문학 작품들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맛을 더했다고 하는데 그런 느낌 자체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의 한계이겠지만 번역자의 탓을 하기 전에 번역의 수레에 얹혀 원작이 갖는 특성의 언저리를 둘러봐야하는 독자가 갖는 한계이자 숙명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며 호들갑스런 푸념이 될까?

 

짧은 하룻밤에 읊는 인생이야기.

인생 자체가 그렇듯, 배신과 음모와 증오와 사랑이 뒤섞이고 모험과 자신의 합리화도 조미료로 뿌려져 환상 같은 이야기가 문학성 짙게 옷을 입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이야기마저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가 된다.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이야기의 획득력은 작가의 능력과 비례하겠지만 우리는 의심 없이 또 끊임없이 작가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아는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자신을 존속시키고 숨 쉴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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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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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하나라면 그것에 이르는 사연은 참 여러 가지다.
사랑 때문에, 배신 때문에, 좌절 때문에, 분노 때문에, 누명이나 모욕에 따른 억울함 때문에,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혼심을 다하다 마지막을 장식할 때 등.
거기에 시대의 사회상이 덧입혀진다면 사연은 더욱 질퍽하고 끈기 있게 설득력을 강화한다.

근대 조선 말기는 식민지 지배와 더불어 전반적으로 봉건주의적 사회의식이 팽배한 반면 동시에 근대 신문물이 물밀 듯 밀려와 그 수혜자들이 범람하고 있었을 법하지만 과도기에 걸쳐진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여자와 남자, 구세대와 신세대의 인물들이 뒤섞여 어느 시대나 갈등이야 있어왔지만 그 수위가 극에 달한 나머지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떠안고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자살이 표명한 의미는 빛바래 지고 말 것이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사연마다 안고 있는 음영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경성자살클럽>은 관심을 이끈다.

저자 전봉관의 전작 <경성기담>을 이미 접한 터여서인지 책의 논조와 자료를 모아 좀 더 직접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방식의 시사적이며 대중적인 접근은 변함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자살’은 언제 어디서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주제다.
속물적인 호기심이라고 탓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그만큼 자살이란 주위에서 많이 접할 수 있는 내용인 동시 실행하기에는 윤리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 그리고 사회적인 면이 뒤엉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부담스런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왠지 자살한 동기들이 구태의연해서인지 모르나 낯설지가 않다.
예를 들어,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십대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라든지, 동성연애 얘기들은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시어머니와의 갈등이나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서러움은 현재보다 더 강도가 심하기는 하지만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한몫 거들어 저자도 에필로그에서 지적했듯이 여자들이 겪는 갈등의 대부분은 남성들의 파렴치한 행태 때문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신교육을 받아 ‘모던걸’이던 여성들이 시집이라는 굴레에 묶일 때는 비판적 자세는 힘을 잃고 결혼이라는 문화의 속성이 악습으로 변질되어 족쇄가 된다.

이런 시대적 증거들이 개인적 특성을 가진 구체적인 사례로 입증해 갈 때 저자 전봉관이 전하고자 하는 저의는 밑바닥에서 도도히 흘러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저자 전봉관의 당시 잡지나 신문을 이용해서 당대의 시선을 날것으로 전달하면서 간접적으로 시대상을 전달하는 방식이 나름 의미 있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엄숙하지 않고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근대조선을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자살’로 대신하는 글의 재료로서 선택이 탁월했다고 본다. 조금은 이율배반적인 나의 해석이기는 하지만 자살로서 막을 내린 인물들의 억울함에 우선은 함께 가슴 아파하면서 명복을 빌어본다.
동시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살에 대한 신문 지상을 차지하는 사건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먼 훗날, 제 2의 전봉관이 나와 우리 시대의 신문을 뒤적이며 21세기 초 ‘서울 자살 클럽’을 다시 써나간다면 그는 어떤 시선으로 내용을 선택하고 추스르고 정리해서 책으로 묶을 것인가? 아마도 시대의 살벌함이 묻어난 서글픈 하소연과 삶의 발버둥 섞인 잔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리라.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 어느 시대든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그래도 자위해본다.
이것이 자위인지 부조리의 확인인지 가늠마저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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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나 졸리, 세 가지 열정 - 인생을 바꾸고 싶어하는 여자들에게 보내는 열정의 메시지
로나 머서 지음, 전은지 옮김 / 글담출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 나는 항상 오늘을 산다.
내일 저녁엔 모든 것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안젤리나 졸리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존재감’ 있는 배우다. 배우에게 그것도 여배우에게 존재감처럼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또 있을까? 예를 들어 섹시함을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릴린 몬로의 백치미가 가미된 섹시함과도 구별된다.
어쨌든 지성이 곁들어진 강한 카리스마를 겸비한 여배우라는 점이 항상 이목을 집중시켜왔다. 한 장의 사진에서조차 눈길을 끄는 외모는 그에게 매력과 동시에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난 어쩌면 그의 팬인지 모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의 사진을 있으면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니까.
외모도 외모이지만 사생활은 또 어떤가?
솔직히 연예인의 사생활 관심 없다. 그냥 그런 얘기(?)가 들리면 그런가보다 한다. 뭐, 확인할 길 없으니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거니와 특별히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간혹 안젤리나 졸리의 연애편력이 들려올 때면 또 그것도 능력이다 싶으면서 흘려버린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런 호사가들의 얘깃거리 못지않게 들리는 특이한 얘깃거리가 있다.
인종을 초월해서 아이들을 입양하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등.

미안한 얘기지만 난 조금은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아이들을 인종별로 수집하는 것도 아니고 과연 책임 있게 키우고는 있을까? 에이~키우기는 헐리우드 스타께서 그것도, 불같은 사랑만을 추구하는 연예인께서 집에서 조용히 코흘리개 아이들을 돌본다고? 자기 자식이라도 직접 돌보기 어려울 텐데, 무슨. 그냥 24시간 유모나 보모에게 맡기고 돈이나 풍성풍성 지불하고 끝내겠지.
모르겠다. 어디까지 해당되고 어디까지 나의 삐뚫어진 상상력인자 선입견인지.

어쨌든 그의 이미지는 화려한 외모만큼, 화려한 이력만큼, 화려한 소문만큼 화려한 선입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안젤리나 졸리 세가지 열정’이란 책을 덥석 잡아 들었는지 모른다.
어느 정도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나의 생각을 바로잡을 기회도 될 것 같아서.
그런데 책의 목적은 사실 안젤리나 졸리에 대해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전기류가 아니라 그의 삶을 반추해보며 그가 살아온 쉽지 않은 삶 속에 그의 노력을 밑거름 삼아 우리 여자들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노력해서 성공적인 길로 이끌어가자는 여성 자기 계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190페이지 안팎의 두께에 그의 변화되는 삶의 특징들을 간단하게 요약해 놓았기 때문에 나에게 자기 계발서로서 다가오기보다 그의 삶과 대내외적인 활동들에 더욱 집중해서 알고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고나 할까.
10대와 20대의 불완전하고 불안한 삶을 살다 캄보디아 소년 매덕스를 입양해서 키우므로 해서 남편 빌리 밥 손튼과 이혼하는 계기가 되는 등 그 전의 이혼에 이어 두 번째 이혼 경험도 얻게 되었지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안정함과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고백이 있었다. 또 소득의 삼분의 일을 기부하고 세계 여러 난민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일에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숭고한 인본주의적인 실천 자세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특히나 매덕스가 성장해서 캄보디아에 대해 좀 더 사랑하고 뜻 있는 활동을 하길 기대하면서 끊임없이 캄보디아의 문화를 익히게 하고자 자주 캄보디아를 찾는 모습을 보며 진정한 지성의 힘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세 가지 열정.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라!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라!

그저 안젤리나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든, 그것을 너머 자신의 삶 속으로 실천 의지를 키워나가는 계기가 되든, 그것은 읽는 자의 몫일 것이다.
다만 위의 열거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 가지 열정이라고 해서 내용상 특별한 그 무엇이나 노하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우리가 모방해서 자기화하느냐, 더 나아가 자기만족에 한 발 다가가느냐 하는 것에는 작은 것 하나라도 아는 것을 실천하는 순간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듯싶다.

아름다운 여자, 실천하는 인간 안젤리나 졸리!
그의 열정으로의 길을 이 책에서 잠시 힌트 삼아 타인의 진정한 삶으로 여행을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부담 없이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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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스트리트
산드라 시스네로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그들의 힘은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엄청난 기세로 땅밑으로 뿌리를 뻗어간다. 그들은 위로도, 아래로도 자란다.
거친 발가락으로 땅을 움켜잡고 격정적으로 하늘을 물어뜯으며 자신들의 분노를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들 중 하나라도 자기 존재의 이유를 잊게 된다면, 그들은 화병 속의 튜립처럼 서로에게 나약해진 팔을 걸고 이내 시들어 버릴 것이다. 견뎌야 해. 견디고 또 견뎌야 해.
- p137 야윈 네 그루의 나무 중에서

한 부분을 뭉텅 잘라 옮겨 보았다. 그만큼 작가의 의지가 상징적으로 담겨 있어서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망고 스트리트. 빈민가의 멕시코계 사춘기 소녀 에스페란자의 살고 있지만 결코 살고 싶지않은 동네 이름이다.
어디 동네이름 뿐이랴. 에스페란자라는 이름조차 할머니의 그것을 물려받은 것인데, 강인하고 꿈을 가진 할머니는 강제로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평생 집안에 갇혀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슬픔에 젖어 살았다. 그러니까 이름은 물려받았으되, 삶만은 결코 닮고 싶지않다.
그런 그녀가 살고 있는 거리 망고 스트리트는 당연하겠지만 이런저런 인간 군상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어떤 이는 뜨내기처럼 살다 정착하지 못하고 쉽게 떠나지만 또 어떤 이는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묶여 산다.

200페이지를 살짝 넘는 이 책은 얇고 읽기에도 문체가 쉽고 부드러워 편안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왠지 막상 평을 하려니 너무나 조심스러워진다.
편안하다는 것이 만만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고, 문체가 부드럽다고 내용이 단순한 것은 아니며, 표현이 아름답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표지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미국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작문과 문예창작 교재로 사용될 정도라는데, 내가 보기에도 정갈하고 풍부한 표현이 마치 실바람에 실려 사뿐히 내안에 스며들어와 감성을 자극한다.

내용에 있어서도 빈민가에서의 녹록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주된 이야기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작가는 짧게 써내려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감정의 곤죽을 만들지는 않았다.
소녀 에스페란자의 시선은 쉽사리 희망찬가를 읉어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냉소적으로 푸념을 늘어놓지 않은, 어조의 담담함을 놓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소녀의 욕망과 꿈을 얘기하고 주위의 아픔과 기쁨을 표현할 때는 작은 사건이라도 예리함을 담고서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제기한다.
소설이란 그런 것같다.
문제와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하는 것.
사건을 통해 본질을 관통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소설이 뛰어나게 다가온다.
비록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고 숨 가쁘게 하는 자극은 없어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소녀 에스페란자가 되고 거리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단지 빈민가 그 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낯선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욕망과 그 뒤안길의 그림자는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사회적 위치나 상황을 떠나 참 서로가 서로를 닮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망고 스트리트를 그렇게 서성거렸고 에스페란자의 꿈을 쫓아 그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가난에 얽매이지 않기를, 여자라고 해서 묶이지 않기를,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만의 집을 꼭 갖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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