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재가 은은하게 빛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도망쳤는지 회고하며 비웃으실 거예요."
"안다."
내가 답했다.
"알아…………."
"그럼 왜 가려고 해요?"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존재, 모든 지식을 합일한 자가 이처럼 작은 존재의 머릿속 하나 들여다보지못하다니. 아마 상대도 비슷한 경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존재가 이처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니.
"살고 싶다."
내가 말했다. 탄재는 못 알아듣는 얼굴을 했다.
"한 생일 뿐이라도 좋아. 살고 싶다. 어차피 생은 하나 뿐이고 그걸로 족하다. 네가 이 목숨을 주었으니 이 생 하나는 살아야 하겠다." - P193

우리는 어깨를 기대었다. 눈썹을 만지고 이마를 맞대었다. 눈을 들여다보고 젖은 머리를 쓸었다. 뺨을 쓰다듬고 입을 포갰다. 성감대에 심어 놓은 예민한 감각, 우리가 서로 제 짝을 만나라고 넣은 프로그램, 술이나 마약과 다르지않은 화학반응,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나는 생각했다. 그때 내 혈관과 신경계를 흐르던 화학물질마저도 나 자신이며 내일부라고, 쏟아지는 빗줄기도 내가 서 있던 그 거리도 밟고 선 땅도, 그 세상 전체도, 나와함께 했던 그 사람도 나고 내 일부라고. 그러니 그 모두가 현실이라고 아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내가 만나는 무엇 하나 내가 아니기에 내가 사랑하고 연민하며, 내 삶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승에 미혹된 선지자, 생존 프로그램이 왜곡해서 전하는 감각을 순수한 진실이라고 믿는 타락한 자.
내가 이 타락을 향유하니, 나를 어디로든 이끌라, 그 또한 하나의 배움일 것이니. - P196

타락

하계에 깊이 몰입한 이들에게 생겨나는 일종의 질병. 통상 아만을 최초의 타락자로 본다. 진실인 명계보다 일종의 가상현실인 하계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다 못해 하계가 진짜고 명계가 허상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타락의 특징은 다양한데, 현재의 3차원 육체의 경계가 자신의 진짜 경계라고 믿고, 자신과 타인을 완전히 구분해 생각한다. 현재의 일시적인 인격에 과하게 집착하여 그 인격의 종말을 자신의 소멸로 해석한다. 현재 상태에 집착하기에 몸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합일을 위한 설득이 통하지않을 때도 많다.
타락한 개체는 합일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치유법이지만, 합일한 쪽이 오염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로 격리한 뒤 치유되기를 기다려 합일한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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