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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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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분석이나 충고 따위 하지 않고 말없이 나를 지지해주는 면을. / p.107
작가나 작품에 크게 편견을 가지지 않지만 유독 내 머릿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 화자가 너무 남성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평들을 자주 보았다. 그 부분이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면 이미 몇 편의 작품을 읽었겠지만 불호에 가까운 취향을 가지고 있기에 그동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작품들은 늘 후순위로 밀려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 전, 자주 시청했던 북 크리에이터님의 영상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 대한 의견이 아직까지도 인상적으로 남는다. 작가님을 좋아하고 싶지 않은데 작품을 읽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이야기인 것으로 기억한다. 요즈음 언어로 번역하면 '입덕 부정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작가님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머릿속에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의견을 아직까지도 왜 이렇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후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작가님의 신작 소식을 접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구매하게 되었다. 사실 신작에 대한 기대평이나 줄거리는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동안 시간이 될 때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튜브 영상에서 많은 크리에이터분들께서 이 작품에 대해 호평을 남기셨고, 호기심이 들었다. 2024년이 되기 전에 마지막 책으로 선택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열여덟 살의 남자 고등학생이다. 작품에서는 '나'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에세이 대회에서 '너'라고 불리는 한 살 연하의 여고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주된 이야기 소재는 소녀가 그리고 있는 벽이 있는 도시였다. 원래 사는 곳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것이다. 거기에 지금 있는 자신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이를 믿었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너는 갑자기 어느 순간에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네가 말했던 그 도시로 들어가게 되었고, '꿈 읽는 이'라는 호칭을 받아 도서관에서 일했다.
그 안에서 그림자와 나의 어느 사건이 벌어진 이후로 시점은 바뀌어 세월이 흘렀다. 나는 성인이 되어 한 출판유통사에서 근무한 직장인이었는데 도서관과 관련된 일을 알아보던 중 산간 지역의 작은 도서관 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곳에는 고야스라는 이름의 전 관장과 프로페셔널한 소에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오는 M 소년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고야스의 비밀, 그리고 M 소년과 그 도시와의 관계성들이 등장하고, M 소년도 사라진다.
전반적으로 술술 읽히는 스타일의 작품이 아니기에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로 읽었던 것 같다. 거기에 상상력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다 보니 작품에서 드러난 도시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게 조금은 어려웠다. 거기에 공간과 시간이 갑자기 바뀌어서 이 지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읽게 되면서 주변에서 이 작품에 대한 평들을 조금씩 보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묘하게 빠져들었다.'라는 내용이 가장 크게 공감이 되었다. 두꺼운 페이지 수부터 부담되는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두 가지 지점을 생각했다. 첫 번째는 그림자의 의미다. 초반에 열여덟 살의 내가 도시에 들어가면서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바깥에 있는 자신은 그림자, 여기에 있는 것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과연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자기 자신, 또는 자아, 그것도 아니라면 겉에서 보이는 나의 껍데기. 많은 답변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중후반부에 본체와 그림자가 표리일체라고 말하는 고야스의 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두 번째는 벽의 의미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벽을 넘는다. 열여덟 살의 나와 그림자가 단어 그대로 도시의 벽을 넘기도 하지만 현재의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연고가 없는 도서관 관장으로 이직하는 것으로 벽을 넘었다. 고야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는 것이 하나의 벽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읽는 내내 체감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바꾸어 생각했었는데 우리가 항상 부딪히는 한계이지 않을까 싶었다. 선택의 순간에서 가로막는 하나의 벽으로 보였다. 이들은 불확실함과 주변 사람들의 우려보다는 도전을 택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아간다. 그 지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서두에 언급했던 북 크리에이터님의 말이 그렇게 공감이 되었다. 드물게 작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들었던 사람으로서 좋은 감정보다는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읽었던 작품이었는데 많은 여운이 남았다.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벽에 부딪히고 도전하라는 조언을 이렇게 아름답고도 거대한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편견이라는 벽을 허물 수 있었다. 내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작품을 도장깨기를 해야겠다는 계획과 함께 그림자를 잃지 않는, 그리고 벽을 깨트리고 나아갈 수 있는 스스로가 되기를 다짐하면서 이 리뷰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