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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날
칼리 월리스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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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지고 있어도 여전히 지구를 느낄 수 있다. / p.15
지구 멸망을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과 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지구가 소멸하거나 멸망해 인류가 사라진다는 게 아직까지는 피부로 와닿지 않는 부분인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져서 몰입이 깨질 때가 많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불편해진다.
현실성이 없기에 몰입이 안 된다는 이유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또 다른 이유로 공감으로 든다는 게 조금은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상황 자체에 대한 몰입은 되지 않으나 처한 인물에 대한 공감은 너무나 잘 이루어진다는 게 문제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진짜 더 나을 곳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갇힌 인물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 부담스럽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진 감이 있다.
이 책은 칼리 윌리스의 SF 장편 소설이다. 사실 표지만 보고 벌레가 원인이 되었던 전염병 이야기를 다룬 한국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런 디스토피아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전염병이나 지구 멸망을 다룬 이야기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그 영화가 연상이 되는데 이 소설 또한 그랬다. 누가 봐도 무서운 표지에서부터 줄거리까지 취향과 거리가 멀었지만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중 하나를 참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도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다. 불호 취향의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씩 넓혀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테러로 많은 사람이 사망한 하우스오브위즈덤 호에 자흐라와 자스가 다가오면서 시작된다. 자흐라는 바이러스 테러를 일으킨 용의자로 지목된 박사의 딸이며, 아버지의 명예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자스는 바이러스 테러의 유일한 생존자이지만 자흐라 일당의 인질이 되었다. 테러가 일어난 지 십 년이 지난 이후 이들을 포함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십 년만에 하우스위즈덤 호에 발을 딛게 되었다.
주인공인 자흐라와 자스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전개가 되고 있으며, 목차 역시도 간단하게 자흐라와 자스로 나누어져 있다. 두 사람은 연관이 있지만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단순하게 두 사람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더 거슬러 올라 부모님과의 어떠한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목적부터 많은 것이 다른 사람이다. 단지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그리고 같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가진다.
표지에서부터 디스토피아 세계에 대한 향기가 풍겼지만 바이러스 테러라는 소재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언급했던 한국 영화가 더욱 강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 소설은 지구가 아닌 우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웅장하고 크게 느껴졌다. 또한, 영화와 다르게 정부 기관과 각자 개인의 이야기 등 그물처럼 너무나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많다 보니 초반에는 각자의 인물과 상황을 이해하는데 조금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 자스의 입장에서 소설을 공감했고 또 이해했다. 자흐라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테러의 용의자인 아버지를 두둔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기에 조금은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에 가족으로서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아버지가 테러를 일으킨 범인이라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죄책감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나중에 비밀이 풀리기는 하지만 초반만 놓고 보면 자스의 감정에 더욱 큰 공감이 되었다.
반면, 자스는 유일한 생존자로 하우스오브위즈덤 호에서 부모님을 잃은 인물이어서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자스였다면 자흐라에게 악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은 묘사되지 않았다. 자스가 자흐라의 아버지께서 테러 용의자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그럴 수 있겠지만 충분히 독백이나 무언가 혼자의 감정으로 부모를 잃은 것에 대한 억울함이 표출되었을 법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에서 그려진 자스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또 차분했기에 그러한 이야기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보통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현실감을 느낀 적이 별로 없는데 소설은 읽으면서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애덤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강한 분노를 느꼈다. 애덤은 자흐라의 쌍둥이 동생들을 데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흐라가 하우스오브위즈덤 호에 도착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애덤의 의견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해 하우스오브위즈덤 호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지만 결론적으로 애덤은 자신의 이익과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흐라를 다그쳤다. 심적으로 약할 때에 내리는 채찍은 약이 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하우스오브위즈덤 호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다수의 생명을 위해 자흐라의 말을 들었어야 되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 가족을 빌미로 협박까지 했었는데 인간의 본성과 이기심을 다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흐라와 자스, 어떻게 보면 반대에 속해 있던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 등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다수의 사람들 덕분에 애덤이라는 인물이 더욱 악역으로 보였던 점도 있었다. 늘 선과 악이 대립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 부분은 참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중반을 넘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하우스오브위즈덤 호로 오는 사람들을 막고자 했던 이들의 희생은 더욱 인상 깊었다.
꽤 두꺼운 페이지 수를 가진 소설이었음에도 평균 시간보다 빨리 완독할 정도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물론, SF 소설이라는 특성상 우주나 우주선 등에 대한 지식이 등장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참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SF 소설 앞에 호러 스릴러 장르라는 단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주선이라는 막힌 공간적 배경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인물의 시간, 바이러스에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들었다는 측면에서 공포가 고스란히 와닿았다. 솟아날 구멍이라도 있는 막다른 골목에 갇힌 듯했다. 호러, 스릴러, SF라는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세 장르를 느낄 수 있어서 그것 또한 만족스러웠다.
소설을 깨달은 점은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다르게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실 감각이 아닌 몰입감의 문제이지 않았나 싶다. 이 정도로 현실과 막연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소설이라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력과 현실감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좋은 소설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