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의 편지교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최혜수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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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은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뭐랄까. 조금 꺼려지지만 읽게 되는 사람이다. 어린 소년이 가출을 하거나 엇나가거나 공간과 관계를 파괴하는 서사는 미시마 유키오스러운데 이 시대 일본 남성 작가들의 대체적인 경향처럼 읽히기도 했다. 자아를 방만하게 풀어헤치거나 자조하며 현실을 씁쓸히 비웃는 듯한 태도가 그렇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궁금해하는 독자지만 미시마 유키오란 인간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어서(그가 다자이 오사무를 혐오한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를 읽는 일이 있을 때 종종 마음이 힘들었다.

그런데도 또 미시마 유키오를 읽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그의 다른 도서를 빌리기까지 했다. 생각하건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반복할수록 더럽고 이상하지만 은근히 바라보게 되는 수상쩍은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소설은 오직 한 가지에 이끌려 읽기를 결심했다.

'종이의 밀실'에서 벌어지는 연애 소동극!'

등장인물 소개문에도 실린 내용이며 곱씹을수록 맛있는 단어 조합처럼 느껴졌다. '종이의 밀실'이라니! 편지를 '종이의 밀실'로 표현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처음이라 흥미가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연애담처럼은 보이지 않는 제목까지. 책 소개문을 읽지 않았으면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내용이다. 소설을 모두 읽고 처음부터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확실히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이라기엔 너무 글은 산뜻하며 내용은 분절된 인물들의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기만 하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은 일본 문학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소설의 한 갈래인데 라이트 노벨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심풀이로 빠르게 읽어 나갈 수 있는 분량의 소설 정도의 느낌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편지교실』도 비슷한 면에서 엔터테인먼트적 정체성을 간직한 소설인데 이 소설의 특징이 조금 재미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왔다 갔다 하는 다중 인물들의 편지로만 구성된 소설이라는 점이 그렇다. 처음에는 누가 누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 멘털이 정상으로 표상되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기에 이입이 힘들었는데, 이리도 뒤죽박죽인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사랑을 구성하는 모습이 결국에는 하나의 사적인 그림으로 완성됨으로써 그들만의 유머와 재미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에는 4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있다.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수완 좋은 마담 '마마코'와 그의 절친한 의류 디자이너 친구 '야마'가 한 쌍으로 서브플롯을 이룬다. 다음으로는 젊고 당차며 아름다운 아가씨 '미쓰코'와 그를 사랑하는 젊은 혁명가 연출 꿈나무 '다케루'가 한 쌍으로 또 다른 서브블롯을 이룬다. 추가로 이들 사이에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인물인 엉뚱 발랄 '도라이치'가 있다. 인물 설명을 하기에는 이만큼 정확한 말이 없이란 생각이 드는데…… 나의 언어에 조금이라도 차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면 그건 원작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 대체로 미시마 유키오는 여성의 관능적인 몸과 미모를 바람직한 '여성성'으로 규정하는 묘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다시 인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들은 모두 아는 사이다. 친교의 깊이는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한 우리에 갇힌 듯 함께 소설이라는 공간을 점유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쓰며 마음을 고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인물-남녀노소를 불문하고-을 모함하거나 이간질하는 듯한 편지를 쓰며 관계를 망치려들 때도 있는데 좌우지간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복잡함이 있는 소설이다. 이들은 오로지 편지로만 사유하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서-3인칭의 관점에서라는 뜻이다-형세를 살피거나 감정을 '전지적으로' 파악하기에는 힘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분절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소설이 재미있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지는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아낸 것처럼 빠져드는 구석이 있는 연애 소동극이었다. 전술했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정상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더욱 엔터테인먼트적으로 감상하게 된 것도 같다. '멘헤라'와 '얀데레' 사이(?) 글쎄. 정석적이고 심도 있게 묘사한 인물들은 아니고 다소 연극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인물들의 무대(종이의 밀실)라 이질적인 재미를 느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호노오 다케루'라는 젊은 남성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미시마 유키오의 자아가 가장 대표적으로 반영된 인물이라 그럴 것이다-물론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작가 본인이 투영된 듯한 흔적을 이것저것 발견할 수 있다. 오해는 하면 안 될 것이,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그가 젊음을 투영한 '호노오 다케루'라는 인물이 보이는 영화적 매력이 소설에서 유독 특별하게 비쳤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들.

"무대 위에서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어린 대나무 같은 자네의 모습, 얌전히 가르마를 탄 머리가 이마로 축 늘어지는 관능적인 모양새, 긴 다리에 몹시 더러워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점, 심지어 자네가 무대 끝에 서서 조명 담당과 이야기하며 웃을 때 보이는 흰 이…… 나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일하는 젊은이의 지적이면서도 씩씩한 모습에 이렇게 감동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59페이지. '동성에 대한 사랑 고백' 부문에서.

"연극 청년이고 하이칼라처럼 생겨서 하이칼라 복장을 하고 진보적인 연극론 같은 걸 도도히 펼치며 살아도, 그 청년의 본성은 어수룩한 촌놈이어서 (…) 거기에 그 청년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언밸런스한 귀여움이 있어요."

191페이지. '음모를 털어놓는 편지' 부문에서.


첫 번째 인용은 극단에서 일하는 연출가 지망생 '다케루'에게 유명한 조연 배우인 남성이 자신의 연모를 전달한 편지이다. 이 남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내가 집중하고 싶었던 부분은 그가 '다케루'를 묘사한 언어였다. 특히 "어린 대나무 같은" 모습이라는 묘사를 읽고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이렇게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묘사라니. 나는 이 대목과 더불어 두 번째 인용에서 묘사된 그의 성격적 묘사(from '마마코')을 읽고 나서 '다케루'라는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명징하게 와닿는 서술이었는데 이것이 편지라는 매체로 전달되었기에 묘사와 진술의 경계를 아무렇게나 뭉개는 듯한 매력이 있어서 좋았다. 참고로 나는 '다케루'라는 캐릭터의 묘사를 보고 실존하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바로 젊은 시절의 '사카모토 류이치'다. 그분께는 악의가 없지만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이라는 영화를 본 독자라면 단박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것이다.

'다케루'를 제외하고도 재미있는 인물이 많았지만 그다음으로는 '도라이치'가 흥미로웠다. '도라이치'는 뭐랄까. 되게 감초 같은 인물이라서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사 구조만 보아도 '도라이치'는 꽤 중요한 전달자로서 등장하며 어쩌면 '도라이치'는 분절된 서사를 잇는 매개로 상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라이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엄청난 식탐을 제외하고선 별다른 성애적 욕망도 없으며 무엇보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인물이다. 이기적이지도 않고 마음을 철저히 숨기는 법도 모르며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를 망치고 싶어 하는 심리 따윈 가지지 않는 인물이다. 다른 말로는 조금 깨끗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케루'가 상남자(?)라고 생각했기에 '다케루'의 깨끗함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이 유독 '도라이치'에게만 진실한 마음을 담은-조금은 실토하는 듯한-편지를 쓰곤 하는데 이 역시 '도라이치'는 개의치 않아 한다. 단지 음식과 컬러텔레비전을 미련할 정도로 좋아하는 조금 넋이 나간 나르시시스트일 뿐. 실제로 '야마'는 '도라이치'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은 정말 쓰레기통 같은 사람입니다. 무언가 불쾌한 일이 생기면 꼭 당신의 살찌고 별로 똑똑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저도 모르게 떠올립니다. (…) 이 사람이라면 나의 어떤 창피를 드러내 보여도 딱히 프라이드에 상처가 안 될 거라며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비웃음을 사는 존재여도 비웃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239페이지. '가정의 분란에 대해 푸념하는 편지' 부문에서.


이 말은 곧 그 자신은 비웃는 존재라는 뜻일 테다. 생각건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모두 솔직하지 않아서 문제를 빚은 인물이다. '도라이치'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이들은 어떤 일도 종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비웃기를 즐기나 자신이 비웃음 사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런 미숙함이 외려 소설의 서사를 만들었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고 있고 사람이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일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당신이 쓰는 편지에는 생생한 힘이 갖추어지고 타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68~269페이지. '작가가 독자에게 쓴 편지'


미시마 유키오 치고는 따스한 조언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에 와서야 독자는 이 소설의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표지 속 인물들의 눈빛을 눈여겨보라. 작가는 '종이의 밀실' 바깥으로 줄줄 흘러넘치는 '생생한 마음'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우리에게 설파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것. 문자(매체)가 막지 않는 한 진실한 마음은 전달되어야 한다고. 바깥 세계로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때, 세계의 무관심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때, 나의 편지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의 무심하리만큼 올곧은 글자들이 어쩌면 타인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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