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각성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헛소리!

 

나는 부정적 언어로서의 <세계관>을 발명했던 철학자가 바로 그 세계관에 함몰된 증거로서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을 보았다. 그로부터 하나의 단상을 끄적이게 되었다. 근대성이라는 제도적 지배와 합리성이라는 단단한 껍데기의 천장을 깨부수고자 고뇌했던 인물이 다시금 그 껍데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 매진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수는 데 결코 가능한 존재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었고, 결국은 그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직접의 체험을 통한 고통스러운 각성이 필요한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이에 대한 두서없는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전쟁은 자기보존의 원리에 따른 세계 관리의 일부이며, 부르주아 사회를 흔드는 외부 요소이거나 부르주아 사회의 광기 어린 일탈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 제도의 근간이다.”

-Gunnar Hindrichs, 《Abseits des Krieges(전쟁에서 벗어나)》(2024)

 

인간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껍데기 안에서 산다. 이것을 ’세계관’이라 이른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그의 초기 저작인 《세계관의 심리학》에서 최초로 개념을 부여한 단어다. 그런데 이 세계관이란 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기 일쑤고, 그럴 때 이 세계관은 ‘강철 껍데기(또는 쇠우리: stahlhartes Gehäuse)’가 된다. 하지만 이때 인간들마다 다른 행동을 한다. 그 딱딱하게 굳은 껍데기의 좁아터진 안이 이 세계라고 철저히 믿는 인간이 있는가하면, 그 안에서 자기 실존을 밝혀주는 존재의 속박을 느끼는 인간도 있다. 존재 속박을 느낀 인간은 죽은 껍데기를 흔들어 한계상황을, 즉 존재의 경계에서 그것의 내연을 확장하거나 깨부수어 열린 공간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대개는 그 굳어버려 죽은 껍데기 속에 안주하며 산다. (‘강철 껍데기’는 막스 베버로부터 야스퍼스가 빌려온 개념이다)

 


한편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는 그의 초기 저작 《소설의 이론》(1916)에서 근대소설의 탄생을 설명하는 철학적 명제로 근대적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말하는 가운데 ‘선험적 노숙(Tranzendentael Obdachlosigkeit)’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세계, 즉 존재와 의미가 일치하는 정신적 존재론적 고향을 상실하고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명명이다. 루카치가 노숙상태에 ‘선험적’이라는 수식을 붙인 이유는 근대 이전에는 세계 자체가 인간에게 의미를 제공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더는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인간 존재의 경험 너머의 상태조건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이처럼 세계가 총체성을 상실한 곳이고,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면 야스퍼스가 말하는 강철 껍데기와 루카치의 선험적 노숙은 세계의 조건들과 화해하지 못하는 간극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까운 언어처럼 보인다. 물론 루카치의 선험적 노숙은 강철 껍데기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야스퍼스는 사회 경제적, 정치 제도적 측면으로 한정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저항을 말하고 있지만 루카치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의미론적, 존재론적 관계가 붕괴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개념은 근대이후의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자유롭고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 잡기 어려워졌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스퍼스가 막스 베버로부터 빌려온 강철 껍데기(쇠우리)는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화가 만들어 낸 구조적 구속을 가리키고 있지만, 루카치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의미의 총체성이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보면 야스퍼스의 강철 껍데기를 루카치의 선험적 노숙으로 포괄해도 될 듯하다. 사실 근대성의 의미인 합리적 제도와 관료제, 경제적 질서가 인간을 지배하는 독립적 힘을 행사하는 체계에 대한 반항 일뿐 아니라, 거주하는 세계를 자신의 정신적 고향으로 경험 할 수 없는 존재와 의미 관계 자체에 대한 반항인 까닭이다. 제도에 갇힌 인간을 세계에 귀속되지 못하는 인간으로 확장해서 이해하는 것이 존재에 대해 보다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오늘 현대인의 소외를 단순히 사회적 억압이나 경제적 종속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안에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사변적으로 흐른 것 같은데, 이렇게 현대인의 실존 조건은 근대성이라는 속박의 껍데기에 대한 뿌리 깊은 파괴 욕구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야스퍼스는 전쟁을 죽은 껍데기에 주는 충격, 실존을 해명하는 과정으로 제시했다. 일상을 파괴하는 강렬함을 지닌 전쟁의 뿌리가 현대인의 존재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선험적 노숙상태를 극복하는 합리적 도구로 말했다는 점에 나는 기겁했는데, 한계 상황으로서의 전쟁이 근대의 영혼 없는 기구(제도)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야스퍼스가 믿었던 까닭이다. 즉 전쟁이 예속의 껍데기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다음을 약속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전쟁이 정말 이런 약속을 수행하는가? 이 약속이 기만인 것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이고, 전쟁이 충격을 주고 뒤흔드는 듯 보이는 제도들이 속한 자본주의 사회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말살행위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극단적으로 파괴한다. 전쟁은 제도들이 만든 구조물에서 탈출하는 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강철 껍데기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데 일조 할 뿐이다. 제도들은 평화를 약속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속에 품고 있다. 경제, 정치, 법, 과학 할 것 없이 비상 상황에서 이 제도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든다. 전시 경제, 전쟁 법, 전쟁 정치와 전쟁 과학이 존재하고, 이것은 각각 제도와 연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전쟁은 제도들의 일부이며 가장 극단적 모습일 뿐이다. 또한 전쟁의 반시민성은 자본주의 제도들과 모순되지 않으며, 단지 그 제도들의 최악의 지점을 만들 뿐이다.

 

오늘 우크라이나, 이스라엘의 전쟁 양상을 보라. 전쟁 행위자들이 대단히 제도화 되어있으며, 자본과 제도의 집적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쟁은 군산복합체의 공고한 결속, 제도 속에서 더욱 단단한 강철 껍데기를 구축하는 데 있다. 야스퍼스는 세계관이라는 강철 껍데기와 한계상황을 제대로 통찰했음에도 전쟁이 제도를 새롭게 갱신하는 합리적 도구가 되리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졌다. 전쟁은 제도를, 강철 껍데기를, 선험적 노숙상태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평화와의 결별을 제도로 만든다. 전쟁은 선험적으로만 인간을 노숙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안식처를 갖지 못하고 떠돌게 만든다. 전쟁은 극단적 홈리스를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대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대중 사회의 획일화, 기술적 합리성의 확대, 인간의 실존적 자유 상실을 문제 삼으며 인간 예속에 대해 비판적 매스를 가했던 철학자가 그러한 제도를 무너뜨리는 대안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질서, 전쟁을 상정한다는 것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체제를 만들어낼 위험을 가진다는 것을 몰랐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인간에게 기존 세계관의 한계와 실존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로 전쟁을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존적 각성을 이유로 전쟁 자체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나아가 나치정권에 협력한 인물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17 Edition)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항목 중에 1933년 나치 집권 초기 야스퍼스의 태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Karl T. Jaspers(1883.2-1969.2)]


“In 1933, Jaspers himself was briefly tempted into making certain incautiously optimistic statements about the Hitler regime.”(1933년 야스퍼스 자신도 잠시 히틀러 정권에 관해 신중하지 못할 정도로 낙관적인 발언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그리고 중요한 문장이 이어진다. “Indeed, these remarks were not entirely out of keeping with his other publications of the early 1930s.” (실제로 이러한 발언들은 1930년대 초 그의 다른 저술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위 문장은 야스퍼스의 발언이 일시적 실언이 아니라 1931년 그의 저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상황(Die geistige Situation der Zeit)》에서 나타난 의회민주주의 비판,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옹호가 1933년 정치적 판단과 연속성을 갖는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실존적 각성을 추구하는 철학이 정치의 권위주의적 열망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을 예속시키는 제도와 기구를 흔듦으로써 대안으로 강력한 권위주의적 정치 칠서와 전쟁을 상정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열망하는 전쟁 속에 극단화된 제도가 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야스퍼스의 초기 정치사상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를 적극적인 나치즘 동조자로 규정할 수도 없는데, 그의 아내 게르트루드 마이어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대학행정에서 배제되다가 1937년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당하고, 다음해 그의 모든 저술이 출판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스위스로의 이주도 막힘으로써 1945년 하이델베르크로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강제수용소 이송을 2주 앞두고 모면했다는 사실은 나치로부터의 박해 사실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야스퍼스가 나치즘에 대한 사상적 동조를 한 것은 명확한 것이지만 이것이 곧 정치적 협력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야스퍼스는 분명 나치 집권 초기의 정치적 오판과 권위주의적 정치관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가 나치당 가입이나 정권의 정치적 이념적 활동에 협력했다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철학적 인간관과 정치적 사상의 이 이질적인 간극은 대체 무엇일까?

 


물론 나치정권의 붕괴 이후 1946년 출간한 《죄의 문제(Die Schuldfrage)》는 그가 전쟁을 경험 한 이후 정치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졌던 것의 증거일 것이다. 실존은 개인이 스스로 자유를 자각하고 타인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는 그의 정치사상인 개인을 인종과 민족이라는 집단적 범주에 종속시키는 권위주의적 또는 나치의 인간관과 충돌한다. 이 저술에서 야스퍼스는 나치즘 경험 이후 기술적 합리성과 전체주의적 지배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헌법적 권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지만 여전히 엘리트주의적 정치 성향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가 실존적 각성을 위한 극한의 경험과 인간이 실제로 책임을 져야하는 역사적 폭력 사이의 긴장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전쟁이 제도적 환경을 흔드는 게 아니라 예속의 강철 껍데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전쟁을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단단한 껍데기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허구임을 알아차리는 데 실패했던 것이고, 전쟁이 인간을 완전히 방치된 존재로 만든다는 적나라한 사실성을 깨닫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오판으로 이해된다. 그의 정치적 세계관은 권위주의를 떠나지 못했다. 이 단단한 강철 우리에 갇혀있음에도 정작 자신이 갇힌 껍데기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거창하게 근대성의 강철 우리를 고작 더욱 극단적인 말종의 제도로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바로 그 세계관이 그 자신을 속박하게 되자 비로소 정말의 한계 상황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

 

나 또한 이러한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인식한다. 아마 한계상황임을 체감하는 요인 또는 사건과 마주해야 비로소 작은 변화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탁월한 사유의 철학자가 선험적 노숙 상태를 끝내기 위해 항구적 노숙 상태인 전쟁을 설파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에서 인간의 세계관이라는 것의 그 편벽함을 다시 읽는다. 우리 각자는 강철로 된 단단한 우리에 갇혀 있음을 매양 자각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와 타인이 변화하고 세계가 변한다. 고착된 자기만의 언어로 타인과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짓거리처럼 천박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강철 껍데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을 주절거린 듯해 민망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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