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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 빌런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4년 12월
평점 :
자본주의와 소득 불평등, 노동조합과 슈퍼 빌런, 그리고 고양이!
이 책을 소개하는 캐치프레이즈이다. 나는 대개 책을 읽기 전 뒤표지에 쓰인 문구를 빠짐없이 읽어 보는 편인데, 그 문구를 보고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빌런’과 ‘고양이’가 함께 붙을 수 있는 단어였나? 그리고 SF에서? 그런가 하면 책과 함께 도착한 기념 수건이 있었으니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썩어 빠진 부르주아!” 돌고래들이 일제히 외쳤다.
독자로선 정말이지 황당한 문장 조합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차츰 나는 수건에 쓰인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존 스칼지를 SF의 대가라고 자신 있게 소개했는지,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총명해(?) 보이는 고양이 이미지를 박아 넣었는지 들을.
소설은 아주 음울한 상태로 시작했다. 가족도 직장도 잃은 주인공 ‘찰리’가 이번에는 집도 잃게 생겼다. 집은 아버지의 유산이며 형제들과 공동 소유이나 그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찰리는 그것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직장에서 잘리고 임시 교사 노릇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찰리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동네 펍을 인수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마저 상속 문제로 좌절된다.
그런 찰리에게 유일한 빛은 바로 스트릿 출신 고양이 ‘헤라’이다. 헤라는 흰색에 오렌지빛 털이 섞인 귀여운 고양이인데 종종 바깥을 들락거리며 자유롭게 지낸다. 찰리에게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거의 유일한 가족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찰리는 부자(라고 알려진) 삼촌의 죽음에 관련한 소식을 듣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왕래하지 않았던 ‘그’ 삼촌. 찰리의 결혼 선물로 저주를 퍼부은 ‘그’ 삼촌 말이다.
삼촌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수상한 여인(틸 모리슨)이 집을 찾아와 그에게 집을 상속받게 이끄는 대신 삼촌의 뒷수습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일을 해치워 나갈수록 찰리에게는 더 큰 곤경이 찾아온다. 엄청난 규모의 비밀 기지, 고도의 기술로 무장한 동물 파트너들은 물론 냉혹한 자본주의의 쓴맛까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찰리! 삼촌의 뒤를 이어 슈퍼 빌런 사업을 이어나가며 점차 풀리지 않는 비밀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SF이지만 나로선 이것을 SF로 읽기엔 무리가 있었다. 영웅담이거나 서사시 같은 웅장함도 있었고 영화 시나리오 같은 미스터리한 임박함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복잡했다. 한 사람의 머리에서 영상 매체로는 1시간 30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필요한 세계관이 술술 튀어나오다니. 놀라웠다. 일단 첫인상은 그랬는데 찬찬히 책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의 제목에 관해서 생각했다.
스타터 빌런(Starter Villain)
빌런을 시작하는 사람
소설이 말하는 ‘빌런’은 의미가 다소 복잡하다. 당장 주인공인 찰리만 해도 그는—대체로 선(善)을 추구하나—순수한 목표의식(부동산)에 의해 움직이거나 주변 세계가 가하는 강제에 의해 행동하는 인물이므로 빌런이라고 부르기엔 모호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세계, 그러니까 찰리를 부추기거나 꼬드기는 인물들이며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벌여놓은 그의 삼촌은 하나같이 빌런처럼 보이긴 한다. 그런데 또 책을 읽다 보면 찰리의 삼촌이 완전히 악한 인물인가와 같은 질문에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제목은 ‘망할 부르주아’(돌고래어)들을 척결하는 또 다른 빌런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고 책의 헌사대로 “누군가의 나날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나은 날들이 될 수 있게 노력하는” 작품 내외의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여러 의미로 ‘빌런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은 확실하다.
찰리는 작중 평범한 인물로 내내 등장하지만 영웅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그는 비범한 존재이다. 태어나고 보니 삼촌이 부자였다는 사실도—거의 남처럼 살다시피 했지만—심상치 않은데, 한때 경제부 기자였던 그의 말솜씨 역시 오만한 부르주아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만큼 화려했으니까. 처음에는 상황에 이끌려 가기만 했던 찰리가 상황을 주도하고 주변을 설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하는데 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물론 초반 100페이지까지는 찰리가 주인공치고는 지나치게 상황과 세계관 내부의 문제에 밀려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놀라울 정도로 단단해진 심장을 자랑한다. 세계를 움직이며 필요할 때는 자발적으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는 거물들에게 서슴지 않고 협박을 가하거나 장난을 치는 모습에서 찰리 이 녀석이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라면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그냥 처음부터!—엉엉 울기만 했을 텐데…… 찰리는 영웅서사에 적합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비범했고 환상적으로 성장했다. 삼촌을 거의 탓하지도 않았음이 가장 대견한 부분. (그런데 모로 봐도 많이 불쌍한 건 사실이다…….)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의 책인데다 내지 레이아웃에 상하 여백이 많은 편은 아니라 기대보다 읽는 데 속도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 때문이라기보단 내용이 일반인이 이해 가능한 수준 이상으로 매끄럽고 고도화된 수준의 설정들이 많았기 때문이 옳겠다. 결말은 이 글에서 언급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깔끔하긴 했지만—어딘지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이 드는 그런 결말이었다. 마음이 텁텁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어쩌면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더럽고 치사한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 같은 소시민은 찰리보다 조금 낫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아무쪼록 책의 결말은 괜찮은 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주의를 패고, 또 패는 말맛이 좋은! 유머러스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고양이 님이 아니었다면—여기에 돌고래도 끼워주자—이 소설은 분명 어딘가 잘못된 길로 빠졌을 것이다……. (저주 아님)
자본주의에 의해 피 봤고 결국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살아남은 남자의 이야기. 결국 이 세상에 믿을 만한 건 고양이밖에 없다. 그게 전말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그 고생을 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보상을 받은 남자의 이야기는 처음 내 생각 이상으로 진지했고 복잡했으며 흥미로웠다. 악당들에 대해서라면…… 지나치고 정확한 미국식 사고 혹은 접근법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사건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이 불가피하게 벌어졌을 때 거기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서"이거나 "우리는 그저 기회를 이용할 뿐"이라는 식이 그랬다. 그런 점이 미국 작가가 쓴 미국식 블랙코미디—내가 제일 빵 터졌던 건 악당 하나가 연로해서 줌(zoom)을 사용에 문제를 겪는 장면(웃프다)—를 완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작가 존 스칼지의 골칫덩어리들인 슈가, 스파이스, 스머지들이 너무 궁금하다!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