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타락‘이죠?"
탄재가 물었다. 그때 나는 탄재의 마음에 떠오른 사람을 보았다.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주선 전체가 같은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우주선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내 모든 분자가 같은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 전체가 나라는 걸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요."
‘아만‘.
내 첫 분열자. 첫 3세대. 3세대 중의 첫 선지자. 처음으로 타락한 선지자. ‘타락‘을 세상에 퍼트린 선지자.
‘아만‘.
나는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탄재는 듣지 못했지만 우주선의 모든 사물이 쑥덕댄다. - P57

"허상일 뿐인 육신을 실체라 믿게 되는 거요. 세계의 부분일 뿐인 현재의 자신을 자아의 전부라 믿게 되는 거요"
탄재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만 선생님처럼요."

-기억을 지우고 새 세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만의 기운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니까요. 지식을 가지고는 배울 수가 없어요. 생명 전체로 배움을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 한가운데에 학교를 만들어요. 지식을 전부 지우고 생생한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겁니다." - P58

"기억을 지운다는 건 특이한 발상이로군."
나는 아만에게 화답했다.
"지금까지는 인격을 분리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아만은 예측할 수 없는 아이였다. 끝도 없이 새로운 발상을 쏟아내었다. 열정적이었고 활력 넘쳤다. 어떻게 이런 인격이 나에게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열하기 전의 우리 ‘전체‘는 거대한 관념의 덩어리였을 뿐이다. 목적도 변화도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운 일 자체가 없으므로, 분열해보자는 발상이 떠오른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 P59

첫 분열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거기서 새로이 재분열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많은 개체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열 명 정도만 해도 충분히 다채롭지 않은가? 스물, 서른 명쯤 되면 그 난잡한 인격을 나중에 다 취합이나 할 수 있을까?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내가 시범적으로 2차 분열을 했다. 1차 분열 당시에는 혹시 잘못되면 나를 중심으로 몸을 되돌릴 생각이었으니 이번에는 거꾸로 했다. 잘못되면 다른 이들이 다 같이 도와서 나와 아만을 합일해주기로 했다. 요령이 없던 나는 거의 몸의 반을 떼어주었고 기억상실과 인격의 변화를 겪었다. 모체와 연속성을 잃은 나는 기존의 ‘아이사타‘라는 이름을 이어가지 못하고 새로이 나반으로 개명했다.
아만은 내 첫 아이자 우리 모두의 첫 아이였다. 하나였던 시절과 연속성이 없는 첫 개체. 태고의 시절에 미련이 없는 첫 세대. 아만은 태어난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신나게 놀까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만은 분열이 성공적임을 알리는 신호였고 다채로운 미래를 예고하는 찬란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면 어떻게 학교에서 돌아오지?"
복희는 아만이 또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하려나 궁금해하며 물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모두 어렸고 구별성이 적었으며, 모두 사이가 좋았다. - P60

"졸업은 해야지. 영원히 학생으로 살 수는 없잖아. 기억이 없으면 몸을 영자화하는 방법도 잊을 텐데 어떻게 돌아오지?"
‘언어‘도 신나는 놀이였다. 일단 생각의 소통을 막고 나니 새로 소통 도구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생겼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다발의 기호와 상징을 짜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통이 완전했을 때엔 교류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제한과 불편이 기쁨과 재미를 가져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승‘을 만들자는 것은 아만의 제안이었다. 적당한 규칙을 갖고 놀다가 나오는 특별한 장소를 만들자고 했다. 우리만의 게임의 규칙이 돌아가는 공간을
"누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면 되겠지."
내 말에 아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명계의 존재가 학생들에게 알려져요. 학교와 명계 사이에서 영자 이외의 다른 것이 교류해선 안 돼요."
아만은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려 간단한 구조물을 만들어 보였다. 네 종류의 염기 물질을 문자로 쓰는 기록 장치였다. 염기의 접합 성질 때문에 꼬여 있는 나선형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나중에 탄재가 찾아내어 ‘DNA‘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 소멸시한을 기록해서 몸 안에 갖고 들어가도록 해요." - P61

아만은 이런 생각을 해낸 자신이 사랑스럽고 기특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답했다. 아만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는 마음은 우리가 분열로 얻은 새로운 배움이요 환희였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영자화해서 육신에서 빠져나와서 명계로 돌아오도록 제한 시간을 넣는 거예요. 예정된 끝을 만들어두는 거죠. 그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우리는 아직 그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이 뭔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첫 등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학기가 끝나면 낙제한 열등생처럼 민망해하며 돌아왔다. 지성을 지우는 것은 창피하고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생이 허무한 시간 낭비였다.
우리는 돌아올 때마다 이승의 구조를 어떻게 다시 짜야할지 토론했다. 초기의 하계는 명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곤죽으로 뒤섞여 있었고 불안정했고 말랑말랑했다. 간혹 작은 땅덩이를 만들고 뱀이나 거북이 같은 생물을 밑에 받쳐두거나 거대한 나무를 한가운데 박아두기도 해보았지만다 시원찮았다. 우리는 멀뚱히 세월만 보내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하려고 뭘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 P62

우리는 처음 장난감을 갖게 된 아기처럼 멋대로 몸을 굴렸다. 심심풀이로 제 몸을 벼랑아래에 내던지거나 떨어뜨려 부순 뒤에 왜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신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면 영자화한다는 조건은 뺄 수 없어요."
아만이 말했다.
"썩어가는 몸을 끌고 다니는 건 낭비예요. 일단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게 맞아요."
"알아. 하지만 언제 우리가 몸이 훼손되지 않게 조심해봤어야지."
우리는 스승 앞에서 야단맞는 제자들처럼 난처해 하며 답했다. 아만은 열심히 궁리했다.
"신체 훼손을 회피하도록 해 봐야겠어요. 아주 싫은 기분이 들어야 해요. 어디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게……."
내가 제일 먼저 그 조건을 추가한 유전자를 몸에 심고 들어갔다. 덕분에 몸은 좀 더 복잡해졌다. 통각 수용기를 달았고 감각 신경을 통해 외부 신호를 전하게 만들었다.
내가 하나의 생을 살고 나왔을 때 아만은 한참 나를 피했다. 한동안 그 자신이 완전한 실패작이고 내가 자신을 합일해서 소멸시켜버릴 거라고 믿어 마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그렇게 될 줄 몰랐어요." - P63

당시 우리가 명계에서도 형체를 갖는 습관이 있었다면 아만은 틀림없이 얼굴이 벌게져서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의 모습은 모습이 연이어 변하는 빛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아파하실 줄 몰랐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괜찮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세상에, 그 고통이라니. 너무 끔찍해요."
"아니, 이건 중요해. 뭐랄까, 정말 상상도…………."
생생한 삶의 기억이 몰아쳐 나는 잠시 더듬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몸부림쳤고 살고 싶다는 욕망에 발버둥 쳤다. 물어뜯 듯이 삶을 추구했다.
"진짜 배움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격렬하게 뭘 추구해 본 적도 없어. 그렇게 모든 것이 생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잡한 세계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쾌감도 좀 넣어봐야겠구나."
아만은 다시 부끄러워했고 용서를 빌었다.
"둘을 잘 조화시키면 기본적인 삶의 방향은 유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들어갈 때마다 하나씩 추가했다. 굶주림은 에너지 공급을 잊지 않도록 넣었다. 미각은 몸에 좋은 것을 찾으라고 넣었다. 따듯하고 찬 것을 가리게 했다. - P64

공포를 심어 아직 닥치지 않은 위험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어둠이나 위험한 짐승, 독충에 대한 공포를 넣었다. 지식 없이도 생존이 가능하도록 성긴 지침을 넣었다.
짝을 지어 두 개의 유전자를 합하자는 생각은 한 번의 실수로 생태계 전체가 몰살했을 때 했다. 좋은 종자를 결합하는 것보다 무작위 결합이 더 유리하다는 것도 터득했다. 고통만큼이나 격렬한 애정의 욕구를 넣었다. 종족보존의 욕구와 가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도 넣었다. 우리는 계속 개입했다. 지성이 자라날수록 진정한 집에 대한 회귀본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삶보다 내세를 귀하게여기는 유행이 돌았다.
어느 생에선가 아만과 내가 짝을 짓고 돌아왔을 때였다.
명계에 돌아오자마자 기다리던 아만이 환호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가 조류와 파충류가 섞인, 깃털이 달린 생물이었을 무렵이었다.
"살아 있었어!"
아만은 전생을 거의 그대로 흉내 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목을 물고 혀로 핥고 꼬리를 파닥이며 몸을 비벼대었다.
"다시 만날 줄 알았어! 돌아올 줄 알았다고! 내세는 있었어. 삶은 영원해, 영원하다고!"
"아만, 잠깐만 잠깐 진정해." - P65

정말 얘랑 함께 있으면 심심할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웃으며 아만을 뜯어놓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세는 당연히 있지, 새삼 왜 이러는 거냐?"
아만은 합일의 욕구가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내 분자를 흡수해 삼켜버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한참 뒤에야 내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아만, 혹시 아직도…………."
내가 아만의 몸을 탐색해보려 하자 아만은 고개를 저었다.
"유전자는 없어요. 당연히 하계에서 썩어 사라졌죠."
"그런데 왜………."
이 격렬한 생존과 짝짓기의 욕구. 애정과 소통의 갈망, 이건 대체 무슨 뜻이지? 왜 명계에서도 하계의 욕망이 이어지는 거지?
"선생님,"
아만은 열에 들떠 말했다.
"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환희라니, 그토록 격렬한 마음의 불꽃이라니.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이라니, 자신을 잊을 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니, 타인을 그처럼 자기자신처럼 여기다니."
하계에서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 P66

아만의 말은 내게 ‘아아, 선생님, 1 더하기 1이 2였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만, 너와 나는 같은 것이다. 타인이 아니야."
"예, 알아요. 하지만 실감하진 않죠. 여기서는 내 몸이 내 것이라는 것만큼이나 진부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그 생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실감했어요. 믿을 수가 없기에 더욱 실감했어요. 선생님은 안 그러셨나요?"
나는 지난 생을 떠올렸다. 나는 숲을 굴러다니며 먹을 것과 잠잘 곳 외에는 별 생각이 없던 깃털 짐승이었다. 평생의 반려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정신이 나가 숲을 쏘다녔다. 먹을 생각도 잘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반려가 있는 생은 기쁨이었고 그이가 없는 생은 무엇 하나 의미를 갖지 않았다. 반쯤은 자살처럼 생을 마감했다. 나자신이 사라졌다 한들 그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지. 하지만 호르몬의 영향도 있고, 짝짓기 본능과 상실의 슬픔은 어느 정도는 편의를 위해 조작한 것도 있지않니. 아무래도 진짜는 아니니까."
그러자 아만은 하계에서처럼 반짝이는 짐승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의 기쁨에 홀려 있는 원시적인 영혼이 그안에서 빛을 발했다.
"선생님."
아만은 작은 짐승의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 삶을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면, 대체 삶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입니까?"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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