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증이 엿가락처럼 일레인의 팔다리에 퍼졌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속도라면 하루에 한 페이지를 쓰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제야 문제가 뭔지 알았다.
난 경험이 필요했다.
남자랑 자본 적도 없고,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본 적도 없이 어떻게 인생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여자애는 아프리카에 피그미들 틈에서 겪은 모험을 단편으로 써서 상을 받았다. 그런 경우와 감히 어떻게 경쟁한단 말인가? - P163

유럽에 가서 연인을 만날 때까지 소설 쓰는 일은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또 속기는 한 단어도 배우지 않기로 했다. 속기를 배우지 않으면 속기를 쓰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 P165

이런저런 계획이 산토끼 가족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내가 살아온 해들이 전봇대처럼 길에 늘어선 광경이 떠올랐다. 전봇대 사이에 전선이 이어져 있었다. 전봇대가 하나, 둘, 셋,………… 열아홉. 한데 전선이 거기서 땅으로 축 처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열아홉 번째 전봇대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165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사진을 보자 벌컥 화가 났다.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했으니 엉뚱한 생각 말라는 뜻이 아니라면 왜 사진이 내쪽으로 돌려져 있었을까.
그때 이런 생각이 났다.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오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아이들, 귀여운 개에게 둘러싸인 닥터 고든이 날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되는지 말해보도록 해요."
나는 그 말을 미심쩍게 뒤집어보았다. 매끈한 조약돌이 갑자기 발톱이 돋으면서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말인가.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되느냐?
진짜 잘못된 게 없는데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란 말로 들렸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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