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 시대 - 거짓 문화에 빠진 미국, 건국기에서 트럼프까지 질문의 책 32
수전 제이코비 지음, 박광호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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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반지성주의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합리주의, 대중의 일반적 무지, 정크(junk)사상, 근본주의 등을 이용하여 그 편협성과 거짓말로 점철된 건국에서부터 트럼프 시대의 미국사회를 돌아본다. '사상과 이성, 논리, 정확한 언어를 황폐화시켜' 특정 집단이나 계급적 이해관계에 복무케 해왔으며, 여전히 그 근본적 양상들이 위력을 발하는 요인들을 분석, 비판하고 있다.

 

서 언 ; 반지성이란 무엇인가?

 

'반지성'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지성에 대한 반어로서 의심과 혐오, 그리고 두려움이 결합한 기이한 어휘다. 그런데 반지성을 알아보는 것이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닌 이유는 이것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자기 이익적 집단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지적 게으름이나 무지에 편승한 편협성의 토양에서 자라는 교활함, 사악함,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점이다.

 

지성을 혐오하는 반지성과 대중의 일반적 무지가 뿌리내린 미국사회의 역사적 토양을 읽는 것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혹여 반지성주의에 침윤된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반지성은 미국사회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닐뿐 아니라 한국사회 역시 현재 진행형인 양태이며, 이것이 정치사회적 퇴보는 물론 인간의 도덕적 역량과 문명적 퇴화를 재촉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질적 양적 후퇴로 이어지는 그 실재에 도사린 요인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더구나 미국이라는 강대국 대중의 무지는 물론 그 리더의 반지성이 다른 세계, 약소국에 특히 위험하다는 까닭에서 그 중요함을 가볍게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반합리주의 세계가 열린다." - P 336 에서

 

"디지털 환경이 추동하고 문자메시지와 트윗이 촉진한 언어의 황폐화"가 양산하는 가짜뉴스의 사례로 시작하는 서문은 "비디오 영상과 끊임없는 소음으로 가득한 무지몽매의 대중문화와 공생하는 혼미한 정신의 신종 반합리주의로 악화"되는 오늘의 문화와 정치의 급증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을 지적한다. 이 위험이란 소셜미디어와 결합한 편협성의 증가인데, 이것은 견해가 같은 이들만의 집결로 편견을 강화하고, 그것의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편협성 충족의 공간 역할 이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오류와 거짓을 빠른 속도로 거리와 무관하게 확산시켜 갈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아마 지금 바로 유튜브를 클릭하면, 많은 정치적, 문화적 동영상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근거없는 유언비어에서부터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사실과 다름이 드러날 거짓말, 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데이터, 합리적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여 사람들과 사회를 자신들의 욕구와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몰아 불의한 소음을 계속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대중의 무지를 먹고 사는 것이다. 실제적 오류의 간파는 기초지식과 비판적 사고력을 요구한다.

 

140자의 단문과 조금만 긴 문장이면 읽기를 중단, 회피하는 진지한 읽기의 쇠퇴, 줄임말의 난무와 심각한 문법적 오류투성이 문장, 자신의 무지를 자랑스러워하기 까지 하는 부끄러움 상실의 현실은 반지성이 활동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의 뒤나 캐는 화젯거리와 가십에 클릭이 모이고, 심각한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열망에 부응하는 무용(無用)의 것들에 손놀림을 하느라 분주하지만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말하는 자기기만을 깨닫지 못한다. 이에 비하면 지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며 책을 읽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반지성은 자기 이해라도 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본 론 ;기독교 근본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빨갱이 좌익분자, 정크 과학과 사상 ..

 

18세기 건국기부터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반지성과 반합리가 사회적 주류였음을 주장하는 책의 저자 '수전 제이코비'"영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들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축적하려 애쓸 필요 없이 지식의 보고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에 지적 추구를 무시하면서도 야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며 미국 건국기의 '유사 식민지적 종속성'이라는 당대 특징으로 반지성 역사의 포문을 연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가 열리자 전통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종교 문서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믿음)적 신념을 파괴하는 지성에 의심과 혐오, 반감을 드러냈으며, 이들의 근거지역과 흑인 노예와 무식한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부리는 대농장주가 중심인 남부지역 등은 연방정부에 의한 전국적인 공교육을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늘에까지 이어져 공교육의 심각한 불평등과 문화적 분열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남의 아이들 교육에 세금을 내는데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들 지역(state)만의 종파적 교과서를 만들어 근본주의적 신앙을 위해 합리적 이성과 지성을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으며, 신이 4000년 전에 세심하게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는 과학적 문맹으로 생물학, 지질학 등의 과학은 물론 합리적 이성과 관련한 여하한 인문 사회적 통찰도 교과서에서 실리지 못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자연으로서의 인간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자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지적설계론이라는 사이비과학에 열광한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아마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범람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입각한 '적자생존의 사회선택'이라는 황망한 사이비 이론의 시작에 이러한 미국사회의 배경이 있었음에서 반지성의 그 적나라하고 견고한 뿌리를 보게된다.


찰스 다윈은 '적자생존'이란 말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 The Decent of Man에서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바뀌면 환경 요인과 도덕적 사안이 자연선택에 우선하게 된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도금시대로 불리는 19세기 독점 자본가들과 빈곤의 만연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위니즘을 산업 자본가들과 대농장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사상적 토대로 제공한 사이비 과학의 전형이랄 수 있다. 즉 반지성이 사회를 잠식하고 오늘에도 재생되는 현실처럼 특정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거짓 이론의 끈질긴 생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W.부시의 뇌로는 예일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연줄이 없었다면(부시 가문의 부와 권력)

근처에도 못 갔을 것, (...) 노력 없이 얻은 특권...." - P 439 에서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이 질긴 생명력의 근간에는 이처럼 개신교 복음주의 근본주의자 집단이 놓여있다. 이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대중들(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믿음, 진화론의 부정)은 지성,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 싸여있기에 반지성이 권력화되고 부를 축적하기에 훌륭한 기초가 되어준다. 이러한 사회의 바탕은 아이젠하워, 닉슨, W.부시로 이어지는 무식함과 개신교 복음주의 바탕의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급기야는 "상스럽고 무지를 숨기지조차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까지 한다.

 

"세계지도에서 자신의 골프장들 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까지 지적 능력을 의심받는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 단문은 대중의 일반적 무지에 부응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패턴의 사용이라는 반지성적 성향의 증거이며, 이는 곧 대통령(국가 리더)의 스타일은 대중의 지식(지식의 부족)에 의해 형성됨을 의미한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근본주의 종교의 이데올로기와 정크과학이 결합하여 유독한 효과를 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코로나19에 대한 엉터리 의학적 권고와 처방의 난발, 대대적인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착용과 같은 확립된 과학 지식의 거부와 이러한 자기 결정에 대한 열렬한 정서적 확신은 반지성과 반합리주의의 전형적 위험의 표상이랄 수 있을 정도이다.

 

정크과학은 정크사상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자기계발이라는 반합리주의를 팔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 사회의 미국에 대한 유사식민지 근성은 그대로 이식되어 서점가를 누빈다. 이것이 잘 팔리는 이유는 늘 손쉬운 방법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그만큼 사유와 숙고라는 노력,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다. 정크사상, 자기계발 따위의 책이 팔리는 사회라면 반지성의 적신호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허섭 쓰레기들을 쓰는 자들의 지적능력은 매우 높은데, 자신들의 필요 논리를 포획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곳에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적 증거도 없으며, 수학적 논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와 인과관계도 구별하지 못한다. 전문가가 이따금 틀린 사실에 기초해 자신의 주장을 진실화 하기도 하는데, 이미 틀렸으므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를 악용하는 반지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반지성의 횡행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빨갱이, 좌익분자라는 낙인찍기이다.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의 목을 조르는 데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던 듯하다. 이를 그대로 이식하여 한국의 수구집단들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오늘까지 지겹도록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사회전체의 지성이 정치적 공격에 취약하게 한다. 애국주의와 국가반역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인데 반지성의 대표적 형상이라 할 것이다. 우파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반공 히스테리와 결합하여 자본과 기득 권력은 대중의 반지성을 구태여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미국 사회의 가속화된 문화적 대중성 추구는 '미들 브라우(middle-brow)'라는 일종의 지적 중간층을 해체케 함으로써 모든 지적 척도의 하향화를 재촉하여 전체 사회의 반지성, 반합리주의를 고착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 어 ; 오늘의 미디어 - 반지성의 비옥한 토양

 

미국 백악관의 최고위급 정치인의 인터뷰 일화로 시작해야겠다. 그가 한 발언이 거짓말임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왜 그런 거짓 발표를 했는가고 기자가 질문했단다. ", 그건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에요." 사실(fact)에 대한 대안(代案)이란 이 황당한 답변이야말로 반지성의 표상(?)이라 할만하다


소셜 미디어가 생활 플랫폼의 주류가 된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단문 메시지에서부터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와 같은 사진과 짧은 영상, 그리고 검색 엔진을 통한 텍스트의 무수한 링크 정보들, 이러한 것들이 생산하는 정보의 양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증식하고 있다. 누구나 쓰고, 게시할 수 있는만큼 그 모든 것들이 가치 있는 정보, 진짜 정보, 사유를 낳는 정보는 아니다. 왜곡과 거짓과 위선과 기만의 언어와 이미지들로 가득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진지한 사고와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거나 망상일지도 모른다.

 

실제 독서 및 글쓰기와 인터넷의 텍스트 접근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소셜 미디어에 장황한 비평이나 서술의 문장 따위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나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더구나 상업성 추구가 최대 목적인 대중문화의 폄하에 발끈하며 엘리트 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으며, 인터넷 뉴스사이트의 코흘리개 편집자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지성적 자기 검열의 책임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지적 돌팔이 짓을 하며 그릇됨을 추궁하면 그저 견해가 다른 것이라며 일축하고 사실 증명의 어려움을 악용하기도 한다.

 

"그가 입을 열면 늘 인간의 지적 능력은 총량이 줄어들고 만다." 

- 1890하원의장, 토마스 리드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플랫폼만이 이런 형국은 아니다. 주요 일간 신문이나 이명박 정권이 기업자본가들을 위해 선물한 우후죽순의 종합편성 채널과 같은 TV역시 지적 측면에서 이미 품질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다. 산만하기 짝이없는 반사적 인포테인먼트가 주를 이루고 뉴스는 진위의 확인 없이 아니면 그만 식으로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정보나 가십, 뒤캐기 식의 화젯거리 중심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용하는 이들, 시청하는 이들의 분별 능력 없음이라는 무지(無知)에 터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TV만 틀면 한국인들의 지적 능력 총량이 줄어드는 형국인 것이다.

 

일 년에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학예술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이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라는 것은 새삼스런 자료가 아니지만, 많은 지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독서가 지닌 사유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얻어들은 자기 편향적 클릭의 정보는 편견과 무지를 확대할 뿐이다.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를 찾고자 두리번거리는 것에는 사유가 불필요하다. 그리고 발견한 텍스트에서 집단지성 덕분에 한 권의 고립된 책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엮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짜깁기(remix)와 표절 생산이 판치는 이유이다.

 

베토벤과 비틀스의 음악을 모두 사랑할 수 있지만 그 둘의 음악이 같은 수준의 음악적 천재성을 의미하지 못한다. 심미적 감각과 이성적 사고 능력의 엄청난 차이를 무시하려는 마케팅적 발상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산일 것이다. 반지성은 항상 반합리주의와 함께한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다른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정말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대체 정의와 지켜야 할 도덕가치는 무엇인가, 삶에서 지켜내야 할 진정한 안전과 자유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 반지성주의의 본질은 게으른 정신과 함께한다고 한다. 무지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늘 악덕이다. 오늘 나와 우리들, 이 사회의 주체들은 과연 지금의 오늘을 이끄는 가치가 옳은 것인지 반성적 사유를 위해서라도 이 한 권의 책 읽기를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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