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목표는 독자가 캐릭터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의 여정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독자가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캐릭터가 목표를 이루기를, 그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에 성공한다면,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동기화가 일어난다.
캐릭터가 겪는 감정적 동요를 독자도 함께 경험하고, 캐릭터가철학적, 윤리적 깨달음에 이를 때는 독자 또한 머리에 전구가 켜지듯 무언가를 알게 된다. - P49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곱씹다가, 문득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일부가 변화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것을 독자의 캐릭터 아크라고 부른다. - P49

캐릭터의 성격을 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의 강점이 곧 약점이 되게 하는 것이다. - P53

소설 속 캐릭터의 트라우마(혹은 흑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인물의 반사적인 반응과, 미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중요한 사건을 ‘영혼의 상처‘라고 부른다. - P63

이야기 속 히어로는 때로 다른 캐릭터들의 개별적 에너지와 특징을 끌어모아 통합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히어로는 여정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캐릭터에게서 배울 점을 취하고 배운 것을 통합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 P76

도전자는 표면적으로 히어로가 극복해야 할 신체적, 정신적도전을 제시한다. 하지만 표면 아래에 있는 모든 요소는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자. 히어로가 도전자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이야기의 주제와 히어로의 특징(이자 결점)을 은은히 드러내야 한다. 히어로가 극복해야 하는 바로 그 약점을시험해야 하는 것이다. 히어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험에 응하고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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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다음 세 가지를 절대로 직접 말해선 안 된다. 책의 주제, 자신의 깨달음, 자신의 감정. - P10

완벽한 히어로에게 흠이 있다니, 그게 말이 돼?
말이 된다. 인간이니까. 우리의 히어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껴 네 번째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잔디밭에 내던졌다가도, 이내 허리를 굽혀 주섬주섬 다시 반지를 찾는 인물이다. 우리의 히어로는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후회하고, 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길을 헤매는 인물이다. - P19

주제는 히어로가 빌런을 물리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변화와 연관이 있으며, 히어로가 겪는 변화는 그가 승리를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결함과 연관이 있다.
결함, 변화, 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를 건드리면 나머지도 따라 움직인다. 독자는 본능적으로 그 연결을 보고, 느끼고, 즐긴다. 그러니 독자의 마음을 뺏고 싶다면 결함, 변화,
주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구성해야 한다. - P22

v 소설의 주제는 질문을 던진다. 히어로는 주제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주제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빌런은 주제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존재로, 히어로가 질문에 답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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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아, 이런 경험은 배우 인생에 한 번 이상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아. 네가 만들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지안이가 네 손을 잡고 이렇게 끌고 가주잖니, 그냥 너희 둘이 원래 알았던 사람인 것처럼 손을 잡고 걷고 있잖니. 나중에 정말 드문 경험으로 남을 지금 이 시간을 느껴봐." - P382

「나의 아저씨」 팀에게

드라마 작가로서 인정하는 게 있습니다. 드라마가 잘되고 못되고는 제공에 있는 것이아니라 글을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분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종이에 기역 니은디귿으로 엮은 글을 이백 명의 배우와 스태프분들이 모여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현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작업입니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 팀은 단 한 명에게서도 어떤어긋남이나 누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린 모두 이 드라마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신기해서 제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전생에 이 일을 하기로 약속했던 사람들 같다고, 그래서 때가되어 아무렇지 않게 모이고 멋지게 자기 몫을 다하고는 또 아무렇지 않게 헤어졌다고.
참으로 멋진 팀이었습니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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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타락‘이죠?"
탄재가 물었다. 그때 나는 탄재의 마음에 떠오른 사람을 보았다.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주선 전체가 같은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우주선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내 모든 분자가 같은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 전체가 나라는 걸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요."
‘아만‘.
내 첫 분열자. 첫 3세대. 3세대 중의 첫 선지자. 처음으로 타락한 선지자. ‘타락‘을 세상에 퍼트린 선지자.
‘아만‘.
나는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탄재는 듣지 못했지만 우주선의 모든 사물이 쑥덕댄다. - P57

"허상일 뿐인 육신을 실체라 믿게 되는 거요. 세계의 부분일 뿐인 현재의 자신을 자아의 전부라 믿게 되는 거요"
탄재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만 선생님처럼요."

-기억을 지우고 새 세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만의 기운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니까요. 지식을 가지고는 배울 수가 없어요. 생명 전체로 배움을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 한가운데에 학교를 만들어요. 지식을 전부 지우고 생생한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겁니다." - P58

"기억을 지운다는 건 특이한 발상이로군."
나는 아만에게 화답했다.
"지금까지는 인격을 분리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아만은 예측할 수 없는 아이였다. 끝도 없이 새로운 발상을 쏟아내었다. 열정적이었고 활력 넘쳤다. 어떻게 이런 인격이 나에게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열하기 전의 우리 ‘전체‘는 거대한 관념의 덩어리였을 뿐이다. 목적도 변화도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운 일 자체가 없으므로, 분열해보자는 발상이 떠오른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 P59

첫 분열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거기서 새로이 재분열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많은 개체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열 명 정도만 해도 충분히 다채롭지 않은가? 스물, 서른 명쯤 되면 그 난잡한 인격을 나중에 다 취합이나 할 수 있을까?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내가 시범적으로 2차 분열을 했다. 1차 분열 당시에는 혹시 잘못되면 나를 중심으로 몸을 되돌릴 생각이었으니 이번에는 거꾸로 했다. 잘못되면 다른 이들이 다 같이 도와서 나와 아만을 합일해주기로 했다. 요령이 없던 나는 거의 몸의 반을 떼어주었고 기억상실과 인격의 변화를 겪었다. 모체와 연속성을 잃은 나는 기존의 ‘아이사타‘라는 이름을 이어가지 못하고 새로이 나반으로 개명했다.
아만은 내 첫 아이자 우리 모두의 첫 아이였다. 하나였던 시절과 연속성이 없는 첫 개체. 태고의 시절에 미련이 없는 첫 세대. 아만은 태어난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신나게 놀까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만은 분열이 성공적임을 알리는 신호였고 다채로운 미래를 예고하는 찬란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면 어떻게 학교에서 돌아오지?"
복희는 아만이 또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하려나 궁금해하며 물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모두 어렸고 구별성이 적었으며, 모두 사이가 좋았다. - P60

"졸업은 해야지. 영원히 학생으로 살 수는 없잖아. 기억이 없으면 몸을 영자화하는 방법도 잊을 텐데 어떻게 돌아오지?"
‘언어‘도 신나는 놀이였다. 일단 생각의 소통을 막고 나니 새로 소통 도구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생겼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다발의 기호와 상징을 짜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통이 완전했을 때엔 교류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제한과 불편이 기쁨과 재미를 가져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승‘을 만들자는 것은 아만의 제안이었다. 적당한 규칙을 갖고 놀다가 나오는 특별한 장소를 만들자고 했다. 우리만의 게임의 규칙이 돌아가는 공간을
"누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면 되겠지."
내 말에 아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명계의 존재가 학생들에게 알려져요. 학교와 명계 사이에서 영자 이외의 다른 것이 교류해선 안 돼요."
아만은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려 간단한 구조물을 만들어 보였다. 네 종류의 염기 물질을 문자로 쓰는 기록 장치였다. 염기의 접합 성질 때문에 꼬여 있는 나선형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나중에 탄재가 찾아내어 ‘DNA‘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 소멸시한을 기록해서 몸 안에 갖고 들어가도록 해요." - P61

아만은 이런 생각을 해낸 자신이 사랑스럽고 기특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답했다. 아만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는 마음은 우리가 분열로 얻은 새로운 배움이요 환희였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영자화해서 육신에서 빠져나와서 명계로 돌아오도록 제한 시간을 넣는 거예요. 예정된 끝을 만들어두는 거죠. 그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우리는 아직 그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이 뭔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첫 등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학기가 끝나면 낙제한 열등생처럼 민망해하며 돌아왔다. 지성을 지우는 것은 창피하고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생이 허무한 시간 낭비였다.
우리는 돌아올 때마다 이승의 구조를 어떻게 다시 짜야할지 토론했다. 초기의 하계는 명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곤죽으로 뒤섞여 있었고 불안정했고 말랑말랑했다. 간혹 작은 땅덩이를 만들고 뱀이나 거북이 같은 생물을 밑에 받쳐두거나 거대한 나무를 한가운데 박아두기도 해보았지만다 시원찮았다. 우리는 멀뚱히 세월만 보내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하려고 뭘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 P62

우리는 처음 장난감을 갖게 된 아기처럼 멋대로 몸을 굴렸다. 심심풀이로 제 몸을 벼랑아래에 내던지거나 떨어뜨려 부순 뒤에 왜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신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면 영자화한다는 조건은 뺄 수 없어요."
아만이 말했다.
"썩어가는 몸을 끌고 다니는 건 낭비예요. 일단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게 맞아요."
"알아. 하지만 언제 우리가 몸이 훼손되지 않게 조심해봤어야지."
우리는 스승 앞에서 야단맞는 제자들처럼 난처해 하며 답했다. 아만은 열심히 궁리했다.
"신체 훼손을 회피하도록 해 봐야겠어요. 아주 싫은 기분이 들어야 해요. 어디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게……."
내가 제일 먼저 그 조건을 추가한 유전자를 몸에 심고 들어갔다. 덕분에 몸은 좀 더 복잡해졌다. 통각 수용기를 달았고 감각 신경을 통해 외부 신호를 전하게 만들었다.
내가 하나의 생을 살고 나왔을 때 아만은 한참 나를 피했다. 한동안 그 자신이 완전한 실패작이고 내가 자신을 합일해서 소멸시켜버릴 거라고 믿어 마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그렇게 될 줄 몰랐어요." - P63

당시 우리가 명계에서도 형체를 갖는 습관이 있었다면 아만은 틀림없이 얼굴이 벌게져서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의 모습은 모습이 연이어 변하는 빛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아파하실 줄 몰랐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괜찮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세상에, 그 고통이라니. 너무 끔찍해요."
"아니, 이건 중요해. 뭐랄까, 정말 상상도…………."
생생한 삶의 기억이 몰아쳐 나는 잠시 더듬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몸부림쳤고 살고 싶다는 욕망에 발버둥 쳤다. 물어뜯 듯이 삶을 추구했다.
"진짜 배움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격렬하게 뭘 추구해 본 적도 없어. 그렇게 모든 것이 생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잡한 세계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쾌감도 좀 넣어봐야겠구나."
아만은 다시 부끄러워했고 용서를 빌었다.
"둘을 잘 조화시키면 기본적인 삶의 방향은 유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들어갈 때마다 하나씩 추가했다. 굶주림은 에너지 공급을 잊지 않도록 넣었다. 미각은 몸에 좋은 것을 찾으라고 넣었다. 따듯하고 찬 것을 가리게 했다. - P64

공포를 심어 아직 닥치지 않은 위험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어둠이나 위험한 짐승, 독충에 대한 공포를 넣었다. 지식 없이도 생존이 가능하도록 성긴 지침을 넣었다.
짝을 지어 두 개의 유전자를 합하자는 생각은 한 번의 실수로 생태계 전체가 몰살했을 때 했다. 좋은 종자를 결합하는 것보다 무작위 결합이 더 유리하다는 것도 터득했다. 고통만큼이나 격렬한 애정의 욕구를 넣었다. 종족보존의 욕구와 가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도 넣었다. 우리는 계속 개입했다. 지성이 자라날수록 진정한 집에 대한 회귀본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삶보다 내세를 귀하게여기는 유행이 돌았다.
어느 생에선가 아만과 내가 짝을 짓고 돌아왔을 때였다.
명계에 돌아오자마자 기다리던 아만이 환호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가 조류와 파충류가 섞인, 깃털이 달린 생물이었을 무렵이었다.
"살아 있었어!"
아만은 전생을 거의 그대로 흉내 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목을 물고 혀로 핥고 꼬리를 파닥이며 몸을 비벼대었다.
"다시 만날 줄 알았어! 돌아올 줄 알았다고! 내세는 있었어. 삶은 영원해, 영원하다고!"
"아만, 잠깐만 잠깐 진정해." - P65

정말 얘랑 함께 있으면 심심할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웃으며 아만을 뜯어놓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세는 당연히 있지, 새삼 왜 이러는 거냐?"
아만은 합일의 욕구가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내 분자를 흡수해 삼켜버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한참 뒤에야 내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아만, 혹시 아직도…………."
내가 아만의 몸을 탐색해보려 하자 아만은 고개를 저었다.
"유전자는 없어요. 당연히 하계에서 썩어 사라졌죠."
"그런데 왜………."
이 격렬한 생존과 짝짓기의 욕구. 애정과 소통의 갈망, 이건 대체 무슨 뜻이지? 왜 명계에서도 하계의 욕망이 이어지는 거지?
"선생님,"
아만은 열에 들떠 말했다.
"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환희라니, 그토록 격렬한 마음의 불꽃이라니.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이라니, 자신을 잊을 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니, 타인을 그처럼 자기자신처럼 여기다니."
하계에서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 P66

아만의 말은 내게 ‘아아, 선생님, 1 더하기 1이 2였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만, 너와 나는 같은 것이다. 타인이 아니야."
"예, 알아요. 하지만 실감하진 않죠. 여기서는 내 몸이 내 것이라는 것만큼이나 진부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그 생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실감했어요. 믿을 수가 없기에 더욱 실감했어요. 선생님은 안 그러셨나요?"
나는 지난 생을 떠올렸다. 나는 숲을 굴러다니며 먹을 것과 잠잘 곳 외에는 별 생각이 없던 깃털 짐승이었다. 평생의 반려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정신이 나가 숲을 쏘다녔다. 먹을 생각도 잘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반려가 있는 생은 기쁨이었고 그이가 없는 생은 무엇 하나 의미를 갖지 않았다. 반쯤은 자살처럼 생을 마감했다. 나자신이 사라졌다 한들 그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지. 하지만 호르몬의 영향도 있고, 짝짓기 본능과 상실의 슬픔은 어느 정도는 편의를 위해 조작한 것도 있지않니. 아무래도 진짜는 아니니까."
그러자 아만은 하계에서처럼 반짝이는 짐승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의 기쁨에 홀려 있는 원시적인 영혼이 그안에서 빛을 발했다.
"선생님."
아만은 작은 짐승의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 삶을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면, 대체 삶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입니까?"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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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재가 은은하게 빛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도망쳤는지 회고하며 비웃으실 거예요."
"안다."
내가 답했다.
"알아…………."
"그럼 왜 가려고 해요?"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존재, 모든 지식을 합일한 자가 이처럼 작은 존재의 머릿속 하나 들여다보지못하다니. 아마 상대도 비슷한 경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존재가 이처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니.
"살고 싶다."
내가 말했다. 탄재는 못 알아듣는 얼굴을 했다.
"한 생일 뿐이라도 좋아. 살고 싶다. 어차피 생은 하나 뿐이고 그걸로 족하다. 네가 이 목숨을 주었으니 이 생 하나는 살아야 하겠다." - P193

우리는 어깨를 기대었다. 눈썹을 만지고 이마를 맞대었다. 눈을 들여다보고 젖은 머리를 쓸었다. 뺨을 쓰다듬고 입을 포갰다. 성감대에 심어 놓은 예민한 감각, 우리가 서로 제 짝을 만나라고 넣은 프로그램, 술이나 마약과 다르지않은 화학반응,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나는 생각했다. 그때 내 혈관과 신경계를 흐르던 화학물질마저도 나 자신이며 내일부라고, 쏟아지는 빗줄기도 내가 서 있던 그 거리도 밟고 선 땅도, 그 세상 전체도, 나와함께 했던 그 사람도 나고 내 일부라고. 그러니 그 모두가 현실이라고 아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내가 만나는 무엇 하나 내가 아니기에 내가 사랑하고 연민하며, 내 삶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승에 미혹된 선지자, 생존 프로그램이 왜곡해서 전하는 감각을 순수한 진실이라고 믿는 타락한 자.
내가 이 타락을 향유하니, 나를 어디로든 이끌라, 그 또한 하나의 배움일 것이니. - P196

타락

하계에 깊이 몰입한 이들에게 생겨나는 일종의 질병. 통상 아만을 최초의 타락자로 본다. 진실인 명계보다 일종의 가상현실인 하계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다 못해 하계가 진짜고 명계가 허상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타락의 특징은 다양한데, 현재의 3차원 육체의 경계가 자신의 진짜 경계라고 믿고, 자신과 타인을 완전히 구분해 생각한다. 현재의 일시적인 인격에 과하게 집착하여 그 인격의 종말을 자신의 소멸로 해석한다. 현재 상태에 집착하기에 몸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합일을 위한 설득이 통하지않을 때도 많다.
타락한 개체는 합일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치유법이지만, 합일한 쪽이 오염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로 격리한 뒤 치유되기를 기다려 합일한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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