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전나무의 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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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소박한 뉴잉글랜드 메인주 바닷가 마을에 낯선 얼굴이 여름을 보내기 위해 도착한다. 소설은 그가 그곳에 당도한 이후 일어나는 일들을 배경으로 하며, 그는 이곳의 이야기를 관찰하며 향유하는 화자이다.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듯한 화자에 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대도시에서 부양가족 없이 홀로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사는 여성이라는 것뿐이다. 떠들썩하고 복잡한 대도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한적하고 드넓은 자연을 품은 바닷가 마을은 화자가 여름을 보내기 알맞은 곳인 것 같다. 마을의 약초 전문가이자 따스한 성정의 중년 여성 ‘토드 부인’네 방을 빌려 살며 때때로 글을 쓰고 마을을 살피는 게 화자의 일이다.


소설은 화자가 만나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다. 늙은 선장인 ‘리틀페이지’와 수십 년 전의 기인인 ‘조애나’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등 마을에 숨은 이야기에 경청하며 마을을 이해한다. 마냥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종종 그를 놀라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하지만 화자는 마을의 불편한 현실을 제 식대로 ‘수정’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이며 불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인구 급증이 대도시의 문제였다면 메인 주의 어느 바닷가 마을은 정반대의 상황과 직면했다. 인구밀도는 낮아지고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높아져만 간다. 산업화는 다른 세계 이야기인 듯 이들이 사는 세계는 어업 등 일차 산업이 우선시되는 사회이다. 이곳 사람들은 가끔 무모할 정도로 열린 관계를 유지하며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한 이치인 듯이.

소설을 보고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본토의 가장자리에서 평균율을 욕망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의 태도였다. 자신이 태어나 뿌리내린 사회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21세기엔 특히—드물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구전되는 성공담이나 그 밖의 여러 미디어 들에서 우리는 중앙을 욕망하는 법을 학습하며 자신을 이루는 변두리를 탈피하고자 발버둥 치곤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한 이치인 듯이, 우리는 욕망한다.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어디론가 떠나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각이 우리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 시대의 꿈이 될 수 있다. 서울 아닌 곳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서울을 욕망하지 않고 살아낼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어느 시대에든 속할 수 있는” 진실은 과연 우리 시대에 필요한 기조이나, 그것은 우리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에 혼란스럽다. 소설의 화자처럼 여행자의 신분으로는—돌아갈 인프라가 있다는 안도감 덕분에—편리하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불편함과 사람 지옥에 가려 차마 ‘밝은 눈으로 자기 고장의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이 보이는—과거에는 명명백백히 실존했을—공동체적 이상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작용한다. 홀로 섬에 자신을 세계로부터 가둬버린 ‘조애나’를 둘러싼 바닷가 마을 공동체의 태도를 보면 곧잘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있다. ‘조애나’는 과하다고 여겨질 만큼 자신을 종교적으로 억압한 인물이다. 그러나 여린 심정의 그가 격변의 시대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익숙지 마지않던 세상으로부터 등 돌린 채 섬의 몸체에 귀속된 한 여성의 ‘참을 수 없는 슬픔’은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존중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명징해서 마을 사람들의 “완전한 이타”가 나에게도 참으로 소중하다고 느껴졌다.

‘조애나’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세상으로 재귀하도록 강제했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를 새까맣게 잊을 수도 있었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며 늘 그를 걱정했다. 이것을 지나친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멀리서나마 그의 안녕을 확인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모두가 한뜻처럼 그를 기억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소설이 말하는 “완전한 이타”는 중요하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끝끝내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이해가 안 되는 현상으로 불편한 세계가 너무도 불편해서 살 수 없지만…… 가끔은 소설 속 공동체와 이름 없는 주인공처럼 ‘나 없는 타인’을 묵묵히 바라보는 보거나 그러한 세계를 가끔 꿈꾸는 것도 좋겠다. 불편함을 끌어안는 게 아닌 인정하는 것. 뾰족한 전나무의 땅 같은, 나와 당신을 돌보는 안녕을 위한 세계를.




*휴머니스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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