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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 우리가 서로를 적이라 믿게 만드는 마음의 함정
커트 그레이 지음, 제효영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평점 :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 커트 그레이 / 김영사

지은이 : 커트 그레이
심리학 및 신경과학과 교수. 도덕심리학 분야 세계적 석학. 의학사를 공부한 뒤 사회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내 지옥에 빠져 있을 때는 나만 보인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대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저 사람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112p)

혐오를 연대하다
오늘날 인류는 ‘분노 타겟팅’으로 혐오를 연대한다. 바다 건너 미국의 낙태 찬반 시위 현장부터 한국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대하는 대중의 ‘심판’은 살벌하기까지 하다.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공방을 두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을 각각 지지하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뇌가 없는 좀비", "지능이 오염된 집단"이라 모멸하는 세태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상대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두개골 내부가 텅 빈, 혹은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도덕심리학자 커트 그레이는 이 책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진화론적 역사에서 인간은 지구를 지배한 사냥꾼이 아니라, 언제 맹수가 튀어나올지 몰라 떨던 연약한 ‘먹잇감(피식자)’이라고. 인간이 도덕성을 진화시키고 집단을 이룬 진짜 목적은 타자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피식자들의 사회에 이토록 분노가 들끓는가? 저자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격분이 상대의 악의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는다는 극심한 '두려움'과 '위험성의 주관적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상대방의 가치관과 선택이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체제와 삶의 안전망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편을 가르며 분노하는 것이다.

'도덕적 정형화'
이 책의 후반부를 관통하는 내용은 '도덕적 정형화‘이다. 인간의 뇌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싫어하는 게으른 인지 체계를 지녔다. 갈등이 발생하면 두 가지 범주, 즉 '사고 능력을 갖춘 사악한 가해자'와 '감각 기능만 가진 무력한 피해자'로 구분한다.
이 도덕적 정형화는 "피해자는 비난 받을 리 없고, 가해자는 고통을 느낄 리 없다(340p)"는 인지 왜곡을 일으킨다. 우리가 특정 집단을 '사악한 가해자'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 뇌는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고통, 심지어 그들의 인지 능력마저 지워버린다.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낙태 논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가 정확히 여기에 있다. 낙태 반대 진영은 상대방을 '태아라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잔인한 가해자(=살인자)'로 정형화하고, 낙태 찬성 진영은 상대를 '여성의 신체 주권과 인권을 짓밟는 가부장적 가해자'라고 주장한다. 이 ’도덕적 정형화‘는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의 절박한 고통도,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는 이들의 두려움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상대방을 악인이라 치부하며 분노한다.
인종 차별, 그리고 이주민 노동자
물리적 폭력과 질병이 극적으로 줄어든 현대사회에서, 석기시대의 뇌를 지닌 인간은 오히려 위험을 감지하는 센서의 민감도를 극도로 끌어올린다. 저자는 세상이 안전해질수록 사소한 위협도 거대하게 받아들이는 이 현상을 통해 현대의 이주민 노동자 혐오와 인종 차별을 설명한다.
일부 원주민들이 이주민 노동자를 향해 쏟아내는 인종 차별적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이주민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지역사회의 치안을 무너뜨리며, 고유의 문화를 오염시킬 것이라는 주관적 공포를 상상하며 시작된다.
"도덕적 직감은 합리적 추론을 가볍게 압도한다. 그것은 마치 객관적 안전을 100% 인지하더라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투명한 스카이워크 위에 선 것과 같다.
(215p)“
객관적인 통계나 데이터로 ’이주민 노동자가 경제에 기여한다‘ 라는 팩트를 제시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뇌는 ’나를 교란하기 위한 거짓 정보‘ 로 인식한다. 두려움이라는 직관은 사실을 이긴다. 인종 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차별받는 취약한 피해자라고 믿게 된다. 모든 갈등의 당사자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포장하는 이유다.

일인칭으로 연대하라! 취약성과 경험담으로.
책의 마지막 3부 전체는 분열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사실을 내려놓고, ’일인칭 취약성’과 ‘일인칭 경험담’을 공유하라고 강조한다.
좁혀지지 않던 극단적 대립을 녹일 수 있는 것은 통계학이나 법리적 논쟁이 아니다. 내가 왜 두려움을 느끼는지, 삶 속에서 어떤 상실과 고통의 경험이 나를 이토록 방어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일인칭 서사'를 공유할 때 비로소 상대방의 가로막힌 뇌가 깨어날 것이다.
낙태를 반대하는 이가 과거 낙태 후 겪었던 깊은 상실감과 영적 고통의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 낙태를 찬성하는 이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 뻔했던 절박한 취약성을 고백할 때, 비로소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주민 노동자가 고국에 남겨진 가족을 위해 먼 이국땅에서 매일 밤 눈물 흘리는 삶의 서사를 공유할 때, 그들을 향한 인종 차별의 시선은 옅어진다.
자신의 가장 약한 면(취약성)을 기꺼이 드러내는 일은 나를 해치려던 포식자의 손에서 무기를 떨어뜨리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연대의 기술이다.
"이야기는 상대방을 단순한 악마가 아닌, 걱정하고 염려하며 고통받는 3차원적 인간으로 소환해 낸다
(412p)."
서로의 경험담이 겹치는 지점에서, 상대방은 마침내 "뇌가 없는 좀비"에서 "나처럼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다 상처 입은 삼차원적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도덕도 겸손해야지.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의 마지막 지점은 '도덕적 겸손함‘이다. 겸손은 인간 궁극의 미덕이라지만 도덕까지 겸손 하라고?
저자가 말하는 도덕적 겸손함이란 내 신념을 포기하거나 비굴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전체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와 격렬히 부딪치는 저편의 완고한 판단 역시 ‘소중한 가치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다’라는 인류 공통의 피식자적 본능에서 나온 것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정치적 탄핵 정국에서, 낙태 논쟁에서, 이주민 문제에서 인류는 저마다 다른 위험의 신호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한쪽은 권력의 독주와 생명의 경시라는 것을 보고 있고, 다른 한쪽은 헌정 중단과 여성의 억압이라는 것을 보며 두려워한다. 이것은 선과 악의 전쟁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위험'을 바라보는 충돌일 뿐이다.
서로를 향한 적대와 혐오를 거두고, 저들이 응시하는 ‘일인칭 두려움’의 실체를 묻는 순간 분노는 점점 옅어지지 않을까?
"진보주의자가 보호하려는 소외 계층의 취약성과 보수주의자가 보호하려는 사회질서의 취약성은 결코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다.
(478p)“
적대와 혐오가 굳어진 이 분열의 시대에, 도덕까지 겸손하라는 저자의 말은 타인을 들여다보고 수용하게 만들어 준다.
내 지옥에 빠져 있을 때는 나만 보인다.

*책을 제공 받아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 위험성의 인식이 도덕성을 이해하는 마스터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 분열뿐만 아니라 모든 도덕적 갈등을 이해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1 - P19
인구수가 엄청난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도 특정한 정치 진영이 몽땅 사악할 수는 없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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