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스트 ㅣ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도시를 휩쓴 전염병, 페스트가 조성한 폐쇄와 억압의 환경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 인간이어서 나타내는 행동과 정신세계를 쫒는다. ‘페스트’는 하나의 커다란 우의(寓意)이며, 추상(抽象)이다. 악이요, 폭압이며, 자유의 박탈이고, 무심함이며, 폐쇄이자, 공포이다. 그래서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상황에 기초하였지만 이것은 그대로 인간이 있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고, 또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경계를 넘어서고 확장된다.
페스트의 질병적 징후와 확산의 가능성이 나타났을 때, 권위를 가진 인간이나 조직은 물론 대다수의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올 불행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 이것이 인간의 초기 반응일 것이다. 오늘의 인간으로서 말한다면, 석유 피크(Peak)와 같은 화석연료의 고갈,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는 고사하고, 물질적 소비에 대한 광신적 편리성과 욕망의 경쟁지대로 몰아넣는 소비자본주의의 예견되는 결말에 무심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리외’는 바로 이러한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현상들로부터 지방정부인 현청의 공식적 조치를 요구하지만 의사결정권을 가진 고위집단은 시민의 집단적 사망을 야기하는 병세를 페스트로 연결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공포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것인데,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려 한들, 더구나 그네들의 이익과 무관한 페스트가 인간의 판단력을 기다려줄리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걷잡을 수 없는 사망자의 증가, 뒤늦게 중앙정부에 지침을 요청했을 때 그 답변은 도시의 폐쇄조치이다. 인구 20만의 소도시‘오랑’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자신들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개인의 안위에 직접적 관계, 즉 당사자가 되어서야만 가능하다. 정말 어리석지 않은가? 이후에 보이는 인간들의 행동은 어떤 양태를 보이게 될까?
대개 자신만은 그 공포의 죽음을 피해가게 해달라고, 피해 보려는 몸짓을 한다. 미신과 그 은밀한 처방들, 도시의 탈주를 위한 몸부림, 그리고 신을 찾는다. 주술이 무엇을 해결하겠는가, 신을 섬기지 않는 인간들의 죄악을 벌하려는 신의 노여움이라고 말하며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요구한다. 영혼이 설사 있다한들 영혼이 범한 죄악이란 것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기탁한들 의지가 없는 전염병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더구나 영혼이 정화된들 병 걸린 육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페스트의 공포에 온 도시가 질려있을 때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신부와 그 앞에서 악의 오염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어린 육체가 페스트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은 신의 분노의 본성을 의심하게 한다. 이 처절한 모순을 인식한 신부의 행동은 마침내 페스트에 전염된 채 죽어가는 육신으로서 의학적 치료를 거부한 채 자신의 믿음으로 순응하며 또한 항거하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話者는‘리외’의 목소리를 빌어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인류의 구제라니, 너무 과장된 말씀입니다. 나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나의 관심사는 인간의 건강입니다.”
페스트가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되어 있는 사건으로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인간사회의 선악의 구체성, 미덕의 생생한 실체가 조명된다. 특히 카뮈는 비록 실존주의자임을 부정하지만 관념주의의 공허함을 비판하며 페스트에 대항하는 인간의‘성실성’이나‘건강’이라는 덕의 실체 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죽음의 공포가 무겁게 내려앉은 곳에서 사람들의 생명, 삶을 지켜내기 위해 묵묵히 자신들의 신념을 수행하는 행동의 실천자들, 의사‘리외’, 보건봉사대 ‘타루’, 하급관리 ‘그랑’그리고 도시의 폐쇄가 만들어낸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수긍하지 못해 탈출 의지를 접지 않지만 결국에는 봉사대로 잔류하는 기자 ‘랑베르’등을 통해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며, 관념의 추상성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함을 역설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모든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 때, 사랑이란 한낱 추상적 의미이상이 되지 못한다. 자기를 주체하기도 버거운 상황, 곧 자기 존재의 보존이란 명백한 가치는 평상시에는 노출되지 않는 은폐된 진실이다. 끊임없는 죽음과 격리의 행렬, 죽음이란 평등한 그림자가 도시를 뒤덮지만 사람들은 더욱 에고(Ego)에 몰입한다. 그러나 타루의 억압과 폭력에 대한 집단적 저항정신과 평화를 향한 소망이나 도시폐쇄의 해제를 맞이한 후 이별의 해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이 항상 바라고, 가끔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리외로부터 사람간의 유대와 애정이라는 찬미해야 할 인간의 덕목을 말하게 하는 것은 카뮈식 요청일 것이다. 『이방인』의 부질없음에도 반항하는 부조리한 숙명을 살아가는 ‘뫼르소’의 깨달음, 관계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아랍인을 살해한 젊은이의 얘기, 재판을 받는 청년의 모습처럼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임을 알리는 장치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카뮈의 인간상에 대한 소망이고 의지랄 수 있는 “언제나 침묵 속에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리외의 어머니에 대한 연대의식이 그것일 것이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숭고함이 절로 읽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밑줄 그며 읽게 하는 소설이다.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흔들어 깨운”카뮈의 정신에 새삼 겸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