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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누구인가? 우리 인간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실제인가 가짜인가? 종이로 만든 허구, 신의 모습을 닮은 허상, 재로 만든 판토마임 무대에 등장한 실재하지 않는 존재, 적의를 품은 마술사가 빨대로 불어대는 비눗방울?
그렇다면 진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p251 진실은 무엇인가 중에서
1920년생인 작가 제수알도 부팔리노는 1988년에 이 작품 <그날의 거짓말>을 출간했다.
정확히 그가 언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출간년도를 보더라도 꽤 지긋한 나이에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본 셈이다.
이야기는 철갑요새 섬 감옥에서 내일이면 단두대에 오를 네 명의 사형수들에게 감옥의 최고 책임자인 사령관으로부터 협상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국왕제 반대자로서 국왕암살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된 그들은 비밀결사조직의 회원들이다. 만일 새벽까지 투표함에 그들의 조직 배후인물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네 명 모두 석방될 것이며 모두 거부한다면 사형은 집행되리라는 거래 아닌 거래가 일방적으로 성사된다.
그리고 그들은 사형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행복했던 순간들을 한 명씩 돌아가면서 회고하며 두렵고 우울한 긴 밤을 지새운다.
과연 그들이 이야기하는 과거는 진실한 것일까? 진실하다면 얼마만큼 진실하며 거짓이라면 또 왜 거짓이 뒤섞여 혼재된 것일까?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들 곧 관중 앞에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는 무대 위에 배우처럼 멋들어진 연기를 해내곤 한다. 자기의 이야기마저.
왜 그들은 또는 우리는 순간순간 배우가 되는 것일까? 배우의 몸짓은 진실해야 하는 걸까?
거짓이라면 무엇을 목적으로 태연하게 연기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초대하는 걸까?
‘그 날밤의 거짓말’은 이런 거짓과 진실의 현상이 빚어낸 화려한 축제 같은 작품이다.
‘축제’라는 표현이 알맞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내용과는 거리가 먼 은유일지라도 전체적인 문맥과 이야기 구성, 또 작가의 화려한 수사 등 액자소설이 갖는 다양한 현상의 집합체로서 읽는 재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왜 읽고 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가하면 작품성이 돋보이고 무게감이 실린 오랜만에 읽는 작품이기 때문인데, 그걸 구체화 시키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순간 무색함을 느낀다.
추리가 가미되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떠벌이지는 않겠다.
허망한 인간사에 속고 속이는 상황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 호기심을 발동시키지 않아도 작품은 의외성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독자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그날밤의 거짓말이 꿈꾸었던 결과는 정말로 진실일까 싶지만 그 역시 작품 속의 등장인물뿐 아니라 독자가 판단해야 하는 몫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뒤편 작품해설에 보면 작가가 고전적인 표현과 느낌을 내기 위해 과거 여러 유명한 문학 작품들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맛을 더했다고 하는데 그런 느낌 자체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의 한계이겠지만 번역자의 탓을 하기 전에 번역의 수레에 얹혀 원작이 갖는 특성의 언저리를 둘러봐야하는 독자가 갖는 한계이자 숙명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며 호들갑스런 푸념이 될까?
짧은 하룻밤에 읊는 인생이야기.
인생 자체가 그렇듯, 배신과 음모와 증오와 사랑이 뒤섞이고 모험과 자신의 합리화도 조미료로 뿌려져 환상 같은 이야기가 문학성 짙게 옷을 입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이야기마저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가 된다.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이야기의 획득력은 작가의 능력과 비례하겠지만 우리는 의심 없이 또 끊임없이 작가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아는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자신을 존속시키고 숨 쉴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운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