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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농원 술래잡기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5
정기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있어야 할 것을 있어야 할 자리에. / p.228
현실에 발 붙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니, 훨씬 더 공감한다.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들을 읽으면서도 '현재의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어 늘 감상을 남긴다. 예전에는 이런 이유로 소설이 아닌 비문학 계열의 책들을 즐겨 읽었다. 비교적 직관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장르를 불문하고 읽다가, 소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그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소설의 세계도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된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게 다가왔던 이 책은 정기현 작가님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보다는 출판사 편집자로 더 익숙한 분이라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고, 출간된 작품도 꾸준히 찾아 읽었다. 단편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과 경장편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는 그동안 매체로 접했던 작가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서 인상 깊었다. 이번 신작도 큰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겼다.
소설의 주인공은 세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기정이라는 인물이다.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 향주는 작은 시골 동네로, 살구나무를 많이 재배하는 듯하다. 우연히 미용실에서 마주한 이후로 자주 만나게 되는 선열, 과수원 주인 박정김, 신문 스크랩이라는 이상한 업무를 맡기는 세무사 문종일 등 기정을 둘러싼 인물들, 그리고 향주에서 벌어지는 살구나무 절도 사건을 따라간다.
전반적으로 술술 읽혔지만, 조금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배경이 비교적 고정되어 있고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행동만큼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종잡기 어려웠고, 이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데 한참 걸렸다. 밝고 통통 튀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이 이야기가 뜻밖의 재미로 다가올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로 그 인물들의 행동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젊은 여성, 시골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노년의 여성, 살구나무를 키우는 남성, 머리숱을 걱정하는 미혼 남성까지 배경만 놓고 보면 이들은 그저 지나가는 시민일 뿐이다. 그런데 배경 너머로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같이 이상하다. 익숙함과 기괴함 사이에서 내내 뭐라 말하기 애매한 감정이 따라다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일상 속의 뒤틀린 비현실. 평범한 인물들이 벌이는 일들은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다. 가상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익숙해질 즈음,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일도 기정이 맞닥뜨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결국 인생은 살구 농원의 술래잡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