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내에게 찬탄을 받던 때가 있었다. ‘하긴 하는 남자‘도 그녀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오래전, 우리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에 아내에게 내가 왜 좋으냐고 묻자 그녀가 말했다.
"개중 형이 하긴 하는 남자라서."
나는 그 말이 좋았다. 하긴 하는 남자는 당위를 내세우는 남자와 무책임한 남자 사이에 있는 남자다. 하기로 했으면 해야만 하는고지식한 남자도 아니고, 한다고 해놓고선 안 하는 불성실한 남자도 아닌, 약간 힘을 뺀 채 나른하게 완수하는 하긴 하는 남자. - P19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책에 절대 밑줄도 안 긋고 개의귀도 안 만드는 사람이다. 그걸 수십 년간 봐놓고도 언제부턴가 아내는 내 책에 낙서를 한다. ‘잔치‘에 빨간 줄을 굵게 긋고 ‘옹립식‘이라고 쓰는 식이다. 곰 같은 둔함은 동지 부인 얻었을 때 받게 되는 천형이라던데, 정말 맞는 말이다.
더이상 마누라들은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정신, 자아, 때론 몸까지 모두 아웃소싱한다. 우리는 주인 자격을 잃었다. 딸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결국 문의 말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었다. 딸들은 사랑하는 혐오하는 우리를 본다. 볼 수밖에 없다. 자식이자 주식-나는 딸의 100퍼센트 주주다-으로서의 운명이다. 하지만 나는 후일담이나 꾀죄죄하게 늘어놓으며 추앙받고 싶진 않다. 처절하게 부정되고 가열하게 척결되고 싶다. - P20

한밤, 나는 초롱의 글을 읽으며 상상한다. 나를 육박하듯 빠르고거칠게 공격해오는 내 딸 초롱이. 코너에 몰린 나는 기분좋게 당혹한다. 내가 키운 거한테 내가 먹힌다니. 나는 카이스트에 갈 석형의 딸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초롱이 나의 이상이다. 그런 애들이있다. 새벽까지 술 먹다 동기 한 놈 집에 쳐들어가 만나게 되는 애들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야지, 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쾅 닫으며 인사도 없이 들어가는 애들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까며 쾅 하고 후두부를 가격하는 문소리를 내곤 ‘쿨‘하게사라지는 애들 쾅쾅. 뺨을 갈기듯 문은 내 앞에서 쾅쾅 닫히고 나는 가만히 부러워진다.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낸다는 것이.
그날, 문이 택시에 쑤셔박히면서 말했다.
"너, 세상천지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냐? 자식새끼 눈깔이다.
초롱은 날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나는 문이 미치게 부러웠다. 나도 정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 - P21

과거에 콜라 싫어한 사람이야 쌔고 썼지만 그중에서도 오지는 유난히 콜라를 미워했다. 규가 광복절에 영문자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갔다가 오지에게 혼난 일도 있었다. 그런 오지에게 이제 콜라는 자신의 집이얼마나 산간벽지에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미국의 상징에서 진부한 거리 단위로 강등된 것이다. 콜라는 해방됐다. 콜라도 해방됐다. 근데, 나는?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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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꾸민 문장을 싱겁게 씻어내며 생각이 글을 짓고 글이 생각을 바꾸는무한 루프 안에서 골똘해지는 경험, 뺨을 달아오르게 하는 기쁨이 이 책에 담겨 전달되면 좋겠다."

"우리 딸은 중학교 중퇴자야."
결코 자신의 딸이 신문에 날 만큼 유명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반전의 낙차를 벌리려는 개수작. 그것도 모르고 ‘문의 딸이 초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우리 애가 낫네‘ 하는 사람은 훗날 창자가 잘린 양 격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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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 오래 오래 증명해 보일 거니까.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어.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서 그 놈이 간 게 아니고, 그 놈이 형편없는 인간이라서 그 따위로 하고 간 거라고. 결혼식장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고, 그놈이 애를 낳는다면 돌잔치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하고 싶어. ..그래서 내가 힘이 없는 거야. 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로, 나를 세워놨으니까.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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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 : (얼결에) 우리 남편 안 놀아, 일해, 언니는 암것도 모르면서, (아차 싶어, 민숙보면)
민숙 : 너 또 공장 차려줬냐? 이번에 무슨 공장 차려줬니? 생수공장, 플라스틱 공장, 제지 공장도 모자라 이번엔,
수진 : (웃으며, 말꼬리 자르며) 그냥 압구정에 조그만 가구점 하나 차려줬,
민숙 : 미친.. 여편네는 일주일 내 이 드라마 저 드라마 찍는다고, 잠을 못 자고, 보따리장수처럼 전국을 싸질러 다니는데, 지가 뭐라고 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에, 사장 노릇 아님 안 해?!
수진 :(귤 먹으며, 웃으며) 그러게 내 말이..
민숙 : 니가 그렇게 무르니까 니 팔자가 그따위야 젊어서 친정에 그만큼 당한 것도모자라, 남편에, 시댁에 자식에 늙어 분첩 하나 들고, 살래?
수진 : (운전하는 수경에게 귤을 먹여주며, 작게 웃으며) 시끄럽지, 귤 먹어.
수경 : (백미러로, 민숙 보며, 싫은, 입으로 귤 받아먹고)
민숙 : (수진 보며) 젊어 배우 한달 땐 다들 대가리가 비었다고 비웃더니, 왜 그 돈으로 지들이 호사야! 화류계 년처럼 웃음 팔고 번 돈 드럽고 드럽다드니, 왜 그돈으로 지들이 생색이냐구?! 여름엔 더위에 녹아나도 웃고, 겨울엔 칼바람에 살이 트는데, 지들은 우리가 화면에서 웃으니까 놀면서 돈을 거저 버는 거 같지?! - P356

많은 영화감독과 드라마 연출자에게 있어서 어떤 이야기이냐는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느냐는 영화보다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드라마 연출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화두이다. 나에게 드라마 대본이란 경전이나 성경의 의미이다. 정극이든, 로맨틱이든, 사람의 삶, 곧 인생의 이야기를 그려놓은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연출자는 경전을 든 수도사와 같다. 그 경전을 해석하고,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고 책의 목적을 위해서 항상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의 기쁨이나 슬픔, 위로와 희망, 작은 기적 등 많은 이야기들을 연출자는 어떻게 재미있고 즐겁게, 편안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감독에게, 적어도 드라마를 연출하는 나에게 대본의 의미는 드라마의 기본 이전에, 인생을 공부하게 하는 가장 신성한 책 중의 하나이다.

- 감독 표민수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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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증이 엿가락처럼 일레인의 팔다리에 퍼졌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속도라면 하루에 한 페이지를 쓰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제야 문제가 뭔지 알았다.
난 경험이 필요했다.
남자랑 자본 적도 없고,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본 적도 없이 어떻게 인생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여자애는 아프리카에 피그미들 틈에서 겪은 모험을 단편으로 써서 상을 받았다. 그런 경우와 감히 어떻게 경쟁한단 말인가? - P163

유럽에 가서 연인을 만날 때까지 소설 쓰는 일은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또 속기는 한 단어도 배우지 않기로 했다. 속기를 배우지 않으면 속기를 쓰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 P165

이런저런 계획이 산토끼 가족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내가 살아온 해들이 전봇대처럼 길에 늘어선 광경이 떠올랐다. 전봇대 사이에 전선이 이어져 있었다. 전봇대가 하나, 둘, 셋,………… 열아홉. 한데 전선이 거기서 땅으로 축 처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열아홉 번째 전봇대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165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사진을 보자 벌컥 화가 났다.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했으니 엉뚱한 생각 말라는 뜻이 아니라면 왜 사진이 내쪽으로 돌려져 있었을까.
그때 이런 생각이 났다.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오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아이들, 귀여운 개에게 둘러싸인 닥터 고든이 날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되는지 말해보도록 해요."
나는 그 말을 미심쩍게 뒤집어보았다. 매끈한 조약돌이 갑자기 발톱이 돋으면서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말인가.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되느냐?
진짜 잘못된 게 없는데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란 말로 들렸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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