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하게 걷는 자는 인간의 품위를 고수하는 자이다.”
- Ernst Bloch
비굴함은 비열함과 절대적 어리석음이라는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인간 앞에 납작 엎드리거나 허리를 스마트폰의 폴더처럼 구부리며 자신은 결단코 충성하리라는, 절대 굴복하리라는 맹세를 보이는 의례로서의 행위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아니고서는 ‘반(反)-맹세’가 은폐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굴종적 몸짓은 배신이 내재된 것이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는 이 가려진 비굴의 울분을 해소할 다른 창구를 필히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비굴함은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시선을 돌려 동일한 비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권위적 태도로 드러나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해코지,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비굴함의 비열성과 폭력성에 대한 이러한 상관관계는 익히 알려진 것이어서 엔간한 지성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 행위의 위선적인 비윤리성의 의례를 페기하거나 극도로 약화시켜 수직적 인간관계의 부정적 연쇄 고리를 차단합니다. 실제 많은 공적 의례 행사에서 이러한 행태는 사라지거나 대폭 완화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레 이 열등하고 천박한 행태가 공공의 유선망을 타고 뉴스라는 형식을 통해 안방으로 송출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쩍 벌린 다리를 하고 오만하게 한 손으로 임명장을 내미는 자 앞에는 연신 일백 십도로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비굴한 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노예 행위이며, 노예는 주인 앞에서 허리를 굽힙니다.”라고 했습니다.
블로흐는 당당하게 서있는 자, 의연하게 걷는 자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저술에서 자연법의 근본적 목표는 인간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품위임을 밝힙니다. 이 경박하고 비윤리적이기 까지 한 몸짓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입니다. 즉 이 천하디 천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굴종의 몸짓은 이 사회의 사람들에게 권위주의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추한 전경을 수용자가 무감해질 때까지 반복하여 새겨 넣으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별 신체까지 지배하려는 것이지요.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작품인 『간계와 사랑』에는 이러한 굴종이 지배할 때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굴종의 의례는 항상 폭력을 수반합니다.
“자애로우신 우리 영주께서는 모든 연대를 사열식장에 집합시키고, 멍하니
바라보던 얼간이 녀석을 쏘아 죽이라고 명하셨죠.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고...”
인간이 인간의 품위, 존엄성을 지키는 곧은 자세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행위의 조건을 멸실하려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천박한 의도이지요. 즉 시민 대중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방자하고 교만한 권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방송의 통제, 문화 전반에 대한 획일적 가치 설정 등을 통해 수구적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쪽이라는 동일 영토 내에 사는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동일한 시간대를 사는 것은 아닌 것이죠.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른 여러 세대들이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시간은 오로지 개인 자신이 겪은 것에 의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내적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굴종의 위선적 몸짓이 가진 위선과 교활성, 폭력성이라는 퇴행적 과거의 시간에 머무는 작금의 수구 인간들이 있는가하면 가상의 기술사회가 지배하는 저만치 미래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여전히 대도시 노동자들과 농촌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세계관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랜 역사의 시간 내내 가부장적 권위시대를 살았던 지역에는 지금에도 가문의 계층을 따지며 인간을 구별하고 권위를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지독히 전근대적인 시간이 그곳에서는 21세기에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질적 구조의 이러한 기이한 공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블로흐가 개념화 한 것입니다.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간의 실천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찬란했던 과거의 동경으로 시간적 역진을 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몇몇 젊은 시인의 시집에서 ‘꿈’의 존재에 대한 저주를 보고 당황하곤 했습니다. 그네들은 존재하는 질서의 무수한 모순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며,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설계하는 꿈이란 역사를 초월, 일탈하는 현실성 없으며 추상적인 피안에 대한 망상이라 폐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내재된 이상을 향한 욕구인 인간적 의지의 지향성을 애초에 싹부터 잘라내 버리려는 것이죠. 즉 유토피아를 한낱 사라져버릴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실재하는 사회의 문제점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순응하고 복종해라,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꿈이란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리고 약한 자에게 동일하게 요구하라! 절대 머리를 치켜들고 의연하게 걷지 마라. 그러면 검찰로부터 끊임없는 압수와 수색, 기소로 고통받고 급기야 감금 너의 인신을 구속하겠노라는 것이죠.
터무니없이 천박한 것들, 과거의 시간 속 망령들이 돌아와 설쳐대고 있습니다. 하나의 구역질나는 장면이 이 글을 쓰게 했네요. 꿈과 희망을 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를 막아서는 모든 것들에 맞서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사회에 박애와 평등, 인간의 존엄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남겨준 프랑스 대혁명 조차도 에드먼드 버크 같은 수구적 인간들은 시민들을 향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들’이라 했습니다. 바로 동시대를 사는 비동시성의 퇴행하는 역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있어왔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관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는 사회는 권위와 독재가 활개치는 인간 굴종의 세상입니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사라진 사회는 사회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지옥입니다. 품위있는 인간 존엄의 삶을 살 것이냐, 복종하는 노예의 삶을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결코 타인에게 이를 요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의연한 걸음은 만인의 당당한 저항의 자세입니다.”, 이를 저버리면 교활과 위선, 폭력과 굴종이 지배하는 세계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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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1) 에른스트 블로흐 著,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2011年, 열린책들刊
2) 박설호 著, 『꿈과 저항을 위하여-에른스트 블로흐 읽기Ⅰ』, 2011年 울력刊
3) 프리드리히 폰 실러 作, 『간계와 사랑, 빌헬름 텔』 2011年, 민음사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