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두발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8
카렐 차페크 지음, 정보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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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얼음은 깨지지 않으면 천천히 녹는 법이지.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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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일까. 그 흔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조차 진짜 밥을 먹을 사이가 아니면 굳이 내뱉지 않는 편인데, 예전에 회사 상사로부터 입에 발린 말도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선의의 거짓말에도 인색하다. 스스로 솔직하다고 자부하지만, 속에 있는 말을 굳이 겉으로 내뱉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이를 앞뒤가 같다고 할 수 있을지 일말의 죄책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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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속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이 책은 카렐 차페크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고전 소설을 조금씩 읽다가 우연히 알게 된 작가다. 이전에 <평범한 인생>을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해 그대로 반납반 적이 있다.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작가에게는 계속 관심이 있었다. 최근에 정보라 작가님이 번역한 '철학 3부작 시리즈'로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그 중 한 권인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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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호르두발이다. 미국에서 팔 년을 일한 호르두발은 가족의 곁으로 돌아온다. 호르두발의 기대와는 달리, 가족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폴라나는 환영은 커녕, 단답만 할 뿐이다.심지어, 딸은 아버지를 낯선 남자로 생각해 피한다. 호르두발은 가족들의 냉대에 괴로워하면서도 가장이라는 무게를 여전히 견디고 있었다. 그런 호르두발이 누군가에게 살해되어 발견된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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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만 오래 붙들게 되는 작품이었다. 사실 스토리의 흐름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책이 비교적 얇은 편이어서 평소 독서 속도라면 한 시간 내외로 충분히 완독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사흘 정도 소요되었다. 주인공에게 몰입하다가도 자꾸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서사를 따라가며 사색하기를 즐기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철학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무게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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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품의 시점이 인상적이었다. 책을 읽다가 시점을 따져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독자의 입장에서 호르두발에게 몰입하면서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기에는 거리감이 있고,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하기에는 호르두발이 죽은 뒤의 이야기나 다른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다. 이 부분이 독자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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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단 한 사람의 마음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심지어, 스스로의 마음조차도 모르는 인간이기에 그럴 가능성조차 없을 것이다. 호르두발은 마음을 다해 가족을 생각하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폴라냐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는 살았을까. 인간의 삶처럼 마음 역시도 결말을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앞뒤가 같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운 전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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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농원 술래잡기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5
정기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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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있어야 할 것을 있어야 할 자리에.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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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발 붙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니, 훨씬 더 공감한다.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들을 읽으면서도 '현재의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어 늘 감상을 남긴다. 예전에는 이런 이유로 소설이 아닌 비문학 계열의 책들을 즐겨 읽었다. 비교적 직관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장르를 불문하고 읽다가, 소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그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소설의 세계도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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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게 다가왔던 이 책은 정기현 작가님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보다는 출판사 편집자로 더 익숙한 분이라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고, 출간된 작품도 꾸준히 찾아 읽었다. 단편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과 경장편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는 그동안 매체로 접했던 작가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서 인상 깊었다. 이번 신작도 큰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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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세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기정이라는 인물이다.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 향주는 작은 시골 동네로, 살구나무를 많이 재배하는 듯하다. 우연히 미용실에서 마주한 이후로 자주 만나게 되는 선열, 과수원 주인 박정김, 신문 스크랩이라는 이상한 업무를 맡기는 세무사 문종일 등 기정을 둘러싼 인물들, 그리고 향주에서 벌어지는 살구나무 절도 사건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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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술술 읽혔지만, 조금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배경이 비교적 고정되어 있고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행동만큼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종잡기 어려웠고, 이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데 한참 걸렸다. 밝고 통통 튀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이 이야기가 뜻밖의 재미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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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바로 그 인물들의 행동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젊은 여성, 시골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노년의 여성, 살구나무를 키우는 남성, 머리숱을 걱정하는 미혼 남성까지 배경만 놓고 보면 이들은 그저 지나가는 시민일 뿐이다. 그런데 배경 너머로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같이 이상하다. 익숙함과 기괴함 사이에서 내내 뭐라 말하기 애매한 감정이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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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일상 속의 뒤틀린 비현실. 평범한 인물들이 벌이는 일들은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다. 가상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익숙해질 즈음,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일도 기정이 맞닥뜨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결국 인생은 살구 농원의 술래잡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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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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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희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국가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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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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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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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흥미로운 글을 하나 보았다. '이 여권을 소지한 대한민국 국민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와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라는 여권 문구에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을 가진 인터넷 글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 온 나에게는 당연한 문장이었는데, 그 글을 읽고 나니 새롭게 다가왔다. T 성향 탓인지 눈물보다는 깨달음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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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희생시킨 국가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은 유즈키 유코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장르 소설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가장 좋아한다. 나카야마 시치리 작가의 작품을 즐겨 읽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국가의 안녕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출판사 소개 문구를 보자마자 내 취향이겠다는 감이 왔다. 큰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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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현경 홍보과 직원 이즈미다. 여대생이 스토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경찰이 부실하게 대응했고, 심지어 조사해야 될 시기에 야유회를 갔다는 사실이 기사로 밝혀지면서 현경은 거센 비난에 휩싸인다. 이즈미는 지카에게 야유회 이야기를 흘린 것이 화근이었다고 여기고 이를 추궁하지만, 지카는 끝까지 부인한다. 그러다 지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설은 특종과 친구의 죽음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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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일본 경찰 체계가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나왔지만, 아예 정보를 모르고 있더라도 충분히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찾는 것이 주요 내용이기는 하지만 추리 장르의 서사보다는 인물 사이에 긴장감을 주는 스릴러 장르에 조금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가지의 맛을 전부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분명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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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공직의 폐쇄성이 인상적이었다. 무고한 여대생이 살해당한 것은 뉴스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큰 사건이다. 심지어 스토커에게 쫓기고 있을 시기에 여대생의 부모는 경찰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 아니라 직무유기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였다. 분명 국민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그 대처에 소극적이었다. 내부에서도 섣불리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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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와 그녀의 동료들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칠수록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아픈 과거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동안 보고 들었던 수많은 국민들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과연 다수 국민의 안전과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소수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아도 괜찮은 것일까. 국가의 권력 아래 희생당했던 이즈미의 세계로부터 현실이 보인다. 부디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시작해 끝나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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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묘묘 부동산 ㅣ 기기묘묘
박혜연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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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우연히 내린 변덕스러운 결정이 모든 구원의 시작이었음을.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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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행복을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듯하다. 살면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거의 손에 꼽는다. 그것도 서른이 넘은 이후에 체감하게 되었다. 행복을 소소한 것에서부터 찾아야 한다는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머릿속으로만 기억할 뿐이다. 그게 막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불행하냐고 여기느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다. 이 정도로 살아가는 것은 꽤나 만족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 행복과 불행은 반의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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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행운을 되묻는 이 책은 박혜연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전작이었던 <기기묘묘 방랑길>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아 여유가 생길 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우연히 기기묘묘의 새로운 시리즈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SNS로 접했다. 전작을 건너뛰고 신작부터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선택했다. 요즈음 인류애가 사라지는 작품들만 읽었던 터라 기대감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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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연준이라는 인물로,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혈혈단신으로 어렵게 살아가던 연준은 어려울 때 찾아오라고 했던 스님을 만나기 위해 절로 향한다. 그곳에서 주지 스님의 공격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단야를 만난다. 단야는 연준의 목숨을 구해 줄 뿐만 아니라, 그가 '귀구 부동산'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부동산의 유일한 인간 연준이 괴이들과 부딪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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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렵게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줄거리를 따라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인물과 사건, 그리고 이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을 머릿속에 그리느라 속도가 더디게 흘러갔다. 특히, 우리가 아는 부동산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한다는 설정에서 판타지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 특유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판타지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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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연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누가 봐도 불행하다고 할 만큼 안타까웠다. 부모님을 잃은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을 텐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단야에게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 공감이 갔다. 어두운 상황에 비해 경쾌하고도 밝게 그려졌다는 게 신선했다. 오히려 우울하게 그려졌다면 몰입이 어려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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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운. 우연히 깐 봉지에서 사탕 두 개가 나올 때 행운을 느끼는 것보다 갑자기 끼어든 차량에 불운을 경험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운을 쫓기보다는 불운을 찾는 데 더 익숙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마저 든다. 두 단어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될까. 이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되짚어 생각하다 보면, 그렇게 멀지는 않은 듯하다. 연준이 불운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듯, 불운의 먹구름 사이로 행운의 뭉게구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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