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스트 : 음식으로 본 나의 삶
스탠리 투치 지음, 이리나 옮김 / 이콘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은 감정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단순한 '기호'도 음식 앞에서는 아주 중요한 감정으로 작용한다. 어릴 때부터 체질이 허약한 편인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규칙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더 힘들게 되었다. 사실 그게 가장 문제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은 음식에 관한 미련은 별로 없다. 가리는 게 특별히 있진 않지만 남들만큼 적당히 먹지 못할 때도 많다. 음식을 잘 먹는 것도 복이고 음식을 잘 소화하는 능력도 타고난 복이라던데 걸핏하면 입맛이며 소화 기능이 뚝 떨어지는 내 몸은 사용하기에 꽤 불편한 몸인 것 같다.

스탠리 투치의 『테이스트: 음식으로 본 나의 삶』(2024)을 읽는 때에도 몸이 좋지 않았다. 연말부터 몸이 고장 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지금도 체한 몸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투치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좀 낙관적인 편이었다. 음식 사진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음식을 읽고 있는 듯 느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국적인 음식들이-정확히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너무 궁금했다. 먹을 것을 궁금해 보기로서는 꽤 오랜만의 일이라…. 투치의 글이 하나의 체험처럼 여겨진 듯싶다.


음식 에세이는 처음 접해봤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내가 음식 이야기에 집중하게 될 줄도 몰랐기에 더욱 놀라운 책이었다. 투치의 글은 안정적이고 간혹 불규칙한 언어에서 진심을 드러내곤 했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스탠리 투치가 그의 삶을 음식에 관한 추억으로 재배열한 에세이다. 일반적인 에세이였다면 시큰둥했을 남의 이야기지만 '음식'이 삶의 보람으로 기능하는 에세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내가 음식에 얼마나 관심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다. 이 책은 투치가 자신의 삶에 음식이 얼마나 지배적이었는지 말하는 아주 '고집스러운'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음식은 감정이고 우리는 음식을 기억할 때 감정을 떠올린다. 음식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맛을 기억한다기보다 함께한 사람이나 공간의 분위기 따위를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다. 공간을 사람으로 부를 수 있듯이 음식은 그것 자체로 감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음식을 먹는지, 어떤 사람과 함께 식사를 했는지, 조리 과정은 어땠는지, 완성된 음식의 맛과 향은 어떠했는지 등 그 음식에 관한 다양한 체험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기억하는 음식은 달라진다.

『테이스트: 음식으로 본 나의 삶』이 좋았던 이유는 투치의 글을 읽으며 회고한 (비교적 건강했던 시절의) 달콤한 맛이었다. 투치의 글은 유머로 넘쳐나고 때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파스타 면을 반으로 쪼개 삶는 사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탈리아인을 유튜브서 본 적 있는데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투치는 그것을 '밈'처럼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파스타 면을 끊어 먹는 사람은 소스라치게 혐오하지만-그는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표현했다-파스타 면을 반으로 쪼개 다른 레시피에 활용하는 건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인간성을 보여주었으니까. 조금은 비합리적이고 제멋대로 보이긴 해도 오히려 이런 모습이 음식에 관한 그의 이해가 높음의 반증이라 생각했다.

줄리아 차일드와 키스 플로이드에 관해 이야기할 때 투치의 글은 좀 더 흥미로웠다. 연기자에게 사람들은 연기의 본연보다 일상적인 모습을 기대하는 것처럼 음식을 다룬 영화나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는 그 음식을 먹는 인물과 '연결됨'을 느낀다고 투치는 자신의 깨달음을 썼다. 일종의 대리 만족인 셈이다. 우리가 '먹방'을 보는 심리와 닮았다. 음식을 다루지만 음식을 즐기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요리를 좋아한다면 레시피를 따라 해 보고 싶을 테고 나처럼 요리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은 그 음식의 맛을 가늠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음식이란 존재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요물처럼 느껴진다. 그것의 물성인 '먹고 먹힘'이라는 행위가 없어도 사람들을 결속하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한편 '흑백 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이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걸 보면 투치의 직관이 유의미하다고 느껴진다. 해당 프로그램은 범박하게 말하자면 그저 경쟁 요리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여기에 빠진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중독된 것처럼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아마도 투치가 말한 것처럼 시청자들이 바라는 욕망을 잘 알았기 때문이리라. 음식에 관한 한국인의 진심은-이런 점은 이탈리아인과 한국인의 닮은 점 같다-물론 유수의 셰프들이 서로 경쟁하며 내놓는 음식들을 보는 재미가 짜릿하고 매력적이었을 테다. 보는 만큼 맛이 있을지 심사 위원의 반응 따위도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음식은 누군가가 견고히 쌓아 올린 세계이자 감정이다. 입으로 체험되는 모든 감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투치가 쓴 것처럼 "요리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먹고 마시고 음식을 나누고 원하는 만큼 반복" 하는 체험을 입의 감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간소하게는 음식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이 책에 등장한 많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볼 수는 없겠지만 나는 투치의 글을 읽는 내내 요리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느꼈던 것 같다. 스키아치타,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데블스 온 호스백, 라클레트, 피초케리 등… 내가 읽은 투치의 '맛있는 삶'은 신선하고 건강한 또 하나의 체험이었다-피초케리는 정말로 현지에서 먹어 보고 싶은 음식이다.

연말연초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 몸 상태와는 달리 스탠리 투치의 『테이스트: 음식으로 본 나의 삶』 든든한 한상차림처럼 행복한 읽기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간단한 파스타 레시피 정도는 따라 해 보고 싶다.

해당 게시물은 '이콘'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