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그림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가장의 근심」에서 설명되고 있는 '오드라덱(odradek)'이라 불리는 형상을 그려 본 이미지다.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형상의 핵심은 "그 누구도 합의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아무런 목적도 없는 존재!, 통제나 지배가 불가능한 그 무엇,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불안을 느끼고, 근심을 초래한다. 목적이 따로 없으니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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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75쪽, 2부 '성스러운 흡혈가족 이야기' 중 인용된 이미지 재인용 】
아마 카프카가 그의 소설에서 시종 말하려 했던 것의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 삶에 어떤 고정된 척도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카프카는 법, 질서, 삶의 척도로서의 아버지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에 비로소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적응한다는 오이디푸스적 발상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상식이라는 그물로 처진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삶, 삶을 실현하는 감각을 바꾸는 일에, 어떤 규율이나 명분에 구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꿈꾸었을 뿐이다.
그러고보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를 카프카가 선취했던 것 같다. 들뢰즈가 '"아이는 엄마,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했던 '분열자의 산책'을 이미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나 『성』의 'K', 『실종자』의 '카알 로스만'이 세상의 익숙한 시선들을 찢어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으로 인간 존재를 해방 시켰던 들뢰즈와 같이 더 이상 아버지를 권위를 부여받고 군림하는 규율로 바라보고 있지 않는 카프카의 소설 속 아들들의 시선은 많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이들에게 가족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로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각양각색의 사회적 관계 속으로 나아가는 무수한 길이 있음을 안내하지 않았는가?
사실 18세기부터 출현한 핵가족 중심의 스위트홈이라는 낭만적 허상이 자본주의 욕망을 지탱하는 축으로 작동해왔음을 지적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이해가 되어버렸으며, 화폐에 대한 탐욕과 위선을 덮어주던 '가족'이라는 대의로 포장된 도덕의 효력도 이젠 거의 소진된 형국이다보니 근대 가족주의에 매달리는 퇴행적 진술은 언어의 불필요한 남용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카프카가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는 글쓰기"를 통해 바로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로 상징되는 당대의 속물주의와 민족주의에 맞서는 문학형식으로 주장한 것이야말로 바로 그 어떠한 근대 가족주의의 비판적 지성을 넘어서는 탁월함일 것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형식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는 물질적 구색 밖에는 안 될 거라는 것..." - 21쪽
가족주의가 발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나가는 직업을 갖고 착하고 예쁜 아내(돈 잘 버는 남편)와 토끼같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삶, 이러한 관계를 건실하게 끌고나가는 교육 잘 받은 성인 남성(여성)-30쪽"으로 키워내는 것, 지배문화에 영합하고 주류계층의 취향으로 도배시키는 것에 열중하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를 주입시키는 것에 온통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닌가? 카프카는 이런 삶의 태도를 참을 수 없어 했었던 것 같다.
이 속물주의에는 현실부정론과 준비론, 즉 미래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키고 언젠가 도래할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삶, 목표지상과 현실부정의 음습한 냄새가 가득하다. 자본주의의 축적논리와 기독교의 메시아주의, 근대 핵가족의 이기주의가 완전히 닮아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이 "무리들이 칭송하는 아이콘만 좇게 될 때" 그 얼마나 살벌한가? 삶의 다양성을 축소시켜 쪼그라들어 편협해진 욕망의 기이함에 매달려 주둥아리와 온 몸에 피를 낭자하게 묻히고 허겁지겁하는 괴물들의 투쟁장으로 인간 삶을 축소시키는 중심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위선적 규정이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재칼과 아랍인」 은 오늘의 인간들에 대한 적나라한 초상일 것이다.
인간 '나'를 규정할 수 있는가? 어쩌면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고정된 척도에 매달려 있으니 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늘 다른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어떤 인간도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살 수 없다, 만일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러저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어야 해."라며 어떤 경험들을 필수로 간주하게 되면 남는 건 불안뿐일 것이다. 이걸 주워 담는 틀인 우리시대의 '가족'은 이 책의 표현처럼 "성스러운 흡혈가족"이라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네, 김기사네, 이들 핵가족의 일그러진 표상, 바로 그것.
척도를 계속 바꾸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감각의 변화를 도모한 갑충-그레고리, 사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보는 실험을 하는 『실종자』의 카알 로스만, 삶에 어떠한 고정 척도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무궁한 변화를 시도하는 『성』의 K가 바로 오드라덱이다. ‘넌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이 천박한 우라질 현실부정의 속물성을 벗어나 목적없는 존재, 무수한 다양성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우리네 세상은 타자와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생명의 플랫폼으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축조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카프카를 통하여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을 갖는 것", 그럼으로써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터전의 토대를 놓고 있다. 또한 카프카의 원인도 목적도 없는 소설들의 형식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로와 태도로부터 개인 각자의 삶에 대한 시선을 스스로 묻고 답하는 사유의 실마리를 갖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정 그러한 것인가를 , 그 상식이라는 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