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위상학 - 전우치전과 홍길동전, 정치와 통치에 대해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이진경이 쓴 한국 고전 소설들에 자리를 할당한 척도를 깨기 위해, 그 틀을 직조하는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고자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파격(破格)의 고전을 읽어나가다  변신의 위상학을 설명하는 <전우치전><홍길동전>에서 잠시 읽기를 멈추고 소회를 남겨두기로 했다.


이 충동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변신술이 목적하는 바의 천박한 욕망,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지 않고 고작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에 얻고자하는 욕망임을 보았기 때문인데, 바로 성공을 추구하는 자의 냉혹한 합목적성,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의 피와 죽음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결여된 것에 사로잡힌 자의 체제 내적 욕망(173)이 풍기는 악취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고닦은 도술이 합목적적 도구가 되는 순간, 세상사를 자신의 목적 아래 복속시키는 무서운 수단으로 변질 악용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일개 검사가 정치검사가 되어 한 국가의 수반이 되자 검사로써 배운 압수, 수색, 기소라는 술책이 만능의 도구인 듯 휘두르는 모습에서 동일한 종류의 인간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진경은 홍길동 같은 인물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읽을수록 멀리하고 싶은 인물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 책의 집필시기의 판단은 성급했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조의 소설들에는 한결같이 여러 유형의 변신술 또는 도술이 등장한다. 이 변신술이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인간화된 도술이 있는가하면, 본질적으로 동물적 기원을 갖는 도술도 있으며, 물질성 그 자체와 결부된 힘을 지닌 <금방울전>의 금방울처럼 물질성의 도술도 있다. 그리고 동물적 기원의 변신에 있어서도 그것들은 또다시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수재의 에피소드인 <왕수재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흐트러뜨리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치안(治安)의 변신이 있는가하면, <전우치전>처럼 동물적 능력임에도 인간의 손안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치안, 통치를 희롱하고 할당된 자리를 벗어나 사용됨으로써 정치(政治)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온전히 인간적 도술을 부리는 <박씨부인전>이나 <홍길동전>은 전자의 경우 경계를 확고히 하여 지배적 가치(統治)를 지키려고 사용되며, 후자의 경우는 서자 자리로부터 이탈의 욕망이라는 표면적 저항을 담고 있다. 그런데 홍길동의 경계 이탈은 지배가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단지 자기 결여에 대한 반항이고 경계, 즉 체제 내적 욕망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사용이라는 점에서 가장 추한 사용이라 하겠다. 이처럼 같은 변신술이라도 그 안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데, 그들이 서있는 지점과 문제화하려는 의도, 사용 목적에 따라 극히 상반되거나 다른 사회적 영향을 낳는다.

 

<전우치전>의 개략적 이야기로 시작하자. 여우의 호정(여우의 넋)’을 빼앗아 먹음으로써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전우치가 여우의 굴에 가서 천서 세 권을 얻었으나 인간이 읽을 수 없는 글이라 구미호를 앉혀 놓고 상권(세 권 중 한 권)을 배워 통달하여 도술을 획득한다, 즉 동물적 기원을 갖는 변신술의 능력으로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새로운 술법을 부려 인간 세계 안에 이러저러한 구획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분할된 자리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통치에 맞서 그 선들을 흐리고 가로지르며 무력화 시킨다. 즉 그는 권력에 반하는 유희를 행하면서 거만한 관리나 잘난 체하는 선비 등 권력의 성분을 포함한 인간들을 참지 못하고 엿을 먹인다. 더구나 전우치는 국가 안에 들어가서도 국가화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의 변신술을 통해서 소위 속세의 권력이나 재화 등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국가나 통치자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희롱하며 유희적 쾌감의 극대화를 노리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는 웃음과 가벼움이 갖는 정치적 힘을 구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통치를 비판하는 정치라는 새로움, 민중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대 조선의 양반들은 전우치전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는지 <전우치 한문본>을 새로이 써서 ()-전우치라는 기치 하에 완전히 반대되는, 다시말해 전우치를 윤리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인물로 규정해 버린다. 한문본의 유치찬란함이란!  전우치가 천서(天書)를 읽을 수 없는 것이라 했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대부들은 전우치 혼자 읽고 깨우치는 걸로 씀으로써 자신들의 우매함이 드러난 것을 알지 못했다. 읽을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직 도달 할 수 없는 아득한 깊이와 거리 저편에 있는 자연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한문본은 서화담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우치가 제압당하는 걸로 종결하여 기성 권력이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서화담이 전우치를 위협하는 문장은 정말 가관이 아닌데, 앞으로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며....만일 내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며 너 같은 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사회와 격리된 깊은 산속이어야 하며, ‘자리를 이탈하면 죽여버리겠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통치질서에 저항하지 말고 쭈그리고 없는 듯 살라는 말이다.

 

로버트 단턴이 쓴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인 고양이 대학살에 소개되는 인쇄공들 그들만의 문화 주제를 가지로 유희를 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하던 그 정치적 이벤트를 떠오르게 한다. 시공을 달리하면서 동서의 민중들은 불의와 부당함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며, 항시 이를 억압하려는 권력의 폭력과 마주했다. 2023년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유머와 가벼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와 상극, 대립에 있는 소설이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은 전우치와 달리 인간의 관념을 벗어난 세계로부터의 기원이 아닌, 지극히 인간의 개념과 범주를 통해 구상된 주역을 읽고 도술을 익힌다. 홍길동은 기존 세계, 즉 체제 내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란 뜻이다. 홍길동의 도술은 전우치의 기성 권력에 대한 도전과 비판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 임금에게 알리려는 과시적 목적의 사용이다. 신의 이름을 드러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홍길동의 말처럼 그의 변신술은 명확한 목적에 의한 기만과 공격일 뿐이다.

 

성공을 추구하는 냉혹한 합목적성, 국가나 통치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변신술이다. 단지 버림받은 처지의 원한을 호소하며 통치 권력이 자신을 포섭해 주길 욕망하는 사술이다.  때문에 홍길동의 반란과 공격은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 즉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거나 권력에 대한 투쟁이 아니다. 임금이 병조판서에 제수한다고 하자마자 냉큼 궁궐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은 고작 권력에서 배제된 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난리를 부린 것,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하는, 이미 국가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결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할 의지도 없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를 얻으려 했을 뿐인 에고이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지금 날뛰고 있다. 민주주의 근간이며 이의 정체적 상징인 국민이 주권의 소지자라는 헌법 질서를 부인하는 관료가 설처대고 있다. 도구적 도술, 도구적 변신으로 권력만을 탐하려는, 자리를 얻어 이기적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만이 득시글댄다. 국가와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말해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니 정치가 실종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정치는 다름을 통합하는 기술의 장()이다. 다름을 폭력의 대상으로 적대화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다. 통치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정치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질서의 경계를 확정지어 기성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는 수구적 태도가 <홍길동전>과 유사한 소설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박씨부인전>이 있다. 인간적 도술에 기초한다는 측면에서도 홍길동의 도술과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술책을 쓰는 별당 아씨 박씨부인은 초월적 예견력을 발휘하여 시댁의 부를 늘리고, 국가의 위난에 대비하는 등 가족과 국가질서의 굳건한 주체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늘 패하고 상상 속에서만 승리한다.

 

철학자 이진경이 지적하듯 일종의 루쉰 식 정신 승리법에 도취한 인물이다. 현실적 패배는 눈앞에 지워버림으로써 패배의 이유를 묻지 않게 되므로 계속해서 패배하게 된다. 쓰라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영원히 그 패배에 달라붙은 불모의 지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출구는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금의 정권처럼 재난은 반복된다. 책임을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책임은 또다른 재난을 계속 반복할 것이고, 그것은 민중이 고통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승리적 관점만을 취하려는 이 몽매함, 정신승리법! 에 도취된 권력을 지닌 국민은 고달프다. 통치에 대항하는 전우치의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읽기위해 한문본 전우치가 아니라 경판본 37장을 계열로 하는 한글 전우치전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기성의 평가의 척도를 깨부수고 기존의 틀과 대결하는 파격(破格)‘을 알려주는 고전소설을 새로운 절단면을 내서 읽도록 견인하는 이진경(박태호)교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파격의 고전, “확립된 평가의 틀 안에 이질적 기준을 밀어넣어 새로운 감응을 만들어내는 이 책을 마구 선전해도 어떠한 비난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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