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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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행복하기의 저주로부터 행복을 빼내라!”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치, 예술, 역사, 문화 등 제 분야의 시선을 기저로 한 아홉 편의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들로 구성된 가히 빛나는 지성들의 향연집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꽤나 많은 유토피아의 기획이 있었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또한 이를 현실의 사회공동체로 실현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도 알고 있다. 이러한 기획들과 현실화 추구가 실패한 것은 왜일까? 왜 이러한 시도들이 그 기획된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일까? 현실의 인간들과 인간사회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기획은 캘리포니아줄리엣 플라우어 맥케넬교수의 지적처럼 미성숙하거나 위험할 정도로 순진하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어떤 실질적 헌신에서 벗어난쾌락원칙에 따르는 충동의 영역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기적 생각 때문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유토피아를 놓지 못하고 매료당하는 것일까? 과연 도달 가능한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문명에 대한 원초적 적대감의 발로이기만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 불가능성의 순회하는 환상을 좇는 것으로부터 우연히 어떤 새로운 정신적 창조물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려는 낙관적 의도인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렇듯 그치지 않고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는 지성의 열망에 내재된 정신을 탐사하는 작업들이다. 그것은 어떤 돌파구의 발견이거나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을 향한 모색이기도 하며,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토대로부터 역설적인 자기 이해에 터 잡은 인류의 주류 혹은 지배적 담론의 파기이고, 사유 가능한 지대를 향한 인간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남의 기도(企圖)이기도 하다.

 

아홉 명의 필진은 철학자 에티엔느 발리바르로부터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다니엘 버저론등 그 화려한 명성만큼 빛나는 사유들을 펼쳐내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이 관심을 갖는 주체에 대한 탐색을 기초로 한 인식체계의 대전환적 검토이며, 인간과 인간 역사의 들여다보기이다. 이상(理想)사회 혹은 이상국가의 담론에서 토머스 모어유토피아(Utopia)를 배제하고는 만족의 과잉된 풍요를 자유롭게 즐기도록 가공된 장소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기초로 한 국가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역사학자 클로드 마조릭이 정의한 유토피아의 세 기능(106쪽 참조)처럼 모어는 그 사유의 출발로 타당할 것이다.

 

이 책의 발제 논문격인 투셰(tuche)와 유토피아에서 라이언 앤소니 해치사회정치적 목적론의 최종지점이자, 공공의 안녕과 인간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온갖 모순들을 궁극적으로 해소하는유토피아의 기획은 최종적 성취를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며 기성의 유토피아 기획의 한계를 논의한다. 아마 괴테의 말처럼 화창한 날이 계속되는 것 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뻔한 비천한 인간성의 한계 때문이다. 모어의 책 내용을 소환해보자. 모어가 묘사한 이상국가는 주체를 희생시켜서라도 평등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정치적 급선무가 실현되는 국가다. 즉 개별 주체의 향유에 대한 단속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라는 점이다. 결국 공동체의 이상을 위해 개별 구성원의 쾌락이 봉쇄되어야 진정성이 유지되는 체제의 본래적 취약성을 지닌 기획이라는 점이다. 이 내재된 긴장 때문에 유토피아는 균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투셰는 바로 이처럼 주체가 우연적 실재와 조우하게 되는 것으로서 제아무리 완벽하게 방어벽을 두른 폐쇄된 공동체도 무언가의 돌출, 길들여지지 않는 무엇으로 인해 붕괴된다. ‘줄리엣 플라우어 맥케넬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 관하여는 이 발제논문의 심화편으로 읽히는데, 문명에 고유한 불만을 치유한다는 완벽함을 목표로 한 공동체의 기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루소의 입장을 빌어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장소를 상상해 낼 상상력이 없음을 주장한다.

 

또한 영원한 에덴의 약속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려는 변화하거나 변형되지 못하는 죽음 충동으로서, 무시간적 존재의 상태로서의 순간이기에 어디에도 없는, 즉 모든 곳에 있다는 무시간성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균열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설혹 성공한 유토피아일지언정 중대한 희생을 반드시 요구하게 됨으로써 언제나 일정하게 특정한 요소에 대한 총체적 금지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결국 현실 원칙에 결합되는 쾌락원칙에 이끌린 충동에 의한 것을 피하기위해서는 새로운 만족과 다른 형태의 향유를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현 인류가 물질적 풍요와 자유, 만족과 같은 물질적 구성이라는 인간성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줄리엣은 이 영구적 불행을 새로운 주이상스의 경험으로 바꾸는 일을 예술이 감당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결국 논문의 필자는 경험의 변형을 감당하고 목격하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예술에 유토피아의 환상을 전가하는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에서 유토피아로 구축된 사회구조의 이면을 보라고 주장하면서 현실성이 되는 차원을 회복시키는 움직임으로서 잠재성을 강조한다. 즉 그는 기억에 출몰해서 재상연되기를 요구하는 역사적 유령으로서 인간을 구원하는 단순한 환상을 넘어선 공상의 장소로서 유토피아를 피력한다. 이를 상상할 수 있기 위해서 'G.K.체스터톤' '뒤로 사유하기, 즉 육체로부터 이탈되어 순수하게 응시로만 남아서 자신이 부재한 세상을 관찰하는 응시, 인간적 함수가 풀려나오기 이전의 지각을 훈련하는 방법을 동기화 할수 있는 상상의 방식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이해를 돕기위해 사례로 든 무역센터에 충돌하기 수분 전 승객들을 찍은 화면이야말로 물자체로 사물을 보는 비인간적 눈이 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응시다. 나는 이 사후적 사태로부터 상상하는 어떤 순간의 명료한 직시가 유토피아의 잠재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죽음에 임박한 경직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면 유토피아는 줄리엣의 지적처럼 단지 죽음충동,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지 못한 게으른 현실의 원칙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가라타니 고진이 쓴 혁명과 반복은 정치적 시의성 때문에 비교적 흥미롭게 읽게 된 글이다. 그는 역사의 반복은 있다고 믿는다. ... 반복되는 것은 확실히 사건이 아니라 그 반복적 구조이다.”라며,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첫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는 첫 문장을 언급하며 과거와 현재의 구조적 유사성이 있을 때 반복되는 역사의 내재적 구조를 거듭 강조한다. 이 역사적 구조의 반복성이라는 통찰을 통해 국가자본주의의 세계 역사적 단계를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상업주의-자유주의-제국주의-후기자본주의-신제국주의로 이어지는 국가와 자본의 구조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반복성의 발견이다. 이 단계는 두 계열의 구조로 양분할 수 있는데, 자원과 시장을 향한 투쟁이 또 다른 세계 전쟁이나 저항운동으로 이어지는 A계열과 다중봉기의 혁명을 통한 복지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채택되는 시민적 긍정의 세계가 열리는 B계열의 단계이다. 그의 분석이 가리키는 오늘의 반복계열이 속해있는 구조적 반복을 읽으면서 이 직면한 부정적 사태를 어떻게 순화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복을 피할 길은 정말 없는 것인가? 우리들은 새로운 인간성을 위한, 쾌락의 원칙 너머를 상상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인 것일까?

 

어쩌면 정신분석가인 캐나다 라발다니엘 버저론교수의 유토피아와 정신병: 초월로의 탐험은 이 불가능한 것, 인간 경험 너머의 순수한 정신적 창조물을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가능성으로의 초대일 것 같다. 개인의 요구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차원을 넘어서고 나르시즘적 야망과 육체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상을 인간에게 투사해줄 초월에 대한 관념적 이상의 사용을 말하는 신경증적 전략은 새로운 인간성을 가능하게 해줄 어떤 고안을 상상할 수 있게 돕는다.

 

인간의 기능과 사회적 연결망의 구조 사이의 모순을 거부하는 정신병자의 믿음에서 말이다. 도덕적, 문화적 가이드라인을 결정해서 사회적 수용 가능한 명령과 관념적 이상을 강요하는 주인의 담론에 대항하는 기획인 모어의 이상사회로부터 다니엘 교수는 유토피아를 댓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가를 읽는다. 그것은 욕망을 쾌락원칙의 지배 하에서의 관능으로 제한하는 것, 사회의 금지 구조 내에서 사회적 연결망이 가능하게 해주는 만족을 준수하는 것으로서, 바로 자기 욕망의 거부라는 값이라고 지적한다. 즉 유토피아란 주관적 욕망과 초월적 대상을 향한 모색을 억눌러야만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것이라는 자명한 논리다. 정신병자의 해결책은 결여의 억압이다.”라는 선언처럼 문명의 건설은 강력한 충동의 비-만족을 상상한 규모로 설정된다는 것이다.

 

이에대한 역사적 사례로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수학자 존 내쉬<게임 이론>이야말로 인간성을 재난에 빠트릴만한 혈투를 없앰으로서 지구상에 균형을 재구축할 수 있는 효과적 이론으로서, 그야말로 유토피아 실현의 가능성을 재현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들을 제약하는 사회적 담론 안에서 우리의 행위를 방해하는 검열된 주이상스를 묶어둘 정박지를 세우지 못하지만 내쉬나 루소, 콩트, 니체 등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사유를 공동체의 사회적 연결망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사회적 연결망으로부터 배제되고 거부된 주이상스(享有)의 대상을 가시화하고 번역할 공간을 추구함으로써 이상적 장소에 도달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다면성을 존중하는 의식이라는 무엇일까? 내 주이상스와 이를 거부하는 사회와 연결되는 인간적 문제를 절합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머리로 이해된다고 실천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에티엔느 발바르정의와 평등; 정치적 딜레마? 파스칼,플라톤,마르크스는 어쩌면 우리들이 직면한 무수한 사회적 흠결로서 유토피아를 상상케하는 부정적 동력인 전형적인 사회적 갈등으로서의 개념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사회적 평등의 문제는 정의를 둘러싼 대립을 낳는다. 이 두 대립하는 개념으로부터 힘의 지배, 정의의 주체를 생산하는 법적 세계와 이 법이 추구하는 법의 이상에 대한 논의가 시민의 정치적 사유를 성찰로 이끈다. 한편 철학자 애드리언 존스턴교수의 미래로부터 오다에서는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외없이 불가능한 일관된 통일성을 욕망함으로써 지속되는 잘못 인식되고 파행적인 꿈으로 환원되는 것인가?”라는 물음 하에 과거의 모든 정치적 보상적 논리로부터 추출된 근본적으로 다른 미래 상황은 진정으로 비-경험주의적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라캉의 반-유토피아주의를 빌어 낡은 욕구를 재상산하는 메커니즘의 폐지를 주장한다. 이 순환적인 메커니즘을 폐지하려면 이것을 폐지할 욕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조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른다.

 

아마 내 안의 익숙한 쾌락의 원칙, 주이상스를 떨쳐내는 것에 감히 나설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혹 내가 이 원칙 너머의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갈지언정 그 누가, 이 사회와 인류 모두가 과연 나서리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에드리언 교수의 말마따나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귀싸대기를 한 대 맞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들이 잠겨있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일지도.

 

결국 아홉 명의 필진 모두는 그 논리와 이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욕망 너머의 다른 어떤 것을 향하는 욕망과,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부터 거칠고 긴장된 공격을 제공하는 특수한 사건들의 놀라움 사이의 우발적 충동을 통해서 해로움의 신선함을 위한 상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쾌락 원칙의 경향에 연결된 제반 사항들과 연결을 끊는 윤리와 정치를 어떻게 착안 할 것인지가, 그에 대한 인류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지 여부에 진정한 미래, -장소의 유토피아가 아닌 진짜 이상 사회가 성취될 것인지도. 그의 표현처럼 우리들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이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오랜 소망과 몽상에 가해져야 가능한 것일 게다. 인간, 인류가 꽁꽁 얽매여 있는 꿈의 종말이 시작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 일 것이다.

 

이것은 행복해진다는 익숙한 쾌락원칙이 부과하는 기획으로서 유토피아가 아니다. 결코 인간은 자신들의 본질인 주이상스를 정복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유토피아의 기획이 불모인 것은 아니다. 쾌락원칙에 따르는 유토피아는 그 본질 때문에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이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이 다채로운 사유들은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문명적 불안을 낳는 궁극적 원천에 대한 숙고로 이끈다. 어쩌면 이 책은 현재의 인류인 우리들의 향유를 새로운 경험의 주이상스로 바꾸는 사고의 실험이며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곳, 다른 가치를 생각하는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바로 오늘, 인간 사회의 불안과 갈등, 불협화음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욕망의 저주를 고찰하는 빛나는 유토피아의 모색들과 함께하는 영예를 누린 것에 감사하게 되는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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