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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 - 지하철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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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의 도는 약자를 돕고 정의를 실현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있다. / p.19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주요 대중교통 수단인 지역에 살다 보니 서울에 놀러갈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렇게 복잡한 지하철을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탈까.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잘 활용해서 목적지에 간다고 해도 가끔 엉뚱한 길로 새서 잘못 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가면 늘 하나의 신고식처럼 그렇게 실수를 한다. 마치 미로처럼 꼬불꼬불 얽혀 있는 지하철 지도를 보고 있으면 나의 머리가 엉킨 실타래가 된 듯하다.
심너울 작가님의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라는 단편집에는 지하철에 대한 소설 한 꼭지가 등장한다. 아마 그 책의 리뷰에서도 적었던 것처럼 지방 사람이라서 경의중앙선 도착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다 보니 수도권에 있는 지인들에게 물어봤었다. 모두가 크게 공감을 했었는데 여전히 체감이 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지박령 유령이 나오면서 말이다. 나중에 서울에 가게 되면 경의중앙선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화가 더 날 것 같다.
이 책은 지하철을 주제로 한 일곱 편의 앤솔로지 소설집이다. 지하철을 한 달에 한 번 이용할까 말까 한 지방 사람으로서 크게 와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하철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실린 책이어서 궁금했다. 서울에서의 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공감대가 약간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앤솔로지 소설 자체를 좋아하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총 여섯 분의 작가님께서 집필하신 일곱 편의 소설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지하철을 잘 몰라서 헤매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흥미로웠다. 실제 호선이나 역 이름이 나오는 소설의 경우에는 가늠이 가지 않아 인터넷으로 본 이후에 머릿속으로 하나의 맵을 만들고 나서야 이해가 되기도 했었다. 지하철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소설들은 아니어서 큰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흥미롭기는 했었는데 개인적으로 뽑자면 조영주 작가님의 <버뮤다 응암지대의 사랑>과 정해연 작가님의 <인생, 리셋>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버뮤다 응암지대의 사랑>은 작가 지망생과 공무원 시험 준비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신춘 문예 등단 이후 전업 작가로서 소설을 집필하고 있지만 별 소득이 없는 주인공 해환은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아침부터 6호선 신내역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항상 1-3 모퉁이에 있는 남자를 '13모남'이라고 스스로 줄임말을 만들어 관찰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13모남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둘 다 준비생이므로 돈이 없었기에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등 짠내 나는 데이트를 즐겼다. 둘은 유명 인사가 됐다.
처음에는 6호선의 버뮤다 응암 지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 유일의 단선 노선이어서 갈 때는 쭉 이어서 가지만 반대는 순환이 아닌 뺑 돌아서 가야한다는 사실이 뭔가 싶었다. 지도가 머릿속으로 바로 그려지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말이다. 돈이 부족한 두 취업준비생(작가 지망생을 취업준비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의 연애 이야기는 소금이 뿌려지는 듯한 짠내가 나면서도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단내가 나기도 했었다. 결말이 흐를수록 해환의 입장으로 감정 이입이 되어 13모남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는 것은 비밀이다.
<인생, 리셋>은 나 역시도 조금 꿈꿨던 적이 있는 이야기여서 공감이 되었다. 그렇다고 소설의 주인공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조금이나마 괜찮았을까, 하는 정도의 가벼운 상상이다. 지인의 배신으로 큰 실패를 맞이한 준규는 과거 두 여자 사이에서 미란이라는 인물을 선택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다. 미란이 자신의 아들을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패배감을 느껴 지하철 철로에 몸을 던졌고, 여자를 선택한 시간이었던 1985년의 그날로 돌아가게 된다. 처음 돌아갔을 때에는 한 남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란을 선택했다. 현실로 돌아온 준규는 다른 여자인 송주를 선택할 때까지 지하철 철로에 몸은 던진다.
어차피 사람은 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특히, 여기에 등장하는 준규라는 인물은 내 기준 그냥 쓰레기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집이 부자인 송주가 아니라 부성애에 이끌려 미란을 선택했다는 생각에 연민이 들기도 했었지만 1985년 그날의 준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이 주신 자업자득이 아니었을까 싶다. 뭘 해도 망할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약자에게 쌍욕을 서슴없이 내뱉고, 자신이 실패한 일을 부인의 탓으로 돌린다. 단순하게 부자 아내가 아닌 평범한 아내를 선택했다는 이유 차원이 아니라 그냥 인생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준규의 자기연민은 갈수록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식게 만들었고, 결말 부분에서 나름 통쾌했다. 개인적으로 준규의 정떨어지는 행동을 볼 때마다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공포 스트리머의 이야기와 편권도라는 무술을 개발한 노인의 이야기, 아빠를 잡아먹은 괴물을 찾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 미스터리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여자와 그녀를 지켜보는 남자의 이야기 등 지하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소설을 덮으면서 지하철에는 사랑도 있고, 괴물도 있고, 애국심도 있고, 그냥 인생만사가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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