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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자네가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취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두 귀를 쫑긋 세우는 거야. 그럼 자네는 그 사람이 자네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바꿔 말하면, 자네가 사실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그제야 평소에는 가볍게 여겼던 언동 하나까지 의미를 생각하며 듣고 보게 되지.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야. 어려워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대답을 찾아내려 애쓰는 한, 자네는 점점 더 그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될 거야. 왜냐, 그 사람이 새로운 질문을 자꾸 던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전보다 더욱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고. 동시에 자네는 많은 것을 얻게 돼. 설사 애써 생각해낸 대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말이지.”
하마이시 교수는 일단 말을 끊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람이든 영화든 뭐든, 다 알았다고 생각하고 접하면 상대는 더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 그리고 정체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 노트에 메모한 좋아하는 영화를, 처음 본다는 기분으로 다시 한 번 보라고.”
- p 326 <사랑의 샘> 중에서
인생이 영화 같다면 글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은 삶이 영화처럼 극적인 면이 (항상은 아니라도) 다분하니 그 맛이 심심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이 멜로인지 공포인지 전쟁인지 추리인지 장르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는 영화처럼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품고 산다.
그것도 멜로드라마면 딱 좋겠다.
영화처럼,
가네시로 자즈키는 아마도 영화광인가 보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배우는 이소룡일지 모르며, 그래서 그가 청소년기 때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들불처럼 번진 한 때의 유행처럼 (일본이나 우리나) 억눌린 불만이나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열광했던 맨몸의 영웅, 착 달라붙는 노란 트레이닝복에 기합소리 독특한 쿵푸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정무문’에 심취했을지 모른다.
왜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권상우의 ‘말죽거리 잔혹사’로 기억되는 그 시절 그 인물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면 정서적으로 십분 이해가 빠를 것이다.
특별히 프랑스 영화처럼 고매하다거나 폼을 잡지 않아도 좋다.
(대체 청소년기 때 프랑스 영화에 심취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단순한 스토리라인에 등장인물이 뻔해도 뭐, 나쁠 것 없다.
액션 영화라도 한 순간 자신 안에 잠재된 뭔지 모를 감정을 토해내고 배설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얼마든지 그 영화에 박수를 보내며 좋은 영화로 추억의 앨범 속에 고이 접어 간직될 것이다.
그리고 가네시로가 소중히 간직하고픈 영화중에는 ‘로마의 휴일’이 손꼽힐지 모르겠다.
오랜 시간 전 세계인을 가슴 떨리게 했던 낭만이 뚝뚝 떨어지는 아름다운 그 영화.
우리는 왜 영화에 열광하는가? 왜 영화처럼 살고자 하는가?
가네시로 가즈키는 왜 이번 소설에 영화를 모티브로 가져왔는가?
아~, 여기까지. 왜 영화에 열광하는지 구체적인 대답을 찾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하지만 왜 영화처럼 살고자 하는지, 다음의 가네시로가 ‘영화처럼’에서 영화 얘기에 몰두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켰는지 질문을 연결하다보면 대답 속에 이미 여러 의미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은 시각적인 것이 특징 중에 하나다.
요즘 소설의 성향이나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한데, 특히나 그런 요소가 강한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빠른 스피드와 영상을 선호하는 신세대들에게 흡수가 빨라서인지 대부분이 영화화 되었다. 그런 그가 아예 영화를 들고 나와서 흥미롭기도 하지만 잠시 ‘영화’란 매체에 작가와 연결된 개인적 의미는 뒤로 미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영화는 이미 대중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인 기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한 잔의 커피를 하루하루 소비하는 습관처럼 생활의 일탈일 것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좀 더 번거롭게 TV드리마의 시청을 확장시킨 것이랄까? 그럼에도 영화라는 대중 기호 놀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자리매김하는 현대인들에게서 난 슬픔을 느낀다. 그 만큼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적은 빈약한 문화의 틀 안에서 숨 쉬는 대중일 뿐 그것은 그저 소비의 힘일 뿐인데 위대한 문화 주체로서의 권력인 양 부풀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도록 또는 외부의 세뇌에 길들여 착각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하여튼 그래서 소설 속의 영화얘기는 반복하자면 별다를 것 없는 기호일 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스크린에 비친 빛줄기의 조합에 향수를 가미해서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비추는 일을 왜 반복하는 것일까?
소설 ‘영화처럼’은 영화 소설 제목을 소제목으로 한 옴니버스 소설이다.
아니, 가네시로 가즈키의 전작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시선을 이미 알 수 있을 것이다.
참 별 볼일 없는 우리네 인생. 학교에서 치이고, 기성세대에게 눌리고 (스피드), 직장에서 버티기도 힘든데 그것도 모자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랗게 젊은 녀석의 주먹 앞에 가정도 지키지 못하며 무릎 떨어야하는 권위 실추된 수컷가장의 비애(플라이 대디 플라이), 참 꼴난 민족을 들먹이며 소수를 차별하고 핍박하는 다수의 횡포가 잠재되어 있는 대중의식(GO) 등. 그런 주인공들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영화적인 영웅이 되어 단번에 속 시원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007처럼 재빠르게, 단기로 몸을 단련하여 힘을 기르고 주먹의 힘을 키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속 시원하게 기타 등등.
어쩌면 더욱 현실에서는 어렵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복수로 소설을 끝내왔다.
물론 순간은 통쾌하고 속 시원하다. 그러나 돌아서면 우리는 제자리다.
그렇게 대리만족으로 잠시 축 쳐진 어깨를 곧추세우고 위안 삼아 앞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처럼’은 더욱 노골적인 그러나 연장된 주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폼나게 살아보자고, 이렇게 강하게 힘을 길러 복수도 하고, 떨리는 몸에 힘을 넣고 용기를 내서 사랑 고백도 하며 사랑의 이야기도 성공하자고, 왕따가 되더라도 겁먹지 말고 스스로 성장해서 자기 길을 가자고.
이런 저런 얘기들이 섞이면서 그저 무미건조한 우리네 일상을 꿈꾸는 이상으로 탈바꿈하여 일탈해보자고 등을 떠미는 가네시로 가즈키.
그런데 그의 소설 제목처럼 그도 알긴 알 것이다.
“어이~! 우리 ‘영화처럼’ 해보자고!!!”
그가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는 “에이~ 그건 어디까지 ‘영.화’ 얘기이고, 당신 것은 ‘소.설’이잖아?” 라고 답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그래도 힘내보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며,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며 일탈을 꿈꾸는 일마저 포기할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꿈은 우리의 본능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