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은 책임을 나누고 측정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고 했다.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남들과 함께해야만 한다고도 했다. 생각해보면 책임을 다해야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다. 나는 나대로 계속해서 배우고, 알려줄 수 있는 이들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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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에 공헌하겠다거나 다른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뭔가 더 발전해봐야 지구만 망가진다. 모두 다 저 잘난 맛에 자기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살아왔고, 부수적으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거나 또 감당할 만큼만 살아왔다고 본다. - P242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쓸 무렵 자신의 주인공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세 가지 요소로 유머, 친절함, 자기 억제를 들었다. 이 세 가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라는 거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모순, 자아, 공포 따위는 쓰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쓸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부정적인 요소는 잠시 접어두고, 유머와 친절함, 자기 억제라는 덕목으로 가볍게 날아올라보는 건 어떨까? 심각한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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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뜬금없이 물메기탕 맛있게 끓이는 요리 강좌가 펼쳐지고, 요즘은 김장용 배추가 해남산이 좋냐 강원도 고랭지 배추가 좋냐 비교검토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친정동네 고추를 자랑하다가 공동구매까지 한다. 지켜보면 공동구매 목록도 다양하다. 남해의 젓갈, 또 어디의 건미역, 김, 곶감, 고사리, 칡즙 이외에도 그때그때 종류도 다양하다. 주로 타지에서 인연 따라 부산으로 온 사람이 자신의친정 동네나 잘 아는 사람의 농장을 연결하는 구조다. 또누군가 몸의 어디가 아프다 하면 치료 방법과 효과 있는병원과 여러 대처할 의견이 줄줄이 이어지고, 근육통이 있거나 허리가 아프다면 사우나의 뜨거운 옥돌벽에 수건을 감고 기대는 게 병원의 물리치료보다 낫다며 권한다. - P141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앞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 주변에는 큰 돌을 편평하게 놓고 그 돌을 파내어 돌학이라는 걸 만들어두었는데, 우리는 이걸 호박샘이라 불렀다. 호박샘은 요새로 치자면 믹서기 역할을 했는데, 뭔가를 으깰 때나 아니면 작은 절구 용도로 사용했다. 그옆에는 맷돌이 있었는데, 이 세 가지는 우리집에 있는 것이지만 동네 사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당시는 우물물을 길어다 식수나 물이 필요한 모든 용처에 사용했기 때문에 동네에서 우리집은 우물집이라 불렸고, 동네 사람 누구라도 우물을 길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어른들은 ‘물왕대복‘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지금도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물 인심이 좋아야 큰 복을받는다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일에도 법도가 있으므로 해 지고 난 뒤에는 우물물을 길러 오지 않았고, 아침에 아버지가 나가시면서 대문을 활짝 열어두어야만 우물물을 길러 올 수 있었다. 그러니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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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불운은 늘 기분 나쁘게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잊으면 말도 안 되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우리를 환기시키면서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만큼 널 흔들어놓을 수 있어. 쉽게 죽일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난데없이 공격받으며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삼팔선을 넘은 할아버지의 불운에서 태어난 것처럼. 나의 뿌리는 불운이요, 나를 키운 것도 불운이요, 내가 끝내 다다를 결말 역시 불운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겠지만 말이다. - P130

개는 손으로 그리워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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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세대의 음악을 자연스레 함께 듣는 행운은 생각보다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국세청 모르게 젊은 부자들이 물려받는 유산과도 같다. - P44

폴과 린다,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눈에서 눈으로 사슬 같은 게 매달리지 않았나 싶게 이어져 있었다. 사랑스럽다면 사랑스럽고 끔찍하다면 끔찍할 정도의 연결선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카메라 이쪽의 린다를 볼 때에, 지금의 우리까지 덜컹할 정도라면 실제로는 더했을 것이다.
린다와 폴이 아직 사랑에 빠지기 전의 사진들만 봐도 뒤의 일들을 예감할 수밖에 없다. 렌즈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찍은 지 삼십년, 사십년이 된 사진들인데도 그 모든 감정들이 훼손되지 않았다. 어두운 곳에 있는 폴, 빛을 받고 있는 폴, 멤버들과 있는 폴, 혼자 있는 폴, 무대 위의 폴, 휴가지의 폴, 턱수염을 기른 폴, 메이크업을 한 폴, 모자를 쓴 폴, 거품에 잠긴 폴, 가까운 폴, 원경의 폴,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들, 두꺼운 스웨터와 털북숭이 애완동물들.
뒤늦게 이해했다. 린다 매카트니가 1998년, 내가 주완이를 만나기 일년 전에 죽고 나서 폴 매카트니가 그녀를 닮은 여자들과 거듭 결혼해야 했던 이유를. 현명한 결정이 아니었음에도 자녀들이 폴 매카트니를 계속 지지했던 이유를. 그들이 세계에 남기고 있는 흔적들을 두 사람과 같은 관계는 일생을 지배한다. 그런 사랑이 끝나면 끝나도 끝난 게 아니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 P48

나도 요리를 싫어했었다. 보고 자란 게 그것뿐이라 어설프게 흉내 낼 수 있을 뿐, 요리와 되도록 멀게 살고 싶었다. 불도 싫고 증기도 싫고 부엌 냄새도 싫었다. 마를 새 없는 물기 때문에 손등이 터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충분히 싫어하면 그 삶이 나를 비켜갈 거라 마음먹고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주들이 맛있게 먹었으므로 부지런히 식자재를 훔쳐 날랐고, 칼로 통통통 잔재주를 부리면서 두 사람을 홀렸으며, 불을 줄였다 올렸다 잘난 척을 했다. 포만감에서 비롯된 애정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 P54

감독들과는 늘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애틋하지 않다는 의미에서다. 감독들이 대부분은 함께 지내기 매우 힘든 사람들이어서도 그렇지만, 내가 권위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타입인 게 더 컸다.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니 원활히 작동하는 권위란 건 좀처럼 목격하기 어렵고 그런 의심으로 나는 어른을, 감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수직적인 구조에서 감독들에 대한 나의 냉랭한 태도는 다른 스태프들에게 호감을 살 정도였다. 굽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평판을 얻었다. - P104

사실 그건 여차하면 그만두고 엄마랑 할머니 밑에 기어들어야지 하는 건성의 마음 때문이었지 실력이랑은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영화 해서 나오는 돈은 너무 적어서 뒤늦게나마 받을 때마다 코웃음이 나왔다. 떼이지만 않으면 다행인 그런 돈 때문에 안 그래도 매머드만한 감독들의 에고를 더 키워주긴 싫었다. 한 사람쯤 아부를 안 해줘야 덜 쿵쾅거린다.
거짓된 평판이란 건 거품을 끼고 데굴데굴 몸을 키워 서어느새 경력이 된다. 남들도 다 그렇게 지내는 것 같아서 나도 가만있었다. 정말로 실력파인 것처럼.
언젠가는 함께 작업한 감독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도있다.
"추악한 것에서 눈을 피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 있어. 자기가 해놓은 걸 보면 말이야. 누구한테 배웠어?"
당신으로부터.
세계로부터.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말았다. 감독들이 못나봤자 더 나쁜 악당들은 따로 있었다. 당신이나 나나 이 진창에 같이 있지, 생각하며 말을 줄였다. - P105

나 : (내레이션) 정말로 놀라운 건, 종종 내 친구들과 똑같은 얼굴의 아이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누군가 이 세계에 같은 얼굴들을 계속 채워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운 것은 그 닮은 얼굴 뒤의 거의 다르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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