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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픽션 : 런던 ㅣ 시티 픽션
버지니아 울프.캐서린 맨스필드.헨리 제임스 지음, 김영희 외 옮김 / 창비 / 2023년 10월
평점 :
고전을 통한 세계문학 여행이라는 시티픽션 시리즈로 파리 편에 이은 두 번째 읽기이다. 이 런던 편은 네 편의 영국 작가의 단편으로 엮인 작은 소설선집이다. 헨리 제임스는 사망 즈음에 영국으로 귀화한 미국인이니 조금 애매한 분류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작품 활동기 대부분이 런던에서의 삶이었으니 그리 부적당하다고만은 할 수 도 없을 게다. 선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큐 가든」으로 시작된다. 런던 근교 왕립식물원인 큐가든을 지나는 군상들의 행동과 대화를 세밀한 시선에 담아내고 있는 단편이다. 이 선집의 마지막 수록작인 헨리 제임스의 「진품」을 읽으면서 어떤 공통된 시선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 감정 또는 심리의 섬세한 관찰 시선의 강렬함 같은 것이었다. 물론 관찰이 소설의 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 시선 자체가 작품 표면에 보란 듯 드러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 헨리 제임스 (Henry James)
나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이렇게 기지 넘치는 재미를 품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보르헤스가 편집한 ‘바벨의 도서관’시리즈로 간행된 『친구 중의 친구』나, 1890년대인 그의 중기(中期) 작품으로 분류되는 『나사의 회전』과 같은 유령소설로 제한된 내 독서가 선입견을 가지게 했던 듯하다. 수록작인 「진품(The real thing)」은 초상화를 지향하지만 벌이를 위해 소설 삽화 그리는 일을 병행하는 화가의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두 남녀를 맞이하면서 그들의 인물을 품평하는데, “콧수염이나 외투를 직업적 관점에서 눈여겨본 내게 그는 유명인사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 유명인사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멋진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라며, 역설적 모습을 한 인물을 나름의 경험으로 축적된 실감의 구절처럼, 화가인 작중 화자는 타인의 작은 표정과 몸동작, 어조에 이르기까지 면밀한 관찰을 통해 자기감정과 마음을 교류하며 반응한다.
화자는 이러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두 사람이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삽화의 모델을 통해 돈벌이를 하려온 이들임을 바로 간파한다. “회화적 관점에서 나는 즉각 그들을 간파해버렸다.”는 그의 진술처럼 그들이 어떤 유형인지 파악하고, 이미 어떻게 다룰지 결정해버린다. 화가는 두 사람이 퇴역한 모나크 소령과 그의 아내임을 설명받지만, 삽화의 모델로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들의 겸허한 소개와, 적극적이지만 완곡하게 자신들의 장점을 말할 때, 화가는 변화하는 관찰 결과를 통해 자기 작업과의 연결성을 검토한다. 귀족적 분위기를 갖춘 맵씨있는 사람들이지만 그에게는 이미 미스 첨이라는 타고난 위트와 변덕스러운 감수성과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다채로운 인상의 모델로 변신할 줄 아는 고용인이 있다.
모나크 부인은 미스 첨의 낮은 신분이 귀부인역의 모델이라는 것에 당혹해하며, 자신은 귀부인에 더 적합한 모델임을 강조한다. “진품 말입니다. 진짜 숙녀나 신사 말이죠.”, 그들은 생계를 위한 벌이가 필요한 궁핍의 한계에 몰린 이들이었다. 화가는 그들의 절실함에 그 귀족적 형체의 소용을 고려하여 삽화 모델로 당분간 함께하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화가는 이러한 분위기가 작업의 실용적 국면과 어울리지 않는 “예술”적 효과가 발생할까 걱정한다.
모나크 부부와 화가, 그리고 조연격인 신분이 낮은 남녀 모델이 등장하면서, 모나크 부부는 삽화모델로 부적절한, 나아가 화가의 회화능력을 훼손시키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화가는 모나크 부부가 아닌 모델들에게 더욱 적합한 삽화모델로서의 능력에 매혹되고, 모나크 부부를 멀리하려 하지만 생계를 위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은 화가의 작업장을 맴돌며 떠나지 못한다. 그들, 자신들을 진품이라 생각하는 그들은 점차 가짜인 비천한 이들과 모델로서의 신분의 역전을 체감한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끌고 있는 주도면밀한 관찰에 따른 화가의 심리적 움직임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아주 그만 끝내주는 소설이다. 진짜와 가짜, 결코 절대적 가치기준이 아닌 이 개념어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이 작품은 그가 사회적 소설을 쓰며 작가로서의 명성이 주춤하자 전환을 위해 희곡작품에 매진할 때에 사이사이 남긴 몇몇 소설 작품의 하나이다. 때문에 연극적 요소가 반영되어 그 실감성이 여타 작품에 비해 두드러지는 것이 특색인 듯하다. 신분의 격이 삶의 수단을 저해하는 그 모순으로 혼란의 격변을 겪는 시대의 한 초상일 것이다. 제법 기억에 남는 작품 일 것 같다.
■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유품(The Legacy)」 또한 소설의 진행에 따라, 고위 정치관료인 길버트 클랜던이 차도에 내리다 사망한 아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의혹과 의심에서, 배신, 그 파국의 감정으로 치닫는 가히 통속적 재미를 성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아내가 주기를 바랐던 물품들을 모두 전달하고 마지막 유품인 브로치를 아내의 비서였던 시시밀러에게 전달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길버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득안고 추억에 잠겨 일기를 읽는다. 남편인 자신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배려의 마음들이 가득 쓰여져 있는 일기를 읽으며,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의 위로를 느낀다.
그러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이니셜로만 지칭된 인물이 등장하다 그 빈도가 급작스레 늘어난 것을 느끼며, 알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시기와 의혹이 증폭된다. 이윽고 이니셜은 사라지고 ‘그’라는 호칭으로 바뀐 인물이 동일 인물임으로 굳어지고, 그와 아내의 만남과 남자의 격렬한 동행의 요구가 있었음과 마침내 이를 거절하는 아내의 분열적 마음을 읽는다. 남자가 자살했음을 발견하고, 아내의 죽음은 바로 이 죽음의 동반 행위였음을 알게 된다. 감정의 급진적 전환을 일으키는 일기의 내용과 병행하여 이야기의 진행 속도 또한 급격히 빨라지는 데, 이러한 속도에 휘말려드는 독자의 감성또한 아찔할 정도이다.
울프의 또 하나의 단편인 「큐 가든(Kew Gardens)」은 작가를 모르고 읽어도 버지니아 울프가 절로 떠오를 듯한 작품이다. 큐 가든을 스치듯 지나가는 군상들의 발걸음과 꽃나무에 기어오르는 달팽이의 이동이 대비되며, 그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경이 우울한 인상에 젖어들어 들려온다. 허무와 부질없음이 팽배한 그 어떤 의식들만이.
■ 캐서린 맨스필드 (Katherine Mansfield)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The Garden Party)」는 어떤 세계문학 단편선집에든 감초처럼 수록되어있는 작품이다. 부유한 중산층 가족의 가든파티 준비와 파티의 즐거움과 대비되어 이들의 저택과 멀지 않는 골목길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빈곤층 거주 구역에서의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들이 내용을 채우고 있다. 셰리든 집안의 딸 중 한 명인 로라는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 일꾼들의 설치를 지시하기 위해 정원에 나선다. “그녀는 일꾼들은 저다지도 멋질까.”라 생각하며, 매번 춤 상대가 되는 바보 같은 남자애들이 아니라 이들 일꾼들과 친구가 되면 왜 안 되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계급적 구분”의 터무니없음을, 자신만큼은 어떤 차이도 느낀 바 없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꼭 일꾼 처녀가 된 기분”으로 우쭐한 기분으로 즐겁다.
그런데 그날 동네 어귀의 청년이 마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집 안의 어느 누구도 그 죽음에 대해 어떤 연민도 지니지 않는 듯하다. 로라는 “대문 밖에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파티를 열어요.”라며 파티가 이웃의 죽음에 대한 무례함으로 느껴져 당일의 파티 행사 취소를 요구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언니들은 작고 초라한 저 빈곤의 거처들이 이곳에 들어 설 권리가 없었다는 듯, “감상적으로 굴어봐야 막노동꾼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니.”라며, 파티의 취소를 용납하지 않는다. 파티는 예정대로 열리고 가족들과 초대자들은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아마 로라에게 선물된 우아한 ‘검정색 모자’는 중산층의 이러한 이기적 즐거움과 빈곤층의 불행을 대비하는 수치와 과시의 경계에 놓여, 그녀의 곤혹스러운 감정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문상아닌 문상을 가게 되었을 때, 그녀가 처한 상황을 대신 표현한다. 계급의식에 대한 비난과 인생이란 것의 그 설명할 수 없는 비애가 낮게 흐르며 작품의 커튼은 내려진다.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시종 잃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그 어처구니없음의 실체, 가진 자의 생각없는 무례한 동정 등이 당대 영국인들의 인식을 넌지시 고발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