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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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가 삶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세계 체제의 본질에 대해 이처럼 명쾌한 분석은 일찍이 없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6세기 이래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경제 500년간의 역사사회학적 고찰로서 ‘세계체제분석’이란 사회현상의 개별적 독창성을 강조하는 역사학과 같은 개별기술적 분석양식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법칙정립적 양식의 경계들 자체를 철폐하고‘단일학문적(unidisciplinary)’연구로서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사회분석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세계를 인식하는 학문으로서 과학과 인문학의 분기(分岐)와 다시금 인문학의 과거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역사학과 현재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으로서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의 분화를 근대성(modernity)이 지닌 시장, 국가, 시민사회의 분화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이어 유럽 등 서구의 자기중심적 시선에 따라 자신들과 다른, 즉 근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세계의 연구로서 인류학과, 나머지 '고도문명(high civilization)'이라고 불리는 중국, 아랍, 페르시아, 인도 등의 광대한 지역의 연구로서 오리엔탈리즘의 분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45년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제3세계의 지정학적 자립의 선포, 미국의 세계체제 헤게모니 패권의 장악, 세계경제와 민주화 경향의 조합이라는 세계변동은 근대와 비근대의 개념 와해를 가져왔고, 이에따라 종전의 분류형식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으로서 대두한 잘 알려진 ‘발전(development)’론이라는 지적대안의 등장과 이들의 지식구조 기저에 자리잡고 있던 인식론의 의문으로서 핵심부-주변부 개념, 종속이론, 아시아적 생산양식, 봉건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논쟁, 전체사(Total history)논쟁을 아우르는 세계체제분석으로의 진행과정을 명료하게 이해시켜주고 있다.

특히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체제(minisystem), 세계경제(world-economies)와 세계제국(world-empires)을 포함하는 세계체제를 중심으로 핵심부적 생산과정과 주변부적 생산과정이라는 불평등교환의 현상에서부터 끝없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속성, 그리고 근대세계체제의 정체성으로서의 보편주의, 민족국가등 국가의 존립기반과 구성요소로서 자본가와 노동자, 핵심과 주변, 반주변국의 현상들, 지문화(geo-culture)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출현, 반체제운동 및 사회과학의 역할을 통해 작금의 세계체제 위기를 통찰해내는 이 저술의 일관되고 명쾌한 분석은 “내적 모순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고” 혼돈(chaos)에 휩싸인 오늘의 자본주의체제를 승계할 새로운 체제건설을 향한 탁월한 미래학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서의 근대 세계체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우선‘끝없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그 첫째로 하고 있으며, 이 메커니즘의 성공적 행동, 즉 생산을 통한 잉여가치의 더 많은 축적을 위해 언제나 독점을 선호하는 자본가들의 행태를 조명한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 유지키 위해 국가장치를 통한 지원으로서 특허권제도, 보호주의정책(보조금,세금감면등), 규제(중소기업은 치명적)를 이용하여 독과점을 심화시켜주는 자기파멸적 체제를 해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및 유럽 등 소위 선진국들로 형성된 핵심부적 생산지와 그 밖의 주변부적 생산지의 잉여의 왜곡된 흐름을 설명하는데 그대로 유효하게 적용된다. 즉 준(準)독점에 의해 통제되는 핵심부적 생산과정이 경쟁이 심한 생산과정인 주변부로부터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국이나 브라질, 인도와 같은 핵심부와 주변부의 제품생산이 거의 동등한 비율로 섞여있는‘반(半)주변국’의 위치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유용한 시사를 던져준다.

한편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반규칙들에 우선순위가 주어지는 것”이라는 ‘보편주의’의 대표로서 능력주의, 만인의 평등과 같은 공적담론이 지닌 체제유지 수단으로서의 허위를 통찰하고, 핵심부-주변부의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ur) 만큼이나 보편주의와 반보편주의의 대립적 양극현상이 이 체제의 근본적인 것임을 이해케 한다. 또한 국가의 역할을 통한 자본의 축적과정이 지닌 비중립적 행태와 외형적으로는 ‘자유방임’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준독점이나 값싼 노동자의 유입을 통한 이윤의 보전, 생산자가 부담하여야 할 하부구조(도로, 항만, 교량, 공항 등) 비용의 비생산자에로의 이전과 같은 잉여의 왜곡된 흐름을 지적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잉여가치를 둘러싼 항구적인 갈등, 즉 ‘계급투쟁’을 낳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을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킨 프랑스 혁명초기의 보수, 자유, 급진의 역사적 성향과 경과를 통해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위계적 구조를 신뢰하며,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교육의 대상 확대도 거부하며, 교육은 엘리트 간부의 육성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보수주의에 대항하여 “재주만 있으면 어떠한 경력이든 추구할 수 있다.”는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를 주장하지만 “대신 군중에 대해서는 배워먹지 못한, 비합리적 존재들이란 인식하에 주도권은 전문가 집단만이 할 수 있다.”는 중도주의를 표방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으로 19세기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한다.

그러나 비록 실패하였지만 1848년부터 유럽 국가들의 연쇄적인 급진주의의 혁명은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구호를 공공의 영역에 까지 적용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으며, 바로 위와 같은 근대세계체제의 작동 메커니즘으로서 사회과학(경제,정치,사회학)이 1968년 혁명까지는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위한 지식 토대를 공급하는 역할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1968년 이후의 반동은 기득권 세력이 질서를 회복하고 새로이 등장하기 시작한 이윤압박으로 인한 당면한 어려움을 남반부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하고, 발전주의를 폐기하는 대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테마를 들고 나오게 한 역사적 전환점으로서의 의의를 주목하고 있다.

세계경제체제의 남반부를 통한 이윤압박의 해소를 위한 시도는 분명 제로섬 게임에 불과한 잉여가치를 통한 자본축적에 필요한 수요의 한계에 봉착했으며, 궁극적으로 경쟁판매자의 존재여부와 유효수요의 수준으로 인한 가격인상의 딜레마, 갈수록 증가하는 생산비용의 해소를 위한 시골인구의 상실, 폐기물 매립지와 자연자원의 고갈이라는 한계를 극복키 어려운 극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근대자본주의체제는 수명을 다하고 있으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마주치고 있고, 체제위기라 부를 만한 상황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체제들은 저마다 수명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생산에서의 이윤압박을 피해 금융영역으로 이동을 추구하였지만 이는 혼돈을 증가시키는 역할만 하였을 뿐, 세계경제는 더욱 불안하고 환율과 고용의 오르내림에 종속되어버렸다. 본질적 분분이라는 모든 구조와 과정들이 격렬하게 요동하는 이 혼돈의 시기는 새로운 체제의 이동 내내 지속될 것이다. 
 

21세기 지금에 이르는 인류사회는“상대적으로 긴 시기에 걸쳐 높은 수준의 폭력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러한 분출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참가자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체제건설에 참여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체제는 어떠한 형태일 것인가? 다만 저자인 ‘월러스틴’은 자유(liberty)와 평등(equality),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둘 것인가의 문제로서 현존하는 우리의 세계체제를 계승할 다음 체제로서 “다수의 자유와 소수의 자유를 모두 확장하고자 하는 이들과 다수의 자유나 소수의 자유 둘 중 하나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위장한 채 비자유 체제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어질 것”이라고 예견하는데 그치고 있다. 아마도 그가 그리는 새로운 체제는 결국 다수가 스스로의 자유를 깨닫고 소수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해 다수가 취해야하는 필수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것일 게다. 비록 200여 쪽에 불과한 저술이지만, 책 전체에 밑줄을 그어야 할 정도로 지금의 세계체제를 형성하는 탁월한 논리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우리와 우리사회를 인식하는 데 명쾌한 구조적 지식토대를 제공한다.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지문화(geo-culture)를 지배해 온 근대자본주의체제는 붕괴하고 있다. 여전히 미국식 신자유에 기초한 시장자본주의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지배층들은 보다 거시적인 안목의 세계질서를 이해하고 나아가 도래할 신질서를 창조하는데 중추적 역할자로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전환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하겠다. 오늘을 형성하는 근대세계체제를 이해하는데 이보다 명쾌하고 지적인 저술은 다시는 출현키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필독하여야 할 20세기 최고의 저술이라 함에 주저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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