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죽지 않는 법 - 잘못된 의학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마티 마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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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게 죽지 않는 법 마티 마카리김성훈 옮김웅진 지식하우스



10p 

선생님, 환자는 한 가지 병 때문에 입원했는데, 우리가 거기에 두 가지 질병을 더 보탰습니다. 수면 박탈과 영양실조요.”



상식이라는 이름의 맹점을 넘어서

― 『의사에게 죽지 않는 법이 던진 의학적 통찰과 질문들

 

 

의학은 언제나 진리의 얼굴로 우리 앞에 선다. 흰 가운의 권위가 건네는 처방전과 단단한 지침 앞에서, 보호자의 언어는 늘 사소한 불안이나 비전문적인 의구심으로 치부되곤 했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교수 마티 마카리의 의사에게 죽지 않는 법은 바로 그 견고한 권위의 성벽 뒤에 숨겨진 의학의 맹점을 집요하게 조명한다. 이 책은 특정 의사나 제도를 고발하기보다, 전문가라는 이름의 집단사고가 어떻게 오랜 시간 상식으로 굳어져 왔는지를 추적하는 기록에 가깝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현대 의학이 언제나 과학적 증거만으로 작동해 온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땅콩 알레르기를 둘러싼 권고의 역사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알레르기 유발 식품을 피하라는 조언은, 물론 당시의 의학적 맥락에서 보면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합리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아이들의 면역 관용 형성을 방해하며 오히려 알레르기 유행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선의로 출발한 지침이 어떻게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문제는 특정 질환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인식 아래 광범위하게 처방된 항생제 역시 마찬가지다. 감염을 억제하는 데에는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은 오랫동안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나타난 비만, 당뇨, 자가면역질환의 증가는 의학이 단기적 효과에 집중할 때 어떤 구조적 공백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생의 시작점에서 이루어지는 의료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도 설득력 있다. 출산 직후 신생아를 엄마의 품에서 분리해 검사대 위에 올리는 장면은, 의료 시스템의 효율성이 애착과 생물학적 본능보다 우선시되어 온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탯줄 절단을 늦추고 피부 접촉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면역과 뇌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이 밝혀졌음에도, 이러한 변화는 제도 속으로 더디게 편입되어 왔다. 이는 의학이 생명을 유기적인 존재라기보다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아 온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여성과 노년의 삶을 둘러싼 사례들 역시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호르몬 대체요법은 초기 연구 결과가 과도하게 일반화되며 위험한 선택으로 낙인찍혔다. 그 선택이 전적으로 악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여성이 치매와 골절, 심혈관 질환 예방이라는 잠재적 혜택에서 멀어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식이 콜레스테롤을 둘러싼 공포 역시 충분한 검증 없이 상식이 되어 정제 탄수화물의 범람을 불러와 인류를 염증성 질환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 위기다. “중독은 드물다는 짧은 문장이 학술지에 실리고, 그것이 제약 산업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며 정설처럼 유통되는 동안 수많은 환자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지로 밀려났다. 실리콘 보형물 논란에서도 문제는 단일 치료가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는 방식 자체에 있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한 처방이 또 다른 고통을 낳는 구조는 의학적 판단이 자본과 결합할 때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부모로서 고통스러운 성찰의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의 약통을 챙기며 느꼈던 막연한 의구심, ‘이 처방이 아이의 미래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라는 질문을 전문가의 확신 앞에서 접어 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저자는 의학적 오류가 단순한 지식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유보하게 만드는 문화적 분위기에서 강화된다고 말한다.

 

 

의사에게 죽지 않는 법은 의료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의학이 언제나 수정 가능하며, 그 과정에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진료실 문을 여는 수많은 보호자에게 이 책은 단순한 건강정보를 넘어선 비판적 사유의 도구와 같다. 의학은 결코 완결된 신화가 아니며,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인간의 불완전한 노력일 뿐이다. 우리는 의료라는 미명 아래 가려진 관행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통념에 순응하기보다 진실을 향해 고개를 드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전문가의 오만이 낳은 거대한 맹점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오래 남는...

의학 통념은 깨지기는 어렵지만 생기기는 쉬웠다. 책을 읽다 보면 단 두 명의 의사 소견이 그대로 굳어져서 빅폿('거대한 솥 = 통념)'보다 더 큰 전설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이 솥 안에서 빠져나와 생명 본연의 가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아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병원에서 매일 밤 깊이 잠든 환자를 깨워서 놀라게 한 다음 재빨리 주사기를 찔러 채혈을 하고, 마치 겨울 잠을 자고 있던 곰을 찌르기라도 한 듯이 서둘러 도망치는 야간 의식을 치르고 있을까? (...) 매일 하는 그 검사가 대부분 불필요하다는 것을 병원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듯했다.
- P9

호르몬 대체요법이 여성의 유방암 사망 위험을 높인다고 입증한 무작위 대조군 시험이나 신뢰할 만한 연구는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까지도 그 고정관념은 여전히 살아 있다.
- P70

마이크로 바이옴에 속한 장내세균들은 균형 속에 살아가며 함께 힘을 합쳐서 당신의 건강에 놀라운 도움을 주는 존재다. 장내세균은 소화에 관여하고, 면역계를 훈련 시키고, 비타민을 만들고,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세로토닌을 생산한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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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게 죽지 않는 법 - 잘못된 의학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마티 마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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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통념은 쉽게 만들어지고 어렵게 깨진다. 소수의 의사 소견이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구조 속에서, 저자는 통념의 솥을 벗어나 생명 자체를 다시 보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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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29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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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짜 외계인 이야기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중간고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초율,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눕는다.

 

초율아, 이리 들어와. 넌 이제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때가 된 거야.”

수족관으로 들어와, 얼른! 더 지체하면 위험해질 수 있어.”

 

파란별, 지금 네가 나한테 말하는 거야?”

 

초율은 키우던 금붕어 파란별의 말에 따라 수족관 안으로 순간 이동한다. 물고기로 지내면서 안정을 찾은 초율은 성적과 상관없이 자신의 흥미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

 

서강은 초율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초율이 거절해도 강압적으로 교제를 강요한다. 초율이 끝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도리어 초율을 위협한다. 서강은 초율을 압박하려고 쌍둥이 형제 선율에게 맞았다며 학폭으로 신고하게 되는데~

 

다음 주에 학폭 위원회 열린다. 잘 준비하고 있지? 넌 끝장이야! 학교에서 아웃!”

그 다음은 초율이다! 알고 있지? 내가 그년도 끝장낼 거야! 학교에서 아웃!”

그 다음은 너희 엄마다! 알고 있지? 내가 너희 엄마도 끝장낼 거야! 이 사회에서 아웃!”

 



지구에 불시착한 아이들의 시간

이상권, 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

 

사춘기는 세상이 낯설어지는 시기가 아니라, 내가 낯설어지는 시간이다. 몸은 갑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어제까지 믿어 왔던 기준은 더 이상 나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상권의 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은 이 흔들림을 감정의 비유로 돌리지 않는다. 작가는 청소년기의 정체성 혼란을 진짜 외계인이라는 설정으로 밀어붙이며, 우리가 느끼는 이질감이 얼마나 현실적인 감각인지를 드러낸다.

 

 

전교 1등 정초율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안정적이지 않다. 몸은 자주 무너지고, 성적은 더 이상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 초율이 수족관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판타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다. 금붕어 파란별은 초율의 외로움을 대신 말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초율이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게 만드는 통로다. 물고기의 몸으로 머무는 동안 초율은 성적에서 벗어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의대를 목표로 하던 아이가 물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변화는, 이 질문의 결과다.

 

 

쌍둥이 선율은 또 다른 방식으로 흔들린다. 한때 영재였다는 말은 지금의 그에게 상처가 된다. 성적도, 키도, 관심도 멈춘 자리에서 선율은 자기 몸을 다시 믿고 싶어 한다. 그가 클라이밍을 선택하는 이유는 잘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떨어질지라도 스스로 선택한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그곳은 선율에게 다시 숨을 돌려주는 공간이 된다.

 

 

이 아이들 앞에 서강이 등장한다. 서강은 단순한 가해자가 아니다. 그는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을 유지하는 존재다. 좋아한다는 말로 다가오지만, 그 말에는 상대의 선택이 없다. 거절은 곧 도전이 되고, 분노는 위협으로 바뀐다. 학폭이라는 제도는 아이의 삶을 다루는 장이 아니라, 힘과 돈을 가진 어른들의 싸움터로 변한다. 서강이 시간을 먹고 산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타인의 마음과 삶을 닳게 하며 버티는 얼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위협에 맞서는 초율의 힘은 특별하지 않다. 외계의 능력도, 영웅의 자질도 아니다. 가족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다. 엄마 정우 씨와 나눈 일상, 선율과 쌓아 온 기억, 함께 견뎌 온 시간의 무게가 초율을 지탱한다. 파란별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선택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소설은 성장이라는 말이 혼자 견디는 힘이 아니라, 시간을 나누는 일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이 말하는 외계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이유, 잘하던 것을 잃고 새로운 것을 얻는 이유는 망가짐이 아니라 변화이기 때문이다. 선율의 몸 안에서 다른 가능성이 깨어나듯, 정체성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지금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다. 학교라는 좁은 틀 안에서 스스로를 문제로 규정해 온 청소년들에게, 이 이야기는 말한다. 너는 틀린 존재가 아니라, 아직 다른 별의 시간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것은 거창한 해답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이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거울 속의 내가 모두 각자의 별에서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은 그 받아들임이 곧 살아간다는 일임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보여 준다.

 





인물 속으로~

75p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날 싫어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어. 내가 왜? 내가 뭐가 부족한데? 아니, 나를 싫어하다니 감히…….”(서강의 말)

 



약탈하는 빛, 서강 타인의 시간을 삼키는 얼굴

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에서 가장 서늘한 긴장을 만드는 인물은 서강이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라기보다,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의 삶을 연장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설정은 서강을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유지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얼굴로 읽게 만든다.

 

서강이 초율에게 보이는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거절을 견디지 못하는 자의 분노이며, 자신의 완전함에 균열을 낸 존재를 제거하려는 충동에 가깝다. 그는 초율의 감정과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고, 거부당하자 학폭과 제도의 틈을 무기로 삼아 가족의 일상까지 압박한다. 서강의 폭력은 육체보다 시간과 삶을 겨눈다.

 

이 소설에서 서강은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존재다. 그에게 타인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소모되는 자원일 뿐이다. 이상권은 이 인물을 통해, 오늘의 사회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시간을 빼앗고도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을 유지하는지를 드러낸다. 서강의 서늘함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그것은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도서를 제공 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날 싫어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어. 내가 왜? 내가 뭐가 부족한데? 아니, 나를 싫어하다니 감히……." - P72

"엄마, 지금 학폭 위원회는 학생들을 위한 게 아니에요. 그건 돈 있고 권력 있는 어른들 싸움이에요. 누가 잘못했냐,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무조건 돈이 더 많고, 힘센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고요! 그쪽은 유명한 변호사들이 붙을 텐데, 그럼 절대 못 이겨요. 그게 학폭 위원회의 현실이에요." - P111

오늘 하루를 버텨 온 온몸의 뼈가 축 늘어진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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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사는 외계인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29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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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던 것을 잃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아이 선율의 이야기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안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시간을 살 것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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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도의 언어 - 시편을 읽는 40가지 단어
장 피에르 프레보스트 지음, 이기락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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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도의 언어 장피에르 프레보스트 가톨릭 출판사

 

 

 

말이 막힌 자리에서 시작되는 기도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시편 22,3)

 

 

 

아이는 어릴 적부터 자주 밤을 건너야 했다. 숨이 갑자기 가빠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우리는 예고 없는 밤길을 달려 병원으로 향하곤 했다. 10 대가 된 지금도 그런 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많이 자랐지만, 호흡을 가늠하며 보내는 시간의 긴장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앞에서 기도는 늘 막혔다. 간절함은 분명했지만, 말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편, 기도의 언어는 바로 그 말 잃은 자리에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기도를 잘하는 법을 가르치기보다, 기도가 왜 자주 부서지는지를 먼저 묻는다. 내가 만난 시편의 언어는 부르짖음이다. 시편의 기도는 정돈된 고백이나 안정된 찬미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가깝다.

 

 

시편의 화자들은 분노하고 항변하며 때로는 하느님께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 언어가 기도로 남는 이유는 말의 완결성보다 방향 때문이다. 부르짖음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있다.

 

 

아이의 호흡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떠올린 기도는 문장이 되지 못했고, 같은 말이 반복되다 끊어지기를 거듭했다. 시편, 기도의 언어를 읽으며 그 시간이 다시 떠올랐다. 부르짖음이란 의미가 완성된 언어가 아니다. 그 침묵의 시간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으려는 몸의 반응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신앙의 성숙함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시편이 보여 주는 성숙함은 안정이 아니라 지속이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도, 결과를 확신할 수 없어도 말을 멈추지 않는 태도 말이다.

 

저자는 부르짖음을 신앙의 결핍이 아니라, 신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가장 원초적인 증거로 읽는다. 고통과 두려움의 한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있다는 사실, 그것 만으로 기도는 이미 시작된다.

 

 

시편, 기도의 언어는 시편을 위로의 문장으로 소비하게 하지 않는다. 대신 시편을, 고통 속에서도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언어로 다시 세운다. 기도는 마음이 정리된 뒤에야 가능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가장 어지러울 때 남는 마지막 언어일지도 모른다. 시편이 언제나 답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을 멈추지 않게 한다. 그 점에서 시편은 여전히, 가장 인간적인 기도의 언어로 남아 있다.

 

 




*가톨릭 출판사 캐스리더스 8기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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