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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하나라면 그것에 이르는 사연은 참 여러 가지다.
사랑 때문에, 배신 때문에, 좌절 때문에, 분노 때문에, 누명이나 모욕에 따른 억울함 때문에,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혼심을 다하다 마지막을 장식할 때 등.
거기에 시대의 사회상이 덧입혀진다면 사연은 더욱 질퍽하고 끈기 있게 설득력을 강화한다.
근대 조선 말기는 식민지 지배와 더불어 전반적으로 봉건주의적 사회의식이 팽배한 반면 동시에 근대 신문물이 물밀 듯 밀려와 그 수혜자들이 범람하고 있었을 법하지만 과도기에 걸쳐진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여자와 남자, 구세대와 신세대의 인물들이 뒤섞여 어느 시대나 갈등이야 있어왔지만 그 수위가 극에 달한 나머지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떠안고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자살이 표명한 의미는 빛바래 지고 말 것이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사연마다 안고 있는 음영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경성자살클럽>은 관심을 이끈다.
저자 전봉관의 전작 <경성기담>을 이미 접한 터여서인지 책의 논조와 자료를 모아 좀 더 직접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방식의 시사적이며 대중적인 접근은 변함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자살’은 언제 어디서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주제다.
속물적인 호기심이라고 탓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그만큼 자살이란 주위에서 많이 접할 수 있는 내용인 동시 실행하기에는 윤리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 그리고 사회적인 면이 뒤엉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부담스런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왠지 자살한 동기들이 구태의연해서인지 모르나 낯설지가 않다.
예를 들어,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십대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라든지, 동성연애 얘기들은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시어머니와의 갈등이나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서러움은 현재보다 더 강도가 심하기는 하지만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한몫 거들어 저자도 에필로그에서 지적했듯이 여자들이 겪는 갈등의 대부분은 남성들의 파렴치한 행태 때문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신교육을 받아 ‘모던걸’이던 여성들이 시집이라는 굴레에 묶일 때는 비판적 자세는 힘을 잃고 결혼이라는 문화의 속성이 악습으로 변질되어 족쇄가 된다.
이런 시대적 증거들이 개인적 특성을 가진 구체적인 사례로 입증해 갈 때 저자 전봉관이 전하고자 하는 저의는 밑바닥에서 도도히 흘러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저자 전봉관의 당시 잡지나 신문을 이용해서 당대의 시선을 날것으로 전달하면서 간접적으로 시대상을 전달하는 방식이 나름 의미 있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엄숙하지 않고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근대조선을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자살’로 대신하는 글의 재료로서 선택이 탁월했다고 본다. 조금은 이율배반적인 나의 해석이기는 하지만 자살로서 막을 내린 인물들의 억울함에 우선은 함께 가슴 아파하면서 명복을 빌어본다.
동시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살에 대한 신문 지상을 차지하는 사건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먼 훗날, 제 2의 전봉관이 나와 우리 시대의 신문을 뒤적이며 21세기 초 ‘서울 자살 클럽’을 다시 써나간다면 그는 어떤 시선으로 내용을 선택하고 추스르고 정리해서 책으로 묶을 것인가? 아마도 시대의 살벌함이 묻어난 서글픈 하소연과 삶의 발버둥 섞인 잔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리라.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 어느 시대든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그래도 자위해본다.
이것이 자위인지 부조리의 확인인지 가늠마저 안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