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도 새소설 18
김엄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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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 소설가의 작품은 할도(2024)가 처음이었다. 작가 이력을 살피며 나는 김엄지 소설가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기가 잔뜩 드러난 언어로 표현해온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번에 그의 신작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전의 내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이다. ‘할도라는 공간은 온라인 서점에 실린 소개문 말마따나 괴상한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름도 없는 소설 속 주인공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미루어볼 때-물론 그에 관한 정보는 아주 한정적이다.-이 소설은 평범한 사람이 낯선 세계로 이탈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단순한 형태의 서사다.

다만 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상당히 낯선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 자체가 낯설다기보다는 형식이 보이는 냉소가 그 원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평범한 모험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모험으로 해석하기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게 소설의 특징이다. 그래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할도라는 공간은 과연 존재하는가? ‘의 아버지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그는 어떤 이유로 할도라는 흐릿한 섬으로 보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독자는 답할 수 없다. ‘의 아버지는 그를 섬으로 내모는 인물이었을 뿐.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정확히 찾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인 에 관한 정보 역시 독자는 구체적으로 체득할 수 없다. 간접적인 묘사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평범했고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 독자는 가 목적도 삶도 없는 유령처럼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며 실제로 섬에 이 이상의 인물이 살고 있다고 믿어지지도 않는다. ‘할도는 소설에서 충동의 공간으로 줄곧 묘사되는데 이것은 의 아버지의 말처럼 극복되거나 극복되지 않는” ‘의 생을 결정지을(수도 있는) 주요한 공간인 셈이다. ‘할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바다를 보거나 횟집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숙소에 있거나 술집에 가는 일이 전부다. 하지만 이런 일과에서 는 미약한 변화를 느낀다. 아주 냉소적으로. 섬을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는 섬을 떠날 수도 있는 가 된 것이다.

흔히 아는 것처럼, 살아 있는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욕망을 설정하는 게 우선된다. 욕망은 충동하는 마음이고 그것은 곧 서사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할도는 어쩌면 의 심리적인 가상 공간일 수도 있으리라. 사실 소설을 완독하고서도 할도가 실제로 소설 내부에서 존재했던 섬인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믿었다고 한들 명확히 규명되는 실체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의 목적 없는 삶이-왜 발생했는지는 몰라도-‘으로 기울었으면 한다는 바람만 되새겨질 뿐이었다.

소설은 완전한 문단 형식을 취한, 즉 전통적인 의미의 구조화를 거친 문단이 드문 편이었다. 실험적이라는 표현은 부족한 듯하며, 따지자면 의 형식을 취한 느낌도 들었다. ‘의 냉소가 형식에서 비롯됨이 적절하다고 느껴졌던 까닭은 주로 의 서술적 발화들이-정제돼 있으나-매우 충동적이며 불규칙하게 분절된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로 충동적인 비유나 묘사가 그랬다.

 

"나보다 다래끼가 더 자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나라기보다 다래끼를 위한 이동 수단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달고 있는,

도구를 위한 도구."(p.62)

 

한편 의문형 종결어미를 취하는 문장이 많았다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해야 정말로 웃긴 일이 생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하늘일까.” 들이 그랬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갈등이 일어나진 않지만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가령 술집 여주인이 가게를 찾은 단골들에게 각각 작은 은색 초를 나누어주고 손님들과 함께 소원을 빈 뒤 초를 케이크에 꽂는 장면. ‘를 포함해 모두가 익명이던 단골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별것 아닌 비밀처럼 돌아가며 내뱉던 장면. 서쪽 절벽을 향해 걷던 중 이름 모를 노인이 에게 이름 모를 꽃을 건네던 장면…….

그리고 의 생을 향한 충동. 냉소적인 형식 사이를 타고 흐르며 은근하게 존재감을 비추던 어떤 욕망.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여자에게 서쪽 절벽에 같이 오르는 건 어떤지, 묻고 싶었다. 내가 본 것을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뺨이 베인다는 비를 여자와 맞고 싶기도 했다. 나는 여자의 뺨에 면도날 같은 비가 닿지 않게 할 것이다. 여자가 추워한다면, 거기에서는 내가 입은 것을 벗어줄 것이었다.

지나가는 충동이었다."(p.122)

 

생을 베어내는 감각. 고름과 함께 뭉쳐 쓰러지는 무기명의 슬픔을 아는 독자라면 김엄지 소설가의 할도를 흥미롭게 읽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끝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유일한 위로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끝이 없다."(p.132)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자음과모음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쓰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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