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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 분배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
제임스 퍼거슨 지음, 이동구 옮김 / 여문책 / 2024년 7월
평점 :
책의 원제는 ‘분배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한 ‘현존과 사회적 의무(Presence and Social obligation)’이다. 번역본 제목이 된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은 바로 ‘현존’을 풀어 쓴 것이다. 아마 직관적 이해가 쉽도록 이 풀어쓴 의미가 도움이 될 터이다. 분배, 즉 나눔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사회는 임금노동을 인간됨의 자격으로 삼고 있으며, 이에 앞선 전제로 국민국가의 성원권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함께 있음과 동일 경계 내 영토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자원 분배는 사실 뗄 수 없는 하나의 연결된 개념이다.
이같은 상태에 있는 존재들을 ‘우리’라고 하며, 이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제외와 배타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눔의 토대를 이러한 기준에 매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인데, 실업과 불완전 취업상태의 비공식 생계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함에 따라 노동에 기반을 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기존 형태의 분배방식은 소위 사회 안전망이라는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자원 투입 증가와 대대적인 감세조치가 진행되더라도 노동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자동화와 AI화로 감소시키고 있으며, 안정적 일자리는 축소되고 불완전 취업상태를 급진적으로 늘리는 까닭이다. 다시말해 시민권, 노동에 기반을 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법적으로 인정한 정치적 성원권에 따른 일련의 명백한 보편적 권리와 의무의 보장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순간에 이미 진입해 있으며, 이를 도외시할 경우 국민국가라는 신화적 믿음에 토대를 둔 분배정치는 무수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뿐 아니라 국가의 안정성과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증가한다. 이 저술은 이처럼 세계의 자원 분배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대안적 가치와 제도를 향해 기존의 관념을 확장 혹은 변경시킬 수 있는지를 함께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기술발전이 임금노동을 만들어내지도 않으며, 구조적 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지속되는 세계에서 전체의 성원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소수의 안정적 도시 노동계급만을 배분의 정당한 자격이라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외, 배제되는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왜 가져야 하는가라는 첨예한 정치적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성원권과 임금 노동의 기여도가 공적 분배 정치의 기준이었다면 이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시민권의 담지자인 성원으로서 노동임금 기여자만을 ‘우리’라고 부른다. 이 ‘우리’라는 그럴듯한 포용적 언어가 배타적 경계를 강화할수록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져 가게 된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현존, 즉 “여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들의 사회적 현실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일상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침 출근 시간에 붐비는 지하철에 발 디딜 틈 없이 밀집한 객차에 몸을 꾸겨 넣는다. 이때 이미 만원 열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새로이 올라타는 사람을 위해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고, 내리는 사람을 위해 출로의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인간애라던가 도덕주의적 이성의 발휘, 자비로운 관대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다만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비좁은 객차 내에서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귀찮음과 짜증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떤 의무가 주는 느낌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의 실효적 분배요구에 강제되는 의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사회적 의무’라 한다. 사회적 의무란 이처럼 인류애나 연민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문제인 것이다.
이제까지 분배의 자격 토대인 임금노동과 성원권 소유자만을 ‘우리’라 불렀다면 여기에 함께 있는 존재를 포함하여 ‘우리’라 할 수 있는 내연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취업 상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은 수시로 일자리가 중단되고 다시 불안정한 취업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의 행정부는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자격을 제한하여 사회안전망에서 배제시켜버렸다. 또한 취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은 6개월 남짓의 짧은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종료되면 영구히 사회적 분배에서 제외되어 빈곤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소득 70%이하의 하위계층 노령자에게 지급하던 월 33만원 이하에서 1만원까지 차등 지급하던 기초연금도 금리 인상에 따른 가능소득을 소득 증가분으로 가산, 수급자격을 대폭 축소하여 노인인구의 생계를 사지에 몰아넣고 있다. 즉 현 정부는 사회안전망 조치인 자원분배를 오직 상호거래의 인센티브로 여겨 노동기여에 한해서만 반대급부를 인정하는 것인데, 즉 사회복지 차원의 분배 정책은 폐지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하게 자원분배의 왜곡이 발생하고 있고 양극화를 극단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의미의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적’이라 표현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지 우연하고 우발적으로 공존하게 된 승객들간의 의존적 관계에 대한 앞선 설명과 같이 사회적이라 함은 생물학적 인구집단의 네트워크나 시장으로 연결된 경제적 이해 당사자들간의 집합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구속력있는 의무로 묶인 특정한 종류의 집단적 자아로서 ‘도덕적 단일체’라 이해하여야 한다. 즉 회원제 조직이나 사회를 규정하고 범위를 정해 놓은 안전망은 무수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건강성이란 비시민권자를 포함한 영토 내 모든 국가 성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인류학자인 저자 제임스 퍼거슨은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 사회가 일군 거대한 부는 “인류 모든 인간의 상상과 고통, 피와 땀에 의한 공통의 유산이기에 모든 사람이 이 공통의 소유권에 대한 요구로부터 보편적 분배요구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전체 생산물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일정한 지분을 가진다는 말이다. 다시 지하철 승객간의 공간 만들기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그저 한 공간에 밀집해 있을 뿐이지만 실질적 의무와 일정기간 지속되는 실용적 조정장치로 실효적 공간을 내어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성이 중대하게 강제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공유의 문제이며, 연민이나 관대한 배려 따위가 아니라 여기 함께 살고 있으므로 불편을 감수하고 적정의 공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의무란 이런 것이다. 이 원초적 사회적 의무를 지속하여 무시하고 배제하려 하면 사회는 급속하게 붕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수많은 반란과 혁명이라 기록된 역사적 현실이다. 사회적 의무는 짜증나지만 어쩌겠어! 와 같은 느낌의 의무이다. 그렇다고 존재에 대한 요구를 승인하는 것이 완전 평등이나 공평을 전제로 한 분배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 이러한 사회적 의무의 반대 면인 요구에 만족스러운 수준의 답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으로 수용되며 성원권과 기여라는 명확한 한계와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공평하지 않더라도 실질적인 자원의 분배에 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실존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인구 소멸국가로 지칭되며, 부족한 저임금 노동력은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비정규직과 실업인구는 점증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발전에 의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성원권이라는 기준만으로 사회 전체 자원을 배분하는 제도는 더 이상 올바른 정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존재인 현존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기준 개념의 지평을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성원권이라는 집단의 폐쇄성은 배타적 성격으로 즉각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함께 산다. 이주노동자가 일군 농산물과 공산물로 우리는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의해 배달 서비스와 경비, 청소 서비스를 받는다. 이 세계는 이들과 여기 함께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곧 사회적 의무의 강력한 근거이다.
이 세계 가치의 원천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사회전체에 대한 과실에 대한 정당한 권리는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배분이 불평등한 것일지라도. 불과 수년 전에 보편적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이 한창 떠들썩했다. 나눔의 대상을 생각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나 정치적 입장의 공유로 판단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저 스치고 지나치고 부딪히는 불특정 이웃에 대한 사회적 의무라는 감각을 사회성의 원천으로 두는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당면한 것이다. 과연 ‘우리’에 누구를 포함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사유케 하는 간결한 저술이다. 낯섦과 수용하기 싫지만 내어주어야 하는 몫의 필요성을 과연 간과할 수 있는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분명 따뜻한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비좁은 열차 안 승객처럼 새로운 승객의 공간 요구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책은 새롭게 수립되어야하는 분배정치의 대안과 전략을 위한 실천적 사유와 내용의 귀중한 촉매제라 하겠다. 120쪽 남짓의 콤팩트한 저작이다. 편견이나 선입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잠시 지우고 순수한 관점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공존과 공유, 공동체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해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많은 독자들이 분배 정치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기본소득이란 왜 요구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