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전나무의 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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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소박한 뉴잉글랜드 메인주 바닷가 마을에 낯선 얼굴이 여름을 보내기 위해 도착한다. 소설은 그가 그곳에 당도한 이후 일어나는 일들을 배경으로 하며, 그는 이곳의 이야기를 관찰하며 향유하는 화자이다.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듯한 화자에 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대도시에서 부양가족 없이 홀로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사는 여성이라는 것뿐이다. 떠들썩하고 복잡한 대도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한적하고 드넓은 자연을 품은 바닷가 마을은 화자가 여름을 보내기 알맞은 곳인 것 같다. 마을의 약초 전문가이자 따스한 성정의 중년 여성 ‘토드 부인’네 방을 빌려 살며 때때로 글을 쓰고 마을을 살피는 게 화자의 일이다.


소설은 화자가 만나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다. 늙은 선장인 ‘리틀페이지’와 수십 년 전의 기인인 ‘조애나’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등 마을에 숨은 이야기에 경청하며 마을을 이해한다. 마냥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종종 그를 놀라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하지만 화자는 마을의 불편한 현실을 제 식대로 ‘수정’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이며 불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인구 급증이 대도시의 문제였다면 메인 주의 어느 바닷가 마을은 정반대의 상황과 직면했다. 인구밀도는 낮아지고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높아져만 간다. 산업화는 다른 세계 이야기인 듯 이들이 사는 세계는 어업 등 일차 산업이 우선시되는 사회이다. 이곳 사람들은 가끔 무모할 정도로 열린 관계를 유지하며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한 이치인 듯이.

소설을 보고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본토의 가장자리에서 평균율을 욕망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의 태도였다. 자신이 태어나 뿌리내린 사회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21세기엔 특히—드물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구전되는 성공담이나 그 밖의 여러 미디어 들에서 우리는 중앙을 욕망하는 법을 학습하며 자신을 이루는 변두리를 탈피하고자 발버둥 치곤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한 이치인 듯이, 우리는 욕망한다.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어디론가 떠나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각이 우리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 시대의 꿈이 될 수 있다. 서울 아닌 곳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서울을 욕망하지 않고 살아낼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어느 시대에든 속할 수 있는” 진실은 과연 우리 시대에 필요한 기조이나, 그것은 우리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에 혼란스럽다. 소설의 화자처럼 여행자의 신분으로는—돌아갈 인프라가 있다는 안도감 덕분에—편리하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불편함과 사람 지옥에 가려 차마 ‘밝은 눈으로 자기 고장의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이 보이는—과거에는 명명백백히 실존했을—공동체적 이상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작용한다. 홀로 섬에 자신을 세계로부터 가둬버린 ‘조애나’를 둘러싼 바닷가 마을 공동체의 태도를 보면 곧잘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있다. ‘조애나’는 과하다고 여겨질 만큼 자신을 종교적으로 억압한 인물이다. 그러나 여린 심정의 그가 격변의 시대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익숙지 마지않던 세상으로부터 등 돌린 채 섬의 몸체에 귀속된 한 여성의 ‘참을 수 없는 슬픔’은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존중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명징해서 마을 사람들의 “완전한 이타”가 나에게도 참으로 소중하다고 느껴졌다.

‘조애나’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세상으로 재귀하도록 강제했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를 새까맣게 잊을 수도 있었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며 늘 그를 걱정했다. 이것을 지나친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멀리서나마 그의 안녕을 확인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모두가 한뜻처럼 그를 기억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소설이 말하는 “완전한 이타”는 중요하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끝끝내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이해가 안 되는 현상으로 불편한 세계가 너무도 불편해서 살 수 없지만…… 가끔은 소설 속 공동체와 이름 없는 주인공처럼 ‘나 없는 타인’을 묵묵히 바라보는 보거나 그러한 세계를 가끔 꿈꾸는 것도 좋겠다. 불편함을 끌어안는 게 아닌 인정하는 것. 뾰족한 전나무의 땅 같은, 나와 당신을 돌보는 안녕을 위한 세계를.




*휴머니스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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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편지교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최혜수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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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도서협찬 #도서지원 #도서제공


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은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뭐랄까. 조금 꺼려지지만 읽게 되는 사람이다. 어린 소년이 가출을 하거나 엇나가거나 공간과 관계를 파괴하는 서사는 미시마 유키오스러운데 이 시대 일본 남성 작가들의 대체적인 경향처럼 읽히기도 했다. 자아를 방만하게 풀어헤치거나 자조하며 현실을 씁쓸히 비웃는 듯한 태도가 그렇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궁금해하는 독자지만 미시마 유키오란 인간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어서(그가 다자이 오사무를 혐오한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를 읽는 일이 있을 때 종종 마음이 힘들었다.

그런데도 또 미시마 유키오를 읽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그의 다른 도서를 빌리기까지 했다. 생각하건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반복할수록 더럽고 이상하지만 은근히 바라보게 되는 수상쩍은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소설은 오직 한 가지에 이끌려 읽기를 결심했다.

'종이의 밀실'에서 벌어지는 연애 소동극!'

등장인물 소개문에도 실린 내용이며 곱씹을수록 맛있는 단어 조합처럼 느껴졌다. '종이의 밀실'이라니! 편지를 '종이의 밀실'로 표현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처음이라 흥미가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연애담처럼은 보이지 않는 제목까지. 책 소개문을 읽지 않았으면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내용이다. 소설을 모두 읽고 처음부터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확실히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이라기엔 너무 글은 산뜻하며 내용은 분절된 인물들의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기만 하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은 일본 문학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소설의 한 갈래인데 라이트 노벨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심풀이로 빠르게 읽어 나갈 수 있는 분량의 소설 정도의 느낌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편지교실』도 비슷한 면에서 엔터테인먼트적 정체성을 간직한 소설인데 이 소설의 특징이 조금 재미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왔다 갔다 하는 다중 인물들의 편지로만 구성된 소설이라는 점이 그렇다. 처음에는 누가 누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 멘털이 정상으로 표상되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기에 이입이 힘들었는데, 이리도 뒤죽박죽인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사랑을 구성하는 모습이 결국에는 하나의 사적인 그림으로 완성됨으로써 그들만의 유머와 재미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에는 4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있다.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수완 좋은 마담 '마마코'와 그의 절친한 의류 디자이너 친구 '야마'가 한 쌍으로 서브플롯을 이룬다. 다음으로는 젊고 당차며 아름다운 아가씨 '미쓰코'와 그를 사랑하는 젊은 혁명가 연출 꿈나무 '다케루'가 한 쌍으로 또 다른 서브블롯을 이룬다. 추가로 이들 사이에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인물인 엉뚱 발랄 '도라이치'가 있다. 인물 설명을 하기에는 이만큼 정확한 말이 없이란 생각이 드는데…… 나의 언어에 조금이라도 차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면 그건 원작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 대체로 미시마 유키오는 여성의 관능적인 몸과 미모를 바람직한 '여성성'으로 규정하는 묘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다시 인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들은 모두 아는 사이다. 친교의 깊이는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한 우리에 갇힌 듯 함께 소설이라는 공간을 점유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쓰며 마음을 고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인물-남녀노소를 불문하고-을 모함하거나 이간질하는 듯한 편지를 쓰며 관계를 망치려들 때도 있는데 좌우지간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복잡함이 있는 소설이다. 이들은 오로지 편지로만 사유하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서-3인칭의 관점에서라는 뜻이다-형세를 살피거나 감정을 '전지적으로' 파악하기에는 힘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분절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소설이 재미있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지는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아낸 것처럼 빠져드는 구석이 있는 연애 소동극이었다. 전술했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정상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더욱 엔터테인먼트적으로 감상하게 된 것도 같다. '멘헤라'와 '얀데레' 사이(?) 글쎄. 정석적이고 심도 있게 묘사한 인물들은 아니고 다소 연극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인물들의 무대(종이의 밀실)라 이질적인 재미를 느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호노오 다케루'라는 젊은 남성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미시마 유키오의 자아가 가장 대표적으로 반영된 인물이라 그럴 것이다-물론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작가 본인이 투영된 듯한 흔적을 이것저것 발견할 수 있다. 오해는 하면 안 될 것이,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그가 젊음을 투영한 '호노오 다케루'라는 인물이 보이는 영화적 매력이 소설에서 유독 특별하게 비쳤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들.

"무대 위에서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어린 대나무 같은 자네의 모습, 얌전히 가르마를 탄 머리가 이마로 축 늘어지는 관능적인 모양새, 긴 다리에 몹시 더러워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점, 심지어 자네가 무대 끝에 서서 조명 담당과 이야기하며 웃을 때 보이는 흰 이…… 나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일하는 젊은이의 지적이면서도 씩씩한 모습에 이렇게 감동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59페이지. '동성에 대한 사랑 고백' 부문에서.

"연극 청년이고 하이칼라처럼 생겨서 하이칼라 복장을 하고 진보적인 연극론 같은 걸 도도히 펼치며 살아도, 그 청년의 본성은 어수룩한 촌놈이어서 (…) 거기에 그 청년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언밸런스한 귀여움이 있어요."

191페이지. '음모를 털어놓는 편지' 부문에서.


첫 번째 인용은 극단에서 일하는 연출가 지망생 '다케루'에게 유명한 조연 배우인 남성이 자신의 연모를 전달한 편지이다. 이 남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내가 집중하고 싶었던 부분은 그가 '다케루'를 묘사한 언어였다. 특히 "어린 대나무 같은" 모습이라는 묘사를 읽고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이렇게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묘사라니. 나는 이 대목과 더불어 두 번째 인용에서 묘사된 그의 성격적 묘사(from '마마코')을 읽고 나서 '다케루'라는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명징하게 와닿는 서술이었는데 이것이 편지라는 매체로 전달되었기에 묘사와 진술의 경계를 아무렇게나 뭉개는 듯한 매력이 있어서 좋았다. 참고로 나는 '다케루'라는 캐릭터의 묘사를 보고 실존하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바로 젊은 시절의 '사카모토 류이치'다. 그분께는 악의가 없지만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이라는 영화를 본 독자라면 단박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것이다.

'다케루'를 제외하고도 재미있는 인물이 많았지만 그다음으로는 '도라이치'가 흥미로웠다. '도라이치'는 뭐랄까. 되게 감초 같은 인물이라서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사 구조만 보아도 '도라이치'는 꽤 중요한 전달자로서 등장하며 어쩌면 '도라이치'는 분절된 서사를 잇는 매개로 상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라이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엄청난 식탐을 제외하고선 별다른 성애적 욕망도 없으며 무엇보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인물이다. 이기적이지도 않고 마음을 철저히 숨기는 법도 모르며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를 망치고 싶어 하는 심리 따윈 가지지 않는 인물이다. 다른 말로는 조금 깨끗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케루'가 상남자(?)라고 생각했기에 '다케루'의 깨끗함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이 유독 '도라이치'에게만 진실한 마음을 담은-조금은 실토하는 듯한-편지를 쓰곤 하는데 이 역시 '도라이치'는 개의치 않아 한다. 단지 음식과 컬러텔레비전을 미련할 정도로 좋아하는 조금 넋이 나간 나르시시스트일 뿐. 실제로 '야마'는 '도라이치'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은 정말 쓰레기통 같은 사람입니다. 무언가 불쾌한 일이 생기면 꼭 당신의 살찌고 별로 똑똑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저도 모르게 떠올립니다. (…) 이 사람이라면 나의 어떤 창피를 드러내 보여도 딱히 프라이드에 상처가 안 될 거라며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비웃음을 사는 존재여도 비웃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239페이지. '가정의 분란에 대해 푸념하는 편지' 부문에서.


이 말은 곧 그 자신은 비웃는 존재라는 뜻일 테다. 생각건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모두 솔직하지 않아서 문제를 빚은 인물이다. '도라이치'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이들은 어떤 일도 종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비웃기를 즐기나 자신이 비웃음 사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런 미숙함이 외려 소설의 서사를 만들었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고 있고 사람이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일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당신이 쓰는 편지에는 생생한 힘이 갖추어지고 타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68~269페이지. '작가가 독자에게 쓴 편지'


미시마 유키오 치고는 따스한 조언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에 와서야 독자는 이 소설의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표지 속 인물들의 눈빛을 눈여겨보라. 작가는 '종이의 밀실' 바깥으로 줄줄 흘러넘치는 '생생한 마음'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우리에게 설파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것. 문자(매체)가 막지 않는 한 진실한 마음은 전달되어야 한다고. 바깥 세계로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때, 세계의 무관심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때, 나의 편지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의 무심하리만큼 올곧은 글자들이 어쩌면 타인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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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트 : 음식으로 본 나의 삶
스탠리 투치 지음, 이리나 옮김 / 이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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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감정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단순한 '기호'도 음식 앞에서는 아주 중요한 감정으로 작용한다. 어릴 때부터 체질이 허약한 편인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규칙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더 힘들게 되었다. 사실 그게 가장 문제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은 음식에 관한 미련은 별로 없다. 가리는 게 특별히 있진 않지만 남들만큼 적당히 먹지 못할 때도 많다. 음식을 잘 먹는 것도 복이고 음식을 잘 소화하는 능력도 타고난 복이라던데 걸핏하면 입맛이며 소화 기능이 뚝 떨어지는 내 몸은 사용하기에 꽤 불편한 몸인 것 같다.

스탠리 투치의 『테이스트: 음식으로 본 나의 삶』(2024)을 읽는 때에도 몸이 좋지 않았다. 연말부터 몸이 고장 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지금도 체한 몸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투치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좀 낙관적인 편이었다. 음식 사진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음식을 읽고 있는 듯 느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국적인 음식들이-정확히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너무 궁금했다. 먹을 것을 궁금해 보기로서는 꽤 오랜만의 일이라…. 투치의 글이 하나의 체험처럼 여겨진 듯싶다.


음식 에세이는 처음 접해봤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내가 음식 이야기에 집중하게 될 줄도 몰랐기에 더욱 놀라운 책이었다. 투치의 글은 안정적이고 간혹 불규칙한 언어에서 진심을 드러내곤 했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스탠리 투치가 그의 삶을 음식에 관한 추억으로 재배열한 에세이다. 일반적인 에세이였다면 시큰둥했을 남의 이야기지만 '음식'이 삶의 보람으로 기능하는 에세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내가 음식에 얼마나 관심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다. 이 책은 투치가 자신의 삶에 음식이 얼마나 지배적이었는지 말하는 아주 '고집스러운'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음식은 감정이고 우리는 음식을 기억할 때 감정을 떠올린다. 음식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맛을 기억한다기보다 함께한 사람이나 공간의 분위기 따위를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다. 공간을 사람으로 부를 수 있듯이 음식은 그것 자체로 감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음식을 먹는지, 어떤 사람과 함께 식사를 했는지, 조리 과정은 어땠는지, 완성된 음식의 맛과 향은 어떠했는지 등 그 음식에 관한 다양한 체험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기억하는 음식은 달라진다.

『테이스트: 음식으로 본 나의 삶』이 좋았던 이유는 투치의 글을 읽으며 회고한 (비교적 건강했던 시절의) 달콤한 맛이었다. 투치의 글은 유머로 넘쳐나고 때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파스타 면을 반으로 쪼개 삶는 사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탈리아인을 유튜브서 본 적 있는데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투치는 그것을 '밈'처럼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파스타 면을 끊어 먹는 사람은 소스라치게 혐오하지만-그는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표현했다-파스타 면을 반으로 쪼개 다른 레시피에 활용하는 건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인간성을 보여주었으니까. 조금은 비합리적이고 제멋대로 보이긴 해도 오히려 이런 모습이 음식에 관한 그의 이해가 높음의 반증이라 생각했다.

줄리아 차일드와 키스 플로이드에 관해 이야기할 때 투치의 글은 좀 더 흥미로웠다. 연기자에게 사람들은 연기의 본연보다 일상적인 모습을 기대하는 것처럼 음식을 다룬 영화나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는 그 음식을 먹는 인물과 '연결됨'을 느낀다고 투치는 자신의 깨달음을 썼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우리가 '먹방'을 보는 심리와 닮았다. 음식을 다루지만 음식을 즐기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요리를 좋아한다면 레시피를 따라 해 보고 싶을 테고 나처럼 요리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은 그 음식의 맛을 가늠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음식이란 존재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요물처럼 느껴진다. 그것의 물성인 '먹고 먹힘'이라는 행위가 없어도 사람들을 결속하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한편 '흑백 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이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걸 보면 투치의 직관이 유의미하다고 느껴진다. 해당 프로그램은 범박하게 말하자면 그저 경쟁 요리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여기에 빠진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중독된 것처럼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아마도 투치가 말한 것처럼 시청자들이 바라는 욕망을 잘 알았기 때문이리라. 음식에 관한 한국인의 진심은-이런 점은 이탈리아인과 한국인의 닮은 점 같다-물론 유수의 셰프들이 서로 경쟁하며 내놓는 음식들을 보는 재미가 짜릿하고 매력적이었을 테다. 보는 만큼 맛이 있을지 심사 위원의 반응 따위도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음식은 누군가가 견고히 쌓아 올린 세계이자 감정이다. 입으로 체험되는 모든 감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투치가 쓴 것처럼 "요리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먹고 마시고 음식을 나누고 원하는 만큼 반복" 하는 체험을 입의 감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간소하게는 음식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이 책에 등장한 많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볼 수는 없겠지만 나는 투치의 글을 읽는 내내 요리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느꼈던 것 같다. 스키아치타,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데블스 온 호스백, 라클레트, 피초케리 등… 내가 읽은 투치의 '맛있는 삶'은 신선하고 건강한 또 하나의 체험이었다-피초케리는 정말로 현지에서 먹어 보고 싶은 음식이다.

연말연초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 몸 상태와는 달리 스탠리 투치의 『테이스트: 음식으로 본 나의 삶』 든든한 한상차림처럼 행복한 읽기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간단한 파스타 레시피 정도는 따라 해 보고 싶다.

해당 게시물은 '이콘'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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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도 새소설 18
김엄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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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 소설가의 작품은 할도(2024)가 처음이었다. 작가 이력을 살피며 나는 김엄지 소설가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기가 잔뜩 드러난 언어로 표현해온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번에 그의 신작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전의 내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이다. ‘할도라는 공간은 온라인 서점에 실린 소개문 말마따나 괴상한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름도 없는 소설 속 주인공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미루어볼 때-물론 그에 관한 정보는 아주 한정적이다.-이 소설은 평범한 사람이 낯선 세계로 이탈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단순한 형태의 서사다.

다만 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상당히 낯선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 자체가 낯설다기보다는 형식이 보이는 냉소가 그 원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평범한 모험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모험으로 해석하기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게 소설의 특징이다. 그래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할도라는 공간은 과연 존재하는가? ‘의 아버지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그는 어떤 이유로 할도라는 흐릿한 섬으로 보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독자는 답할 수 없다. ‘의 아버지는 그를 섬으로 내모는 인물이었을 뿐.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정확히 찾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인 에 관한 정보 역시 독자는 구체적으로 체득할 수 없다. 간접적인 묘사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평범했고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 독자는 가 목적도 삶도 없는 유령처럼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며 실제로 섬에 이 이상의 인물이 살고 있다고 믿어지지도 않는다. ‘할도는 소설에서 충동의 공간으로 줄곧 묘사되는데 이것은 의 아버지의 말처럼 극복되거나 극복되지 않는” ‘의 생을 결정지을(수도 있는) 주요한 공간인 셈이다. ‘할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바다를 보거나 횟집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숙소에 있거나 술집에 가는 일이 전부다. 하지만 이런 일과에서 는 미약한 변화를 느낀다. 아주 냉소적으로. 섬을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는 섬을 떠날 수도 있는 가 된 것이다.

흔히 아는 것처럼, 살아 있는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욕망을 설정하는 게 우선된다. 욕망은 충동하는 마음이고 그것은 곧 서사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할도는 어쩌면 의 심리적인 가상 공간일 수도 있으리라. 사실 소설을 완독하고서도 할도가 실제로 소설 내부에서 존재했던 섬인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믿었다고 한들 명확히 규명되는 실체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의 목적 없는 삶이-왜 발생했는지는 몰라도-‘으로 기울었으면 한다는 바람만 되새겨질 뿐이었다.

소설은 완전한 문단 형식을 취한, 즉 전통적인 의미의 구조화를 거친 문단이 드문 편이었다. 실험적이라는 표현은 부족한 듯하며, 따지자면 의 형식을 취한 느낌도 들었다. ‘의 냉소가 형식에서 비롯됨이 적절하다고 느껴졌던 까닭은 주로 의 서술적 발화들이-정제돼 있으나-매우 충동적이며 불규칙하게 분절된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로 충동적인 비유나 묘사가 그랬다.

 

"나보다 다래끼가 더 자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나라기보다 다래끼를 위한 이동 수단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달고 있는,

도구를 위한 도구."(p.62)

 

한편 의문형 종결어미를 취하는 문장이 많았다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해야 정말로 웃긴 일이 생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하늘일까.” 들이 그랬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갈등이 일어나진 않지만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가령 술집 여주인이 가게를 찾은 단골들에게 각각 작은 은색 초를 나누어주고 손님들과 함께 소원을 빈 뒤 초를 케이크에 꽂는 장면. ‘를 포함해 모두가 익명이던 단골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별것 아닌 비밀처럼 돌아가며 내뱉던 장면. 서쪽 절벽을 향해 걷던 중 이름 모를 노인이 에게 이름 모를 꽃을 건네던 장면…….

그리고 의 생을 향한 충동. 냉소적인 형식 사이를 타고 흐르며 은근하게 존재감을 비추던 어떤 욕망.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여자에게 서쪽 절벽에 같이 오르는 건 어떤지, 묻고 싶었다. 내가 본 것을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뺨이 베인다는 비를 여자와 맞고 싶기도 했다. 나는 여자의 뺨에 면도날 같은 비가 닿지 않게 할 것이다. 여자가 추워한다면, 거기에서는 내가 입은 것을 벗어줄 것이었다.

지나가는 충동이었다."(p.122)

 

생을 베어내는 감각. 고름과 함께 뭉쳐 쓰러지는 무기명의 슬픔을 아는 독자라면 김엄지 소설가의 할도를 흥미롭게 읽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끝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유일한 위로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끝이 없다."(p.132)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자음과모음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쓰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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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온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4
정다연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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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를 향한 사랑



정​
다연 시인의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2019)를 읽었을 때는 내가 이미 시집의 물성에 익숙해 마지않은 때였다. 그때는 하루에 세 권씩 시집을 읽었고 한 해에 100권에 달하는 시집을 찾았을 때였다. 탐독의 경험은 나에게 큰 이득을 안겨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은 시집들이 모두 효용적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시집의 문제라기보단 나의 문제였다. 기술적인 부분에 치중해 시를 온전히 읽은 적이 있긴 했는지……솔직히 확답할 수 없다.

정다연 시인의 첫 시집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긴 좋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좋았는지 설명할 겨를도 없이 다른 시집을 읽었다. 겨우 떠올린 인상은 ‘따뜻해서 좋았다’ 뿐.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따뜻해서 좋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시인의 에세이를 읽어보기로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급하지 않은 때에-그러니까 지금-다시 읽은 시인의 시적 산문이 나에게 어떤 감각을 일깨워줄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시 읽은 시인의 문장은 두말할 것 없이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시인의 에세이를 읽어보기로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급하지 않은 때에-그러니까 지금-다시 읽은 시인의 시적 산문이 나에게 어떤 감각을 일깨워줄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시 읽은 시인의 문장은 두말할 것 없이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시인의 이름을 자꾸만 거꾸로 발음하게 된다. 정다연. 다정. 다정함. 그런데 희미하게 스러지다가도 다시 생명력을 보이는 다정. 아주 따뜻했다. 일상의 사랑을 자기 삶의 원동력으로 해석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온정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었고 삶은 출생 이후의 비관이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른 삶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시인은 오래된 누군가를 만나고 그리워하고 때로는 사람 아닌 현상을 그리워한다. 얼굴의 틀을 하지 않은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면서 행복을 찾는다. 잘은 모르겠지만……사랑의 이해에 밝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내처 머릿속에 잠자코 앉아 있다. 이렇게 잘 읽히는 에세이. 이렇게 평범한 사랑을 담은 에세이. 나는 읽으면서 행복했지만 그러다가 슬퍼졌다. 잠깐씩.

“시인은 어딘가 슬픈 사람”이라고 시인의 지인이 말했다는 내용이 에세이에 등장한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다. 슬픈 사람은, 사람이라서 슬픈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시를 쓰지만 그건 내가 슬픈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슬픈 사람이라서 더 잘 보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믿고 싶은 것을 그대로 읽기로 했다.

시인들의 에세이는 좀 어려워서 재미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 에세이는 술술 잘 읽혀서 더 어려웠다. 나와 조금 가깝다고 생각되는 (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괄호)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한 건 설명할 수 없는 이 (괄호)가 나에게 사뭇 확실한 감각을 일깨워줬다는 점이다. 특히 시인이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였다. 오빠와 처음 간 패키지 유럽 여행, 딸과 엄마의 잠정적 동거……. 그리고 에세이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반려견 ‘밤이’까지. 가족이란 성질은 사회적이되 유별나게 존재하는 특징을 가져서 유달리 어렵게 읽혔다. 정확히는 ‘느리게’ 읽혔다. 물리적으로는 빠르게 읽었지만. 마음으로 쉽게 떠나보낼 수 없는 문장들. 발을 떼기 힘든 산책길 속 풍경처럼.

그동안은 에세이를 잘 읽어버릇하지 않아서 몰랐지만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에세이는 뭐랄까, 삶의 다른 발목을 보는 느낌이었고 또……모르는 이야기로 내 삶의 낯섦을 밝히는 신기로운 느낌이었다. 나와는 아주 딴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순적으로 시인의 문장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건 정말, 정말 낯설다. 가볍고 산뜻한 에세이가 아니었다면 알아도 모른 채 살았을 어떤 감각을 운 좋게 껴안은 읽기였다.

시인이 중학교에서 시 창작 교실을 열었던 경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자고 싶다는 아이. 공부가 아닌 덜 풀린 고민 때문에 잠드는 아이. 오래 기억하게 될 문장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어른이 내가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어쩌면 영원히-해왔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만하고 싶고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어떤 슬픔에서 쏟아진 감각인 줄 알기에 이 글은 나와 성질이 다른 이란성쌍둥이처럼 읽혔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간결하고 산뜻한 문장으로 내면의 온기를 바라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에세이를 추천하고 싶다.



“언니, 요즘 나는 먼 미래를 생각해. 그러면 어떤 건 시간으로부터 지켜낼 자신이 없더라고. 그런데 언니를 생각하면 시간이 비껴가더라. 어떤 사람이 길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부딪히지 않으려고 살짝 돌아가는 것처럼. 옅은 바람이 나무를 관통하지 않고 모든 가장자리를 건드리며 지나가는 것처럼. 언니가 그대로 있더라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소망이 아니라 또렷하게 감각되는 예감이.”

p.256


나에게도 지켜지는 나무가 있었다면. 있다면 내가 알 수 있기를. 좀 더 빨리 사랑할 수 있기를. 오늘은 단 한 번이고 하나밖에 없는 하루를 미래의 내가 용서할 수 있기를. 시인의 경험처럼, “지나치게 평범한 나의 일상을 사랑이 대단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현대문학'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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