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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ㅣ 밀란 쿤데라 전집 (리커버)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평점 :
아베나리우스: 자네 소설이 따분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군,
밀란 쿤데라: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
- 『불멸(L'immortalite)』, 225쪽에서
인간 행위 수행에 이르는 의사(意思)들을 요소들로 해체하면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경박한 것들의 수행임이 드러난다는 것이 쿤데라의 지론인 듯싶다. 그래서 그의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제목을 붙여도 될 것만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가벼움’ 말이다. 이 소설 『삶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s)』 이후에 발표된 『불멸(L'immortalite)』 에서도 쿤데라는 제목이 잘 못 달렸다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제목이어야 한다고 말하듯, 이 소설 역시 동일한 제목을 붙여도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독자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이 작품을 부랴부랴 펼쳐든 이유는 『불멸(L'immortalite)』 「3부, 투쟁」에서 『삶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인 야로밀에 대한 인물평을 하는 한 단원 때문이었다. 랭보의 《지옥에서 한 철》에 등장하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시구를 맹신함으로써 ‘자기 무덤 파는 자들의 동맹자’가 된 풋내기에 대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잡아챈 것이다. 배속을 간질이는 쿤데라의 그 흔쾌하게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 빚어내는 해학적 문장들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한 인간의 출생과 성장 속에서 어떻게 시인을 꿈꾸고 그 꿈의 성분이 된 것들이 무엇인지, 어쩌면 그것도 희극들일 것일 텐데, 그 빚어지는 삶의 현실태(現實態)를 보면서 한바탕 웃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진정 웃음에 목말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쿤데라의 소설들이 다채로운 요리들이 나오는 향연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註1)배실배실 나오는 웃음, 혼자 킥킥대며 그 가볍기 그지없는 문장을 쓰는 작가의 심사(心思)를 떠올리며 인간의 세계가 한없이 경박한 것들의 집합임에 수긍한다. 서너 줄로 내용을 요약한다면 랭보의 문구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은 현대시를 사랑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가 어느 날 갑자기 프라하에서 절대적으로 현대적이 된 것이 사회주의 혁명이 되자, 죽도록 사랑하던 현대 예술을 즉각 거침없이 규탄한다. 그리곤 이 위대한 계명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냉소하며 부인하고, 이 난폭행위를 통해 성년(여자를 알게 되는 사내 됨)의 삶으로 들어가는 이 젊은이는 부인 행위, 즉 절대성(그에게는 현대성이 곡 절대이고, 그래서 죽음의 절대성은 곧 그에게 달콤한 향기이다)에 자신의 모든 열정과 광신을 쏟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희생하는 사내로서의 용기 때문에 가담하는 광경,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꿈과 각성의 비극적 불일치 속에 서글프게 죽는다는 이야기다.
내용을 간추리고 보니 보잘 것 없기 그지없지만, 그침 없이 흐르는 사람들의 그 경박한 배경 속에 혁명의 시대가 소극(笑劇)이 되어 흐르고, 역사는 희극(戱劇)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간들의 욕망의 의지와 달리 늘 여기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삶이 놓여있음을 뼈저리게 감각하게 만든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워 비참의 웃음이 그만 묵직하게 가라앉을 정도다. 이 풋내기가 고수하는 ‘절대적 현대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 하찮은 죽음이 외려 연민보다는 고작 그렇게? 라는 조소가 흘러나오니 말이다.
자, 웃기는 것은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열정에 찬 확신이 그가 체험으로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기에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고, ‘현대적’이라는 단어가 늘 내용이 변하는 파악할 수 없는 개념임을 어떻게 깨닫지 못했는가라는, 또한 그렇게 절대적 현대성을 위해 사랑의 ‘절대성’을 확신하는 인간이 사랑하는 여자를 배반하고 사회주의혁명 정부의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현대성’을 수호한다는 광신은 사실 혐오스럽고 소름끼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따분한 얘기는 소설이 자아내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기에 예서 줄이기로 하고, 야로밀의 출생부터 시인을 꿈꾸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따라가 보자. 삶이란 콩트이고, 코미디이며, 한낱 유희적 행위의 우연적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힘겨울 정도다.
“시인의 어머니가 어디에서 시인이 잉태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볼 때면 딱 세 가지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
- 소설 첫 문장
잉태 장소에 대한 설레발이 몇 쪽에 걸쳐 진술되는데, 이 기억이란 것이 삶의 상황 맥락에 따라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다. 가능성이 고려 대상에 들어갔다는 말도 우습기 짝이 없지 않은가. 어쨌건 가난한 엔지니어 청년의 씨를 잉태한 시인의 어머니는 아버지 재산의 권위에 의지해 결혼을 성사시키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은 아들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붓는다. 아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들지 못하여 외톨이로 겉도는데, 아이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무엇, 야로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야로밀의 모든 것에 흔적을 남겼으니, 셔츠, 머리 모양, 사용하는 단어.., 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의 이마 위에 친구들의 호감을 밀어놓는 표지를 새겨놓은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시인의 어머니가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들의 목줄을 잡고 놓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삶은 다른 곳에’라는 표현은 이같이 그 의지 또는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저쪽 다른 곳에 있다는 가벼운 진실을 말하는 것일 게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엉뚱하고 예상과 다른 반전들이 야기하는 웃음의 연속이다. 사람 얼굴을 잘 그리지 못하는 탓에 인간의 몸을 한 짐승으로 개를 그리는데, 이 기묘한 그림을 아들의 비범한 재능으로 여긴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에게 전문 교습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림을 받아든 현대예술의 전문가인 화가 또한 “아이가 종이 위에 표출해 놓은 저 너무도 독창적인 내면세계”를 해독한다. 야로밀은 단지 사람의 얼굴을 못 그리는 바람에 그냥 어쩌다가 개(犬) 인간이라는 경탄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음에 불과한 것인데, 이 황당한 내면의 독창성은 아이에게 금지된 이해의 심연을 바라보듯 하는 자기 관찰에의 관심을 부여한다. 쿤데라의 이러한 해프닝의 연출, 삶의 모든 수행들이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유희임을 발견해냄으로써 그 가벼운 존재들인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음에 독자를 동참하게 한다.

이 사내에도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또 청년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자기 부모의 집 벽에 걸린 정물화나 풍경화와는 아주 다른 현대 예술을 그리는 화가의 그림은 현대 예술에 대한 우월적 환상을 심어준다. 야로밀은 자신이 집에서 그린 그림을 화가에게 보여주고, 그 그림들이 모두 머리가 없는 여자 나체들이기에, 화가는 인간의 얼굴을 인정하기를 집요하게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해한다. 급기야 시인의 어머니는 인간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아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따지기 위해 화가를 방문한다. 이 방문에서 화가와 시인의 어머니의 대화와 간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대단한 해프닝, 길이 남을 소극의 명장면이라 해도 될 듯싶다.
머리 없는 여자들의 그림은 “매순간 우리 삶을 뒤흔드는 전쟁 사이에 어떤 숨은 연관”의 느낌이 되고, “전쟁의 피로 물든 세상 뒤에서 나타나는 사랑”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이 의미심장한 진지한 해석에 매료된 시인의 어머니는 화가의 혀가 자기 입안으로 들어 온 것을 느낀다. 이 순간적 상황에 봉착한 여인의 머리에 스쳐가는 찰나의 생각들의 묘사는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간음의 자기 정당화에 대한 내심의 변은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잠깐 생각할 틈이 있었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므로 답은 뒤로 미루고 지금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순간의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는 얘기에서부터 “자신을 순진무구한 반-성숙 상태 속에 놓아둔 남편에 대한 즉각적 분노로 옮겨가며, 그 분노가 장막이 되어 자신의 헐떡이는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로 이어지는데 어찌 진지함 속에 이렇게 가벼움이 잔뜩 내재할 수 있는지 아연실색하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진지함에 빠져있다고 여기겠지만)
이 소극들로 빼곡한 소설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시인 야로밀의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쿤데라가 어깃장을 놓으려는, 아니 통상의 시인들이 시 속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어떻게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을 수 있는지를 밝히는, 그 가벼움의 진상 드러내기이기도 할 것이기에 옮겨본다. “녹아내려 물로 변하는 슬픔/ 수면이 올라오고 또 올라가 내 눈까지 차오르는 초록빛 물/ 슬픈 몸 / 한없는 물을 가로질러 내가 쫓아가는”, 이 시는 자기 집 하녀 마그다가 목욕하는 것을 열쇠구멍에 바짝 눈을 갖다 대고 훔쳐보며 처음 보는 여체에 대한 갈망을 적은 것이다. 대체 어느 누가 이 시를 사춘기 소년의 관음이라고 읽겠는가. 이 시의 근원에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야로밀은 이 시를 타자기로 쳐서 종이에 옮겨 놓고는 그 시가 단순한 단어의 연속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사물이 됨으로써 시가 자율성을 획득하고 소멸이 아니라 오랜 지속이 예정되었음을 느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실 쿤데라의 소설은 그 주제의 용의주도한 이야기 속 배치를 넘어서는 이러한 존재의 경박성에 대한 까발림이 주는 흔쾌한 즐거움, 생이 무겁다고 쳐진 몸을 가볍게 떠올려주는 그 가벼움이 만들어내는 배에서 올라오는 웃음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이 가벼움의 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둔중한 역사성, 즉 역사를 해석하는 자의 지금 여기서 라는 상황 맥락이라는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달리 수용되는가를 시인의 어머니가 화가와의 화간(和姦)을 단절하고 아들과 남편에 충실한 여인으로 되돌아와 자책함으로써 애인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나치에 박해받는 유대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끌려가 사망했음을 알았을 때 그 배반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겠는가. “이제 그녀는 남편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배신했다고 머리카락을 집어 뜯”는다. 이때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말한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완전히 끝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돌아 볼 때마다 매번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역사성이란 것은 한 여인의 상황변화에 따라 춤추는 사랑의 감정을 빗대 이렇게 경박하게 날아오른다.
“자신의 삶이 아무 사건 없이 빈약하기 때문에 자화상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347쪽
소설은 내내 자기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여자의 몸, 여자에 대한 몽환적이고 유희적 몽상으로 가득한 풋내기 야로밀의 애정사로 가득하다. 시인의 어머니가 읽는 아들의 시는 저 높은 형이상학적 지대를 거닐지만 정작 그 시들은 생식과 성교의 기관, 달콤한 사랑의 나라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추상의 지대, 상상의 테마였을 뿐임을.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목줄로 길게 연결되어 묶인 야로밀의 경험의 협소함은 그야말로 궁핍의 영역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야로밀은 이 궁핍의 지대에서 자유의 지대, 진정한 현대성의 왕국을 향한 도약이 도래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여자와의 첫 잠자리의 실패 이후 못생긴 가게 점원 빨강머리 여자가 그를 성년의 남자로 만들어준다. 사랑의 영역, 여자에 대한 몽상이 현실의 사건이 되는 야로밀이라는 풋내기 인간의 생의 변곡점도 그가 주도하고자 하는, 꿈꾸던 그런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삶은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자동성이라는 법”의 실존이 삶의 진실임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여기서 우리네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통제의 실패,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하게 보지 못하는 무능력의 실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사랑의 절대성을, 삶의 궁극의 질서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알지 못하는 삶의 행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불행의 도정에 서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것을 비극이라 말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가볍고 하찮아 비극이 되지 못한다. 혁명의 대열에 참가한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 시인, 절대성의 메신저가 되고자 하지만, 그 무모한 열정에 깃든 경박함으로 인해 그의 죽음조차 불꽃처럼 승화하는 혁명시인의 그럴듯한 자살이 아니라 몽매한 시 나부랭이, 기막힌 똥덩어리를 써대는 애송이라는 웃음거리가 되어 차가운 밖으로 내던져지고 폐렴으로 앓다가 죽듯, 불꽃 없는 죽음을 맞기에 더욱더 비극의 그 어떤 위대성도 없는 소극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되고 만다.
이 소극은 삶은 항상 다른 곳에 있기에 생의 통제는 궁극적으로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정작 자기 생에 대한 치열한 진지함을 믿었던 야로밀이지만 그 인생의 무엇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한 표피적 삶이라는 경박한 생의 걸음에 불과했음을 독자는 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이 인간의 실체임을 확인케 하는 쿤데라 의도의 발칙함에 굴복하게 된다. 실상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야로밀이라는 풋내기보다 더 아는 것도 없음을 아는 독자 어느 누가 자기 삶의 가벼움을 부인 할 수 있을까. 공포의 시대, 경찰 연수원 단상에 앉아 시를 읊었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당하는 부끄러운 이름 모를 시인의 피 흘리는 미소를 띤 순진무구, 나는 그 익살극의 함정에 빠져 어떻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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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배실배실 웃음이 나오다: 모순적이거나 예상과 다른 반전, 또는 누군가의 어설픈 행동이 엉뚱하게 느껴질 때 나오는 웃음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註2)소설 주인공 야로밀은 체코 사회주의 시의 창시자로 알려진 야로밀과 같은 24년 남짓 삶을 살다간 체코 시인, ‘이르지 볼케르(Jiri Wolker, 1900-1924)’를 모델로 한 것 아닐까하고 추정해본다. 소설 속에서도 스치듯 한 번 거론되는 시인이다. 고난에 찬 프롤레타리아들의 삶이 있고,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믿음, 해방과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역설, 집단주의와 상호연대와 자기희생에 대한 강조를 실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