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없는 헛소문이라도 큰 피해를 낼 수 있지요. 그런데 누군가를 무너뜨리려고 거짓을 꾸며내는 인간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인간은 입체적이지만 표정은 앞면에만 있어요."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선생이 손으로 가리킨 것은 내가 가게 벽에 걸어둔 각시탈이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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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한양에서는 〈등등곡>이라는 가요가 유행하였다. 때에 따라 수십, 수백의 사람이 모여 저잣거리에서 울고, 곡하고, 사뭇 미친 척하는가 하면 웃기도 하고 춤추고 뒹굴며 괴이한 노래를 불렀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양반가의 자제들로 영의정의 아들 이경전, 우의정의 아들 정협 등에 더불어 허난설헌의 남편이자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매형인 김성립도 있었다고 한다. - P100

옛말에 초상난 절에 중은 많다고 하였던가.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후일 이 망국의 수도에 이렇게도 많은 예술가가 날 줄을 미리 내다보았을까. 수도라고 해도 기껏해야 인구 20만 안팎에다 토지 대부분이 날것으로 남아 있는 열악하고 초라한 도시. 그러한 경성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예술가연하고 있었다. 그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몇몇은 필연 거짓되이 예술가 시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란 의심을 해봄 직했다. 때로 내게는 경성 전체가,
나아가 조선 전체가 거짓의 전당처럼 느껴졌다. 가엾게도 스스로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예술가가 아닌 자신을 예술가라 믿으며 살아가는 어릿광대의 노릇.
물론 나 자신 또한 어디까지나 그 무리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나는 결코 잊지 않았다. - P102

나는 깨끗이 씻은 간을 몸에 넣은 토끼였고, 제우스와 화해하여 더는 닳지 않는 새로운 간을 얻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얼마나 즐겁고 쓸쓸한가.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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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계획은 크게 틀어져 수정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범인 중 한 명이 죽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바람에 다른 여섯 명은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찰에서는 사와모리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사를 중단할 게 틀림없었다. 사건은 해결되고 경찰이 더는 움직이지 않아서 다른 범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일도 없게 된다. 사와모리가 자멸해준 것은 괜찮지만, 한 사람의 자멸이 나머지 여섯 명을 구해주면서 그들은 안도할 것이고 레이코의 죽음은 개죽음이 되고 만다. - P339

8월의 내 생일날 밤, 촛불 너머에서 레이코는 "난 이제 파멸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녀가 파멸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그 순간부터 나의 파멸이야말로 레이코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딸 같은 나이의 여자를 사랑한 순간부터 마흔다섯 살의 아무런 장점도 없는 남자는노 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노예에게 허락된 사랑의 방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주인을 위해 어떤 죄라도 감행해 스스로를 파멸에 몰아넣는 것뿐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이더라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죄에 죄를 거듭하는 것으로, 극악인이 되는 것으로, 나는 그 일곱 명보다 나 자신을 파멸시키고 싶었다. 레이코가 파멸한다면 그 파멸에 동행하는 것이 나의 사랑이었다. 아니, 레이코보다 훨씬 더 큰 파멸을 맞이하는 것만이 나와 레이코 사이에 영원의 거리로 벌어진 애정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345

하마노를 죽이려 하면서도 내가 내민 그 손에는 악수라도 청하는 듯한, 상처 입은 동료를 위로하는 듯한 기묘한 선량함이 섞여 있다고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는 채 두 시간 뒤에 하마노의 오피스텔로 불러들인 마가키 기미코의 가슴에 나이프를 움켜쥔 손을 내밀었을 때도 똑같은 선량함을 느꼈다. 그리고 허식에 찬 세계에서 악의 휘황한 천을 짜내려 갔지만 실은 고독하고 가없었던 사십 대 여자의 심장에 흉기를 깊숙이 박아 넣으면서 선량하게 미소 짓는 나 자신이 광인이나 살인귀라고 실감했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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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환하게, 또한 그토록 슬프게 미소 짓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그 눈부심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내게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건네주었다. - P308

마흔이 넘은 남자가 딸 같은 나이의 젊은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을 때 어떤 심정이 드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끊임없이 젊음에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자신의 나이에 겁을 먹고,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내 곁에 묶어둘 수 있을까,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레이코는 사와모리가 자신의 몸을 거액의 돈으로 사들인 것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 P309

레이코가 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용서해주고 어떤 부탁을 하든 들어주면서 지속적으로 착한 사람을 지불해주는 것만이 내 나이의 남자에게 허락된 사랑의 방식이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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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돌연한 분노에 자신의 조각상이 마침내 영혼을 가진 진짜 인간이 되어 나타난 듯한 놀람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분노가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파괴해 추하게 뒤틀렸을 때, 그는 비로소 거센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날 밤 안에 이 여자를 죽이자고 마음먹었다…. - P167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단지 자신의 꿈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에 동화의 세계를 통해 알아버린 꿈을, 어느 날 갑자기 공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성장한 뒤에도 잊지 못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떤 희생이든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미모는 레이코에게 야망이라는 또하나의 무기를 안겨주었고, 야망은 다시 레이코를 한층 더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꿈에의 계단을 몇 칸씩 뛰어오를 수 있는 특별한 구두가 되어주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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