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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까지 다섯 걸음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평점 :




인간은 말이지, 고통이나 손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지만, 불공정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 p.13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사랑하게 되는 작가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닐까. 장르의 팬이 따로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 나 역시 그 중 하나의 사람이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호불호가 나누어져 있다. <노르웨이의 숲>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불호에서 보통 수준을 넘나들었는데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생 에세이 수준으로 좋았다.
이 책은 장강명 작가님의 소설집이다. 한국 작가님들 중에서는 바로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들이 그렇다. 물론, 하루키만큼이나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에 실린 작품이나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는 실린 작품들은 보통과 불호 딱 그 중간이었다. 반면, <미세 좌절의 시대>는 너무 좋은 감상을 남겼던 터라 신작인 <먼저 온 미래>도 빠른 시일 내에 읽을 계획이다. 소설 신작은 반신반의로 읽게 되었다.
소설은 종말이 다가오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부정, 절망, 타협, 수용,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섯 챕터로 나누어 짧은 소설이 네 편에서 다섯 편 정도 실려 있으며, 각 챕터의 첫 작품은 종말을 맞이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연작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렇게 총 스무 편의 작품이 실렸는데 전체적으로 SF 장르여서 흥미롭게 골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술술 읽혀지면서도 어려웠다.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는 크게 상상이 안 되거나 너무나 어려운 지식이 등장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 작품집은 전자에 속했다. 종말이라는 단어 자체가 체감상 너무 멀게 다가온 탓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고대 설화만큼이나 먼 이야기로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딱 다가오기보다는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작품이었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개인적으로 <종말>로 시작되는 연작 소설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종말을 맞이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부정하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는 수단에 총 오백 명을 뽑는다고 하는데 과학자와 관련 지식인들을 위주로 선발한다는 소식에 화자는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한다. 차라리 무작위가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후로 종말을 맞이하는 과학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시점으로 점차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 연작 소설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퀴블로 로스의 5단계 이론'이다. 대학교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처음 접했는데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으로 심리가 변화한다는 이론을 배웠다. 물론, 작품에서는 '부정-절망-타협-수용-사랑'으로 전개가 되지만 현실로 피부에 닿을 수 있는 사례를 찾으려는 본능 때문인지 몰라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이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말과 투병은 비슷한 감정으로 다가올까. 질병을 부정하다가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운명에 타협하면서 수용하게 되고, 마침내 질병을 인정하게 되는 일. 물론, 질병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작가님의 부탁을 다시금 되새기고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