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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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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장의용도 #함윤이첫소설집 #자개장의용도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책추천 #서평단


먼저, 서평에 앞서 한 가지 밝혀야 하는 사실은 내가 이 소설집을 완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총 4편의 단편을 읽었고, 분량으로 환산한다면 약 반 권 정도는 읽은 셈인데, 아무튼 완독하지 못한 채 서평을 쓰려니 출판사에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나의 건강 문제로… 일이 무너진 점이 안타깝다.

소설의 표제작은 가장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일단 표지가 주는 범상치 않은 에너지가 좋았다. (문지에서 출간되는 소설집 중에서는) 다소 화려한 감은 있지만, 물성으로나 내용으로나 보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문지가 발간하는 소설선을 좋아한다.) 게다가 첫 작품집이 나오기 전에 문지문학상에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젊은작가상 그리고 문학동네소설상까지 수상한 함윤이 소설가의 작품이라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소설보다’에서 예소연 작가의 소설과 함께 읽은 적 잇는 작가였고 제목부터 참 좋았는데 이렇게 소설집으로 만날 수 있어 기뻤다.

젊음작가상 수상작인 <자개장의 용도>는 나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이 표제작인 동시에 소설집의 머리를 장식한 연유를 상상해봤는데, 함윤이 소설가의 소설적 발화법이나 상상력 등이 조금 친근한 방식으로 대중과 섞일 수 있는 여지가 가장 큰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결론적으로, 꽤 좋았다. ‘자개장’을 소재로 한 점부터 재밌었는데, 이것을 매개로 상실을 풀이한 점이 텍스트적으로나 서사 전개 방식으로나 환상적이었다.

함윤이 소설가의 이 소설집을 전체 읽어보진 못했으나, 내가 느낀 각 단편들의 공통점은 이렇다. 아주 기초적인 측면에서 과정이 어떻든 소설 속 화자는 종내에는 무언갈 획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감정이든, 감정으로 환원된 구체적 사물이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이 지점은 성장하는 이야기와 닮아있지만, ‘소설이 초점화자를 성장시킬 의무가 있는 문학인가’라고 묻는다면 모호해지긴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마무리가 좋았던 이유는 ‘남겨짐’이 주는 소설 고유의 재미 때문인 것 같다. 자개장에 남겨진 편지, 무대복을 입고 달려가는 여자들 등 장면(이미지)이 선사하는 일종의 확언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외려 서사 과정에 모호함이 가득하고, 미래를 딱히 긍정하지는 않지만, 결말에 들어서 독자에게 ‘남겨진 이미지’를 잊을 수 없어 소설이 애틋해지는 느낌이다.

전형적인 소설성을 탈피하는 특징도 흥미로웠다. ‘실험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친 해석 같고, 소설이라 정의된 관념을 무의식적으로 뜯어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어떠한 성질을 거부하는 느낌? 소설 속 화자들을 보면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우리가 평소에 짐작하던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캐릭터성이 주가 되어, 어찌 보면 사람냄새는 덜 나는데, 다만 공간이나 물질이나 비-인간적(소설에서 주체를 제외한 잉여) 구성에서 나는 쾌와 불쾌 사이의 냄새가 있어서 나는 그게 좋았다.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중시되어 있고, 함부로 친절해지지 않으려는 작가의 (아마도 무의식적) 핸들링(*운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이 흥미진진했다.

여담이지만, 내가 읽은 4편의 소설에는 모두 ‘강’이 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직 해설을 안 읽어서 어떤진 모르겠는데, 이 점도 신기했다. 강의 주변, 강 그 자체, 강의 건너편, 강의 풍경 등 자연물의 세부적 활용도 눈에 띄는 포인트였다.

비몽사몽으로 쓰는 서평이다… 미시적인 감상보다 거시적인 인상에 가까웠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공부하는 느낌(?)으로 쓴 글이기도 하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될 글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심지어 늦었다)

위픽 시리즈로 출간된 <소도둑 성장기> 역시 SNS상에서 뜨거운 소설로 유명하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이 소설집을 만남으로써 함윤이 소설가의 기발표작이 더 궁금해졌고, 앞으로의 작품 활동이 더욱 기대되었다. 소설에서 도망치려는 이런 종류의 독보성이 앞으로 우리 문단에 멈추지 않고 등장하기를. 성공하기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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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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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는 말에는 감정이 있다. 춤을 추거나 웃거나 말하거나 분노할 수 있다. 이서수 소설가의 신작 소설집 『그래도 춤을 추세요』(2025)는 쉽게 답할 수 없는 ‘함께’를 이야기한다. 2020년 제6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의 주인공 『당신의 4분 33초』(2020)으로 작가를 알게 되었고 그 작품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기억은 오래되었지만 소설에 줄곧 등장했던 청년 주인공 ‘이기동’과 아티스트 ‘존 케이지’의 이름은 절대 잊히지 않았다. 암울하고 답답하기까지 한 한 청년의 일대기였는데 이서수 작가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누군가들을 향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이전 소설집인 『젊은 근희의 행진』(2023)도 그러했고 이번 소설집도 마찬가지였다.


여덟 편의 소설이 모두 흥미롭고 따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어달리기」와 「광합성 런치」 그리고 「잘지내고있어」가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청춘 미수」 역시 할 말이 많았던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당신의 4분 33초』에서는 조금 예외적이었으나, 이서수 작가의 글에는 가족과 연대가 주된 서사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주로 엄마, 이모, 고모 등 여성 관계가 두드러지며 남성 친족보다는 여성 친족과의 연대 및 관계가 주된 인물 구도로 제시된다. 이에 더해 가족과 집단에서의 연대가 보이는 유쾌함이 이서수식 소설의 묘미다. 독자를 울리다가도 능청맞게 웃기는 재주가 남다른 소설이 여기 풍부하다.

주변부 인물을 조명하는 태도에서 확고부동한 의지를 내비치지 않아서 좋았다. 이를테면 악의 없는 질문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보통 인간들이 자기 안팎에서 형성하는 갈등의 양상이 그러했다. 손쉽게 사회적 약자를 자신만의 사전에 등재하지 않고 질문하되 답란은 빈 곳으로 남겨두는 게 핵심이었다. 사유하되 정의하지 않고 묵묵히 보통 인간으로서 행위함으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가 매력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그것이라고 느껴졌다.

잘 짜인 이야기들이 밀집되어 등장하는 해당 소설집은 표지 및 장정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상으로 우수한 점이 돋보였다. 선언은 있으나 판단하지 않는 질문들, 그러니까 쉽게 답할 수 없는 ‘함께’를 이서수 작가 자신만의 해석으로 풀이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어달리기」에서 울었고 「춤은 영원하다」에서 깔깔 울었으며 「광합성 런치」에서 부글부글 끓었다가 「잘지내고있어」에서 펑펑 울었다. 마지막에는 「청춘 미수」에서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미수에 그친 청춘이 얼마나 슬프고 또한 진행 가능한 운명인지 청년인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탓이다. 저렴하게 도시의 청춘을 미화하는 누군가가 있고 가만히 쓸려나가는 청춘이 나머지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이 많이 슬펐던 소설이었다. 나에게 이서수 작가라고 하면 ‘청춘’의 아이콘이었는데 마지막에 실린 「청춘 미수」가 그런 기대에 완전히 부합했기 때문이다. 소설집에는 청년부터 중년까지 많은 화자가 등장하지만, 나이대에 따라 사유의 확장성과 태도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조심스러운 인물이 있는가 하면 무방비하게 사회에 노출된 인물도 있었다. 화자를 다른 방식으로 구사하는 점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이 점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배울 만한 지점이라고 느꼈다.

풍부한 자료조사와 시적인 사유, 많은 시선들이 담겼던 좋은 소설집이었다. 문학동네에서 읽은 근간 중에 강보라 소설가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이후로 가장 좋았다. 젊은 화자, 어린 화자, 관리직의 중년 화자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청년일 때 읽기 좋은 소설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 나아질 희망 같은 건 차치하고 ‘지금’과 ‘함께’에 응하는 소설들이다.





해당 리뷰는 문학동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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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으로 날아가는 비행접시
곽재식 지음 / 구픽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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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이번 서평 도서에 관한 기대가 사뭇 컸다. 게다가 짧은 소설집이라니! 시중에는 짧은 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짧은 소설에 한 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곽재식 작가다. 구어체의 말맛을 소설에 퐁듀처럼 쏙 빠뜨렸다가 건져낸 듯한 재미가 압권일 테니.

짧은 소설이라고 하면 흔히 오해를 사기 쉬운데 이는 그것이 가진 물리적인 특색 때문일 것이다. 도톰하지 않단 건 요즘 시대에 환영받기 좋은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작품으로서 온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지 의심하는 독자가 있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짧은 분량만큼 굵직하고 확실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짧은 소설을 잘 써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숙련된 작가들이라고 할지라도 짧은 소설에 특화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선뜻 도전하기 힘든 장르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것을 전문으로 하려면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절대적인 창의력이 필요하단 점에서 특히나 유별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곽재식 작가는 좀 재미있는 소설가이다. 이번에 그의 소설을 읽은 게 처음이라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게 사실이지만! 아이디어가 불꽃처럼 팡팡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건 독자로서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 말로 온전히 풀어내긴 힘들어도 그의 소설에는 무언가 재잘대는 수다스러움이 있었고 나는 이상할 정도로 그런 점에 마음이 끌렸다. 계속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듯 보이고실제로 작가가 얼마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넘칠 대로 넘쳐버린 이야기들이 구어의 벽을 넘어 문어(文語)의 옷에 소낙비를 뿌려대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말하는 그대로가 소설에 쏟아진 듯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으려면 작가로서 상당한 애가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경우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경험은 없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순간만큼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가 떠오르면 귀찮아서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서 못내 부채감을 느끼며 누구도 시키지 않은 글쓰기의 욕망을 없애려고 애를 쓴다. 그냥 써버리면 해결될 문제이긴 하지만…… 대체로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지 않고 품고만 있는 건 소설을 써본 적 있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쓰고 싶어서 쓴다기보다는 입이 너무너무 간질거려서 키보드에 십자 자국을 내는 정도이다.

아무튼 곽재식 작가의 글은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의 평소 사고방식을 부러워하게 되기도 한다. (웃음) 나는 절대 십자가 모양으로 인해서 피폐해지는 외국인 드라큘라를 상상해낼 수 없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파헤친 제2<데스노트>를 쓰는 건 더욱 못한다.

수록된 짧은 소설 중에서는 유독 인간의 아이러니를 그린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비록 전래동화처럼 직접 발화나 서간체로 배경을 지나치게 상술한다는 점은 짧은 소설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으나 대체로 만족할 만한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불행한 멸망 판타지(?)에서 행복을 간구하는 이야기의 태도에 주목했는데 이러한 말하기 방식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의 맛이 독자에게 아주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뜯어보면 잔인하고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킥킥대고 읽다 보면 그래, 그렇지하며 허허 웃게 되는 이야기들이다참고로 나에게는 마지막에 수록된 <이상한 여우 가면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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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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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67회 골드대거상 수상작,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2025)를 읽었다. 범죄소설임을 고려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오랜만에 읽는 장르 소설이 주는 기쁨으로 풍요로운 독서였다.

또 하나 떠오르는 생각이라면 바로 이런 것. 해당 소설을 범죄소설로 일축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구심이 들었는데 그것은 명료한 이유에서였다. 소설은 살인과 풀이에 천착하는 일반적인 범죄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야기 속 인물들의 동선에 집중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에서는 마땅히 바람직하다라고 부를 만한 선악에의 판단이 부재했다. 그렇다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손끝과 발끝을 따라갈 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듯 해당 소설은 인물들의 선택이 중심이 되는 소설이다. 때로는 판단력이 흐려질 때도 있고 그릇된 선택을 범하기도 한다. 나는 독자들의 도덕적 판단 기제를 흩뜨리는 작가의 기술적인 면모가 흥미로웠다. 독자인 우리는 인물들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두고 명징한 도덕적 판단을 제시할 수 없으며 누구도 그들을 나무랄 수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범죄를 저지른 어린 소년과 소녀에 관해서 무언가 확신할 수 없는 우리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을 반추하게 한다. 여기서는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다기보다는 흐려진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여 어떻게 만들어진 세계를 살아가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나쁜 패를 받은사람들의 흉터를 바라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잡한 감정으로 남들과는 다른 유년기를, 그보다 오랜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 사람들을 이해하기에는 소설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실타래가 한 올씩 풀어 헤쳐진 사람들을 직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과정에서 깊은 피곤을 감내해야 하며 그보다는 더한 세계에의 증오를 꾸역꾸역 삼켜내야만 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녀는줄곧 소녀라고 묘사된다자신이 무법자의 피를 물려받은 진정한 무법자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소녀의 삶에는 정해진 정도(正道)가 없다. 이러한 사실이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데…… 소설은 불친절하게도 500여 페이지가 넘는 동안 계속해서 소녀에게 시련만을 가져다준다. 나는 이런 점 때문에 소설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이상이 세워지려고 하면 자꾸만 무너지는 소녀의 세계를 내가 어떻게 안락한 세계에서 만끽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대목은 소녀가 위탁가정에 맡겨진 부분이었다. 자신과 동생을 방치며 자기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위탁 가정의 모습을 관망하며 소녀는 이렇게 느낀다.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플라스틱 조화, 플라스틱 같은 웃음을 짓는 모델 가족의 사진 액자들을 보았다.”

사실 보았다라는 단어로는 온전히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따른 비유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플라스틱 같은 웃음에서 우리는 그것의 차갑고 단단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위탁가정 내부의 화목한 분위기는 이들 남매와 철저히 유리되어 있으며 그것의 온도 차이를 소녀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독자를 힘들게 한다.

소녀는 이상을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상을 상상해봄 직한 세계에 온전히 놓여 있어 본 적 없었기에 소녀는 매우 추상적으로 이상을 말 그대로 이상화할 뿐이다.

이따금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딘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듯, 마치 집이 저기 어딘가에서 자기를 부르지만……

부서진 이상. 부서진 가족. 그것을 유지하려는 모종의 사랑. 사람들은 올바른 이유로 그릇된 행동을범하기도 한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가장자리에서 시작한다. 워커 서장의 말대로 끝은 또 다른 시작이므로. 무법자란 올바른 의도를 위해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하며 또 일을 그르치기도 하지만사방의 끝으로 밀려가는 것그런데도 나아가는(Walk) 존재가 아닐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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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 빌런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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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소득 불평등, 노동조합과 슈퍼 빌런, 그리고 고양이!

이 책을 소개하는 캐치프레이즈이다. 나는 대개 책을 읽기 전 뒤표지에 쓰인 문구를 빠짐없이 읽어 보는 편인데, 그 문구를 보고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빌런’과 ‘고양이’가 함께 붙을 수 있는 단어였나? 그리고 SF에서? 그런가 하면 책과 함께 도착한 기념 수건이 있었으니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썩어 빠진 부르주아!” 돌고래들이 일제히 외쳤다.

자로선 정말이지 황당한 문장 조합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차츰 나는 수건에 쓰인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존 스칼지를 SF의 대가라고 자신 있게 소개했는지,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총명해(?) 보이는 고양이 이미지를 박아 넣었는지 들을.

소설은 아주 음울한 상태로 시작했다. 가족도 직장도 잃은 주인공 ‘찰리’가 이번에는 집도 잃게 생겼다. 집은 아버지의 유산이며 형제들과 공동 소유이나 그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찰리는 그것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직장에서 잘리고 임시 교사 노릇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찰리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동네 펍을 인수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마저 상속 문제로 좌절된다.

그런 찰리에게 유일한 빛은 바로 스트릿 출신 고양이 ‘헤라’이다. 헤라는 흰색에 오렌지빛 털이 섞인 귀여운 고양이인데 종종 바깥을 들락거리며 자유롭게 지낸다. 찰리에게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거의 유일한 가족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찰리는 부자(라고 알려진) 삼촌의 죽음에 관련한 소식을 듣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왕래하지 않았던 ‘그’ 삼촌. 찰리의 결혼 선물로 저주를 퍼부은 ‘그’ 삼촌 말이다.

삼촌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수상한 여인(틸 모리슨)이 집을 찾아와 그에게 집을 상속받게 이끄는 대신 삼촌의 뒷수습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일을 해치워 나갈수록 찰리에게는 더 큰 곤경이 찾아온다. 엄청난 규모의 비밀 기지, 고도의 기술로 무장한 동물 파트너들은 물론 냉혹한 자본주의의 쓴맛까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찰리! 삼촌의 뒤를 이어 슈퍼 빌런 사업을 이어나가며 점차 풀리지 않는 비밀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SF이지만 나로선 이것을 SF로 읽기엔 무리가 있었다. 영웅담이거나 서사시 같은 웅장함도 있었고 영화 시나리오 같은 미스터리한 임박함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복잡했다. 한 사람의 머리에서 영상 매체로는 1시간 30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필요한 세계관이 술술 튀어나오다니. 놀라웠다. 일단 첫인상은 그랬는데 찬찬히 책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의 제목에 관해서 생각했다.

스타터 빌런(Starter Villain)

빌런시작하는 사람

소설이 말하는 ‘빌런’은 의미가 다소 복잡하다. 당장 주인공인 찰리만 해도 그는—대체로 선(善)을 추구하나—순수한 목표의식(부동산)에 의해 움직이거나 주변 세계가 가하는 강제에 의해 행동하는 인물이므로 빌런이라고 부르기엔 모호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세계, 그러니까 찰리를 부추기거나 꼬드기는 인물들이며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벌여놓은 그의 삼촌은 하나같이 빌런처럼 보이긴 한다. 그런데 또 책을 읽다 보면 찰리의 삼촌이 완전히 악한 인물인가와 같은 질문에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제목은 ‘망할 부르주아’(돌고래어)들을 척결하는 또 다른 빌런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고 책의 헌사대로 “누군가의 나날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나은 날들이 될 수 있게 노력하는” 작품 내외의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여러 의미로 ‘빌런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은 확실하다.

찰리는 작중 평범한 인물로 내내 등장하지만 영웅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그는 비범한 존재이다. 태어나고 보니 삼촌이 부자였다는 사실도—거의 남처럼 살다시피 했지만—심상치 않은데, 한때 경제부 기자였던 그의 말솜씨 역시 오만한 부르주아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만큼 화려했으니까. 처음에는 상황에 이끌려 가기만 했던 찰리가 상황을 주도하고 주변을 설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하는데 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물론 초반 100페이지까지는 찰리가 주인공치고는 지나치게 상황과 세계관 내부의 문제에 밀려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놀라울 정도로 단단해진 심장을 자랑한다. 세계를 움직이며 필요할 때는 자발적으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는 거물들에게 서슴지 않고 협박을 가하거나 장난을 치는 모습에서 찰리 이 녀석이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라면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그냥 처음부터!—엉엉 울기만 했을 텐데…… 찰리는 영웅서사에 적합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비범했고 환상적으로 성장했다. 삼촌을 거의 탓하지도 않았음이 가장 대견한 부분. (그런데 모로 봐도 많이 불쌍한 건 사실이다…….)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의 책인데다 내지 레이아웃에 상하 여백이 많은 편은 아니라 기대보다 읽는 데 속도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 때문이라기보단 내용이 일반인이 이해 가능한 수준 이상으로 매끄럽고 고도화된 수준의 설정들이 많았기 때문이 옳겠다. 결말은 이 글에서 언급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깔끔하긴 했지만—어딘지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이 드는 그런 결말이었다. 마음이 텁텁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어쩌면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더럽고 치사한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 같은 소시민은 찰리보다 조금 낫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아무쪼록 책의 결말은 괜찮은 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주의를 패고, 또 패는 말맛이 좋은! 유머러스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고양이 님이 아니었다면—여기에 돌고래도 끼워주자—이 소설은 분명 어딘가 잘못된 길로 빠졌을 것이다……. (저주 아님)

자본주의에 의해 피 봤고 결국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살아남은 남자의 이야기. 결국 이 세상에 믿을 만한 건 고양이밖에 없다. 그게 전말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그 고생을 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보상을 받은 남자의 이야기는 처음 내 생각 이상으로 진지했고 복잡했으며 흥미로웠다. 악당들에 대해서라면…… 지나치고 정확한 미국식 사고 혹은 접근법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사건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이 불가피하게 벌어졌을 때 거기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서"이거나 "우리는 그저 기회를 이용할 뿐"이라는 식이 그랬다. 그런 점이 미국 작가가 쓴 미국식 블랙코미디—내가 제일 빵 터졌던 건 악당 하나가 연로해서 줌(zoom)을 사용에 문제를 겪는 장면(웃프다)—를 완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작가 존 스칼지의 골칫덩어리들인 슈가, 스파이스, 스머지들이 너무 궁금하다!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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